<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7월 21일 2024년- 킴벌리 커버거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 금방 학교를 졸업하고 머지않아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아니, 그런 것들은 잊어버렸으리라.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았으리라. 그 대신 내가 가진 생명력과 단단한 피부를 더 가치있게 여겼으리라. 더 많이 놀고, 덜 초조해 했으리라.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데 있음을 기억했으리라. 부모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고 또한 그들이 내게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사랑에 더 열중하고 그 결말에 대해선 덜 걱정했으리라. 설령 그것이 실패로 끝난다 해도 더 좋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아, 나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리라. 더 많은 용기를 가졌으리라. 모든 사람에게서 좋은 면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그들과 함께 나눴으리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분명코 춤추는 법을 배웠으리라. 내 육체를 있는 그대로 좋아했으리라. 내가 만나는 사람을 신뢰하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었으리라. 입맞춤을 즐겼으리라. 정말로 자주 입을 맞췄으리라. 분명코 더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해했으리라.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사람다움이란 > 7월 14일 2024년 고등학교시절 학급 교훈이 있었는데 그것은 ‘사람다운 사람으로 자라가자”였다. 철없던 시절에 다분히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교훈을 조회시간 때마다 학우들과 함께 복창하곤 했었다. 사람답게 사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상식을 갖고 사는 것이다. 상식은 지극히 당연한 것인데 요즘 시대에 상식이 많이 실종되었다. 그것을 되찾는 것이 사람다운 것이다. 또한 사람답다는 것은 휴머니티를 지니는 것이다. 즉 인격적이며 책임감이 있으며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겸손하고 너그럽고 주어진 일에 성실한 것이다. 휴머니티를 지닌 사람은 누구에게도 비굴하게 굴복하지 않으며, 자신의 힘으로 약한 자를 도와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상식선에 따라 휴머니티를 갖고 살아가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과 많이 통한다는 것이다. 사람답게 사는 사람을 구약성경은 의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의인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삶을 회복한 사람을 말한다. 신약성경에서는 이것을 빛의 열매,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로 말한다. 또한 이 모습을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의 삶, 성령의 열매로 말한다. 더 나아가 사람답게 사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람은 사랑할 때 가장 사람다와진다. 사랑 안에서 인간성이 최고도로 발휘되며 인간의 가치가 가장 아름답게 드러난다. 주님은 ‘너희 빛을 세상에 비추라’ 말씀하셨는데 그 빛은 착한 행실이라고 설명하셨다. 착한 행실, 즉 사랑이 사람답게 사는 상식의 삶이다 라는뜻이다. 반면에 사람다움을 잃어버린 모습은 짐승과 같다. 짐승같은 사람을 보면 우리는 견딜 수 없어 한다. 그 사람 안에서 몰상식을 보기 때문이다. 또 인간다움, 인간으로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를 저버렸음을 보기 때문이다. 사람답지 못할때 비인격적이고 무책임하며, 나대며, 불친절하고, 게으르고 교만하며, 타인을 억누르고, 약한 자를 짓밟게 된다. 또한 탐욕과 거짓으로 행하게 된다. 이게 바로 짐승성(brutality)이다. 이런 사람을 구약성경은 악인이라 말한다. 이런 사람을 신약성경은 타락한 옛 본성대로 사는 사람, 이성없는 짐승같은 사람이라 말한다. 결국 사람답지 못한 자는 하나님을 떠나 마귀의 종노릇을 하며 자기 중심적으로 사는 사람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좋은 믿음은 결국 상식을 지키며 사는 것, 즉 사람답게 사는 것이다.
목회칼럼 2024년 7월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7월 21일 2024년- 킴벌리 커버거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 금방 학교를 졸업하고 머지않아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아니, 그런 것들은 잊어버렸으리라.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았으리라.그 대신 내가 가진 생명력과 단단한 피부를 더 가치있게 여겼으리라. 더 많이 놀고, 덜 초조해 했으리라.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데 있음을 기억했으리라. 부모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고 또한 그들이 내게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사랑에 더 열중하고 그 결말에 대해선 덜 걱정했으리라. 설령 그것이 실패로 끝난다 해도 더 좋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아, 나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리라. 더 많은 용기를 가졌으리라. 모든 사람에게서 좋은 면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그들과 함께 나눴으리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분명코 춤추는 법을 배웠으리라. 내 육체를 있는 그대로 좋아했으리라. 내가 만나는 사람을 신뢰하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었으리라. 입맞춤을 즐겼으리라. 정말로 자주 입을 맞췄으리라. 분명코 더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해했으리라.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사람다움이란 > 7월 14일 2024년 고등학교시절 학급 교훈이 있었는데 그것은 ‘사람다운 사람으로 자라가자”였다. 철없던 시절에 다분히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교훈을 조회시간 때마다 학우들과 함께 복창하곤 했었다. 사람답게 사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상식을 갖고 사는 것이다. 상식은 지극히 당연한 것인데 요즘 시대에 상식이 많이 실종되었다. 그것을 되찾는 것이 사람다운 것이다. 또한 사람답다는 것은 휴머니티를 지니는 것이다. 즉 인격적이며 책임감이 있으며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겸손하고 너그럽고 주어진 일에 성실한 것이다. 휴머니티를 지닌 사람은 누구에게도 비굴하게 굴복하지 않으며, 자신의 힘으로 약한 자를 도와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상식선에 따라 휴머니티를 갖고 살아가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과 많이 통한다는 것이다. 사람답게 사는 사람을 구약성경은 의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의인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삶을 회복한 사람을 말한다. 신약성경에서는 이것을 빛의 열매,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로 말한다. 또한 이 모습을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의 삶, 성령의 열매로 말한다. 더 나아가 사람답게 사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람은 사랑할 때 가장 사람다와진다. 사랑 안에서 인간성이 최고도로 발휘되며 인간의 가치가 가장 아름답게 드러난다. 주님은 ‘너희 빛을 세상에 비추라’ 말씀하셨는데 그 빛은 착한 행실이라고 설명하셨다. 착한 행실, 즉 사랑이 사람답게 사는 상식의 삶이다 라는뜻이다. 반면에 사람다움을 잃어버린 모습은 짐승과 같다. 짐승같은 사람을 보면 우리는 견딜 수 없어 한다. 그 사람 안에서 몰상식을 보기 때문이다. 또 인간다움, 인간으로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를 저버렸음을 보기 때문이다. 사람답지 못할때 비인격적이고 무책임하며, 나대며, 불친절하고, 게으르고 교만하며, 타인을 억누르고, 약한 자를 짓밟게 된다. 또한 탐욕과 거짓으로 행하게 된다. 이게 바로 짐승성(brutality)이다. 이런 사람을 구약성경은 악인이라 말한다. 이런 사람을 신약성경은 타락한 옛 본성대로 사는 사람, 이성없는 짐승같은 사람이라 말한다. 결국 사람답지 못한 자는 하나님을 떠나 마귀의 종노릇을 하며 자기 중심적으로 사는 사람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좋은 믿음은 결국 상식을 지키며 사는 것, 즉 사람답게 사는 것이다.
<기도한 대로는 아니지만> 7월 7일 2024년 -정용철 내가 기도한 대로는 아니지만 지금의 내 모습에 만족합니다. 정말 멋있고 예쁜 모습의 나 이기를 바랐지만 만약 그렇게 되었으면 나는 지금보다 더 교만하고 외모에 치중하여 겸손과 소박함의 아름다운 삶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내 모습에 감사할 뿐입니다. 내가 기도한 대로는 아니지만 지금 우리 집의 모든 것에 만족합니다. 더 잘 살고 여유 있는 가족이기를 바랐지만 만약 그렇게 되었으면 지금 우리 가족은 화목과 사랑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우리 가족 이대로 감사할 뿐입니다. 내가 기도한 대로는 아니지만 지금 나의 직장생활에 만족합니다. 환경이 더 좋고 보수가 높은 직장이기를 바랐지만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나는 노동의 가치와 삶의 의미를 모른 채 안일에 젖어 나태해져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직장생활에 감사할 뿐입니다. 내가 기도한 대로는 아니지만 지금 내가 걸어가고 있는 길에 만족합니다. 더 쉽고 빠른 길로 가게 되기를 바랐지만 만약 그렇게 되었으면 지금의 소중한 것을 보지 못한 채 외롭고 지친 몸으로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걷고 있는 나의 길에 대하여 감사할 뿐입니다. 내가 기도한 대로는 아니지만 지금 내가 소유한 물질에 만족합니다. 더 많은 물질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랐지만 만약에 그렇게 되었다면 나는 마음의 아름다움보다 물질의 풍요가 더 귀한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만큼의 내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목회칼럼 2024년 6월
<부흥의 불길> 6월 30일 2024년 영적 부흥은 천국의 나날들이 이 땅에 임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 땅이 주님의 영으로 충만해지는 것을 뜻한다. 즉 부흥은 성령이 찾아오셔서 그분의 존재로 가득 채우시는 것을 뜻한다. 18세기의 위대하고 경건한 설교자인 조나단 에드워즈는 1735년에 매사추세츠 주 노샘프턴의 작은 도시에 성령께서 찾아 오신 일을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성령의 역사는 곧 그 마을을 영광스럽게 바꿔 놓았다. 그래서 연이어 찾아온 봄과 여름에 그 마을은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했다. 미국 기독교 역사상 그때처럼 마을 주민 모두에게 사랑과 기쁨으로 충만하면서도 영적 고뇌로 충만했던 적은 없었다. 거의 모든 집에 하나님이 계시는 표시가. 각 가정마다 자신들에게 주신 구원으로 인해 기쁨이 넘치고 평안과 자유함이 넘쳤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영적으로 새로 태어난 것을 기뻐하고 남편은 아내가, 아내는 남편이 새로 태어난 것을 기뻐했다. 당시의 공공 집회는 무척 아름다웠다. 예배 시에 생명과 활기가 넘쳤다. 모든 청중은 목회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열심히 받아 먹었다. 어떤 이들은 말씀을 들을 때 그대로 살지 못한 슬픔과 고뇌로 울었고, 다른 이들은 말씀에 담겨 있는 기쁨과 사랑으로 울었으며, 또 다른 이들은 이웃에 대한 염려와 연민으로 울었다.” 부흥이란 하나님이 그 백성을 찾아오시는 일이다. 하나님의 생명을 만나 그것을 자신의 마음에 품는 일이다. 천국의 나날들이 이 땅 위에 가득 임하는 일이고, 생기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한없이 넘쳐나는 일이다. 헌데 부흥은 스스로의 결의와 결단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부흥은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과정으로 이끄시고 완성시키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되살아났을 때 부흥으로 인도하신다. 말씀없이는 부흥도 없다. 즉 부흥은 말씀의 부흥이다. 초대교회에는 말씀이 늘 왕성했다. 그 결과 교회가 굳게 서 갔다. 또 부흥은 우리들이 기도에 전념할 때 발생한다. 기도는 주님마음을 움직이는 강력한 도구이다. 기도에 매달리는 개인, 교회, 국가를 주님은 중흥시키신다. 또 부흥은 성도들간 지난 날의 죄와 허물을 통회 자복하고 회개했을 때 일어난다. 죄를 깨우치고 자복할때 주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모든 불의에서 우리 죄를 깨끗케 하시고 성령의 임재로 채워주신다. 또한 부흥은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 그분 마음으로 자신의 심령을 채우는 것이다. 주님 마음으로 채워질 때 영육간에 풍성해지고 인생과 삶이 자유로와진다. 오늘 일일 부흥회 날이다.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간구하는 중에 주님 생명으로, 주님 마음으로, 주의 영(성령)으로 가득 채워지길 기원한다. 주여, 개인영성과 우리 교회에 부흥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게 하소서 ! <소수의 사람만이라도> 6월 23일 2024년 아무 것도 없는 텅빈 진흙 마당에 나루 한 구루가 심겨졌다. 몇 해가 지나면서 그 나무의 잎사귀가 무성해지고 꽃이 피었다. 그 나무로 인해 황량하던 마당 풍경이 풍요스럽게 바뀌었다. 무거운 가구들로 어둡게 보였던 방 안에 흰 백합화 화분 하나가 들어왔다. 그 화분으로 인해 집 안이 밝고 화사해졌다. 무미건조한 사람들 사이에 한 쾌활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로 인해 그곳 분위기가 활기차고 명랑해졌다. 무늬만 있는 기독인들 사이에 기도 열심히 하는 성도 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로 인해 그 공동체 내에 신앙의 에너지가 발생하였다. 세상과 삶의 변화는 많은 무리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소수의 창조자들에 의해서 일어난다. 의식이 있고 가치관이 뚜렷한 한 두사람의 등장으로 삶의 풍경이 바뀌고 생활의 내용이 일신될 수 있다. 신앙세계와 교회의 변화는 시계추 마냥 때 되어 교회 출석하는 다수 교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마음과 정성다해 주님의 꿈을 꾸고 맡겨진 주님의 일에 혼신 다하는 소수의 성도들에 의해서 발생한다. 그 소수의 무리들이 상처받은 교회를 회복시키며 무기력해진 영성공동체를 활성화시킨다. 많은 사람들 아니어도 소수의 사람만이라도 제 구실하고 제 기능 다하면 그곳에 생명의 역사가 다시 일어난다. 회복의 꽃이 다시 피어난다.
<은혜로 변화됩니다> 6월 16일 2024년 ‘우리는 하나님은혜로 구원얻는다’ 는것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인 동시에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이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죄인이라는 딱지를 떼어내고 거룩하다는 뜻의 성도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헌데 구원받았다고 해서 우리의 생활이 즉시 성도의 생활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구원받음은 일생에 단 한번 일어나는 유일회적 변화이지만, 성숙한 성도로 살아가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지속적인 과정이기 때문이다. 구원받았다고 죄에서 완벽하게 떠난 것은 아니다., 죄로부터의 온전한 떠남은 죄를 범하는 일에서 떠나는 연습을 지속적으로 행함으로서 가능해진다. 즉 우리가 죄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날마다 경건에 이르는 훈련을 해야 한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성도로 살아가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주의 은혜로 성도가 된 자들은 이제 죄의 길에서 떠나 의의 길로 돌아서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 로마서 6장 1절과 2절에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했다. 죄는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것을 방해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죄와 함께 있을 수 없다.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은 "성도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일컬음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이 선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맞다. 물과 기름이 섞일 수 없는 것처럼, 성도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기 원한다면 죄 가운데 머물러서는 안된다. 우리가 거듭났을 때,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로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죄로부터 자유해지려면 부단한 경건훈련이 필요하고 무엇보다도 주님 은혜가 절대적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성도다운 성도로 변화시켜 가고 있다. 우리 모두 이 사실을 기억하며 은혜 안에 머물면서 죄에 대하여 죽은 자답게 살아가시길 기원한다.
< 은혜를 힘입어> 6월 9일 2024년 한 사람이 돌이켜 천국 아버지 앞으로 돌아오는 것보다 더 귀하고 기쁜 일은 없다.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지만 허물과 죄로 죽었던 영혼이 주님께 돌아왔을 때, 잃었던 자식을 되찾은 부모의 심정과 같은 이 기쁨을 어디에 비교할 수 있을까? 눅 15장 탕자의 비유에서처럼 아버지의 집을 떠났던 작은 아들이 과거를 청산하고 아버지께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의 집에는 이미 그를 위해 "제일 좋은 옷"과 "손 가락지"와 그 발에 맞는 "신"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온 것을 기뻐하며, 큰 잔치를 베풀었다. 탕자의 아버지는 언젠가 아들이 돌아올 것을 기대했다. 그래서 그 좋은 것들을 미리 준비해 둔 것이다. 헌데 세상 윤리적으로 따지자면 이 아들은 아버지의 제일 좋은 옷과 손가락지와 신을 신을 자격이 없다. 아들은 아버지의 환영을 받을 자격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위해 좋은 것들을 예비해 두었다가, 그가 돌아왔을 때, 아들에게 모두 주었다. 이것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베푼 무조건적인 사랑이고, 은혜이다. 헌데 만일 아들이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면, 아버지가 마련한 좋은 것들은 결코 아들의 것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해 두셨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다만 예수의 십자가 공로로 죄에서 돌이키는 회개와 믿음만을 요구하신다. 우리는 어떤 노력으로도 하늘에 약속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고 예수를 구주로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받게 되는데 이는 전적으로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은혜로운 계획이고 선물이다. 디도서 3장 5절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사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했다.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날마다 감사하며 살아가는 우리모두 이길 기원한다.
<아름다운 생> 6월 2일 2024년 가장 소중한 사람이 있다는 건 "행복" 입니다. 나의 빈자리가 당신으로 채워지고 기도하는 것은 "풍요함" 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즐거움" 입니다. 라일락의 향기와 같은 당신의 향을 찾는 것은 "그리움" 입니다. 마음 속에 깊이 당신을 그리는 것은 "간절함" 입니다. 바라볼수록 당신이 더 생각나는 것은 "설레임" 입니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보다 말하지 않아 더 빛나는 것이 "믿음" 입니다. 아무런 말하지 않아도 당신과 함께 있고 싶은 것이 "편안함" 입니다. 자신 보다 당신을 더 이해하고 싶은 것이 "배려" 입니다. 차가운 겨울이 와도 춥지 않은 것은 당신의 "따뜻함" 입니다. 카나리아 같은 목소리로 당신 이름을 부르고 싶은 것은 "보고 싶은 마음" 입니다. 타인이 아닌 내가 당신 곁에 자리하고 싶은 것은 "바램" 입니다. 파아란 하늘과 구름처럼 당신과 하나가 되고 싶음은 "존중" 입니다. 그리고 하얀 종이 위에 쓰고 싶은 말은 "사랑" 입니다.
목회칼럼 2024년 5월
<권리 포기의 삶> 5월 26일 2024년 종교의 자유를 찾아 1620년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온 102명의 청교들은 보스턴 남쪽에 상륙해 삶의 터전을 형성했는데 그곳이 뉴잉글랜드의 기원이었다. 당시 뉴잉글랜드는 모든 삶의 분야에 있어 철저한 청교도 원리를 적용하였다. 그들이 거주하는 청교도 마을에 한 처녀가 임신을 했다. 동네 어른들은 처녀를 불러다 그 아기의 아빠가 누구인지 추궁을 했다. 임신한 처녀가 입을 열었다. “아기의 아빠는 늘 검은 옷을 입고 마을의 궂은 일을 도와주는 수도사입니다.” 처녀가 지목한 수도사는 마을에 어렵고 궂은 일이 발생할 때마다 찾아와 도와주는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파렴치한 죄인이라니.. 그 수도사는 곧바로 체포되었다. 잡혀온 수도사가 입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마을 사람들은 그런 그를 가차없이 발로 차고 때린 뒤 추운 겨울 감옥에 가두었다. 수도사는 결국 감옥에서 죽었다. 죗 값으로 죽은 것이다. 그래도 인정많은 일단의 사람들이 그의 장례를 치뤄 주었다. 그러다가 그 수도사가 여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신이 범죄치 않았음에도 수도사는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는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다. 그 처녀를 살리기 위해 죄를 대신 뒤집어썼다. 이것이 바로 권리 포기의 모습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한 존귀와 영광을 누리지 않고 사람으로, 그것도 종의 형체로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이는 하나님의 권리포기 사건이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영광의 보좌를 스스로 포기하신 이야기이다. 믿음이란 자신의 권리를 부인하고 주님을 신뢰하고 따르는 것이다. 성도의 삶은 가정, 교회, 그리고 사회에서 권리 포기의 삶을 사는 것이다. 권리 포기의 삶이 주님을 닮은 삶이다. 헌데 은혜가 되는 것은 우리들이 권리 포기의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더욱 가치있고 아름다운 것으로 우리를 높여 주시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 5월 19일 2024년 교회라는 말이 복음서에서는 마태복음 16장에서 처음으로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함께 나타난다. 그 고백의 장소는 가이사랴 빌립보이다. 갈릴리에서 북쪽으로 45분정도 차로 올라가면 헐몬산 기슭의 바니아스 라는 곳에 이른다. 헐몬산 자락에서 나오는 물은 시내를 이뤄 갈릴리 호수로 흘러 들어간다. 거기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가이사랴 빌립보에 이르게 된다. 본래 그곳 주민들은 풍요와 다산의 신인 바알신을, 헬라계 거주민들은 산림과 야수의 신인 판신을 섬겼다. 당시 헤롯왕은 로마 정권에 아부하기 위해 이곳에 황제 숭배신당을 세웠다. 이는 이곳이 당시 우상의 땅이었음을 시사한다. 왜 예수님은 제자들을 우상의 땅인 이곳까지 오게 했을까? 3년간의 제자훈련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에서 주님은 제자들을 이런 의미있는 장소로 데리고 오셔서 졸업 종합고사를 치루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그때 출제하신 문제 중 하나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것이었다. 이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복이 있다”는 칭찬과 더불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알게 하신 것”이라 말씀하셨다. 그리고 주님은 이 신앙고백 위에 자신의 교회를 세울 것임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던 것이다.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는 바알신과 판신, 그리고 로마황제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존귀한 주님의 영적공동체이다. 교회는 악의 세력을 정복하고 승리하신 주님의 승리를 경축하는 공동체요, 천국을 열고 닫는 열쇠꾸러미가 맡겨진 공동체인 것이다. 또한 주님의 교회는 음부의 권세를 이기고 묶여있는 영혼들을 풀어내어 자유케 하는 교회, 즉 주님의 사역을 재현하는 교회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이끌고 오셔서 시험을 치르신 장소, 그리고 장차 세우시고자 하시는 교회에 대한 설계도를 발표하신 장소가 바로 가이샤라 빌립보 였다. 오늘의 교회는 종종 그 자리로 나아가야 하며, 주님께서 발표하신 교회에 대한 그 음성을 다시 들어야 한다. 그리고 설계도를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들 교회가 바로 그 주님의 교회인지를 말이다.
< 가장 아름다운 이들 > 5월 12일 2024년 아름다움을 논할때 언급되는 것은 단연 꽃이다. 인간 눈에 낯익고 이름있는 꽃들은 물론 낯설고 이름없는 꽃들도 아름답다. 그들이 아름다운 것은 각각에게 주어진 계절, 공간 안에서 저만의 고유한 자태, 모양, 색깔, 향기, 패션, 풍경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꽃들이 아름답기에 나비가 날아들고 새들이 모여든다. 그들의 아름다움을 보려고 사람도 찾아온다. 사람들은 꽃들의 아름다움을 시로 짓고 노래로 흥얼거린다. 그림으로 그리고 글로 표현한다. 헌데 꽃이 이토록 아름다워도 더 아름다운 존재가 있다. ‘꽃보다 사람이 아름다워’ 라는 한 노래 가사말 처럼 사람이 더욱 아름답다. 위대한 설계사 주님이 지으셨고 게다가 그분의 형상이 부어졌기 때문이다. 죄성으로 주님형상이 많이 파손되었지만 그럼에도 사람은 여전히 아름답다.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이들은 부모님들이다. 그분들의 탄력잃은 피부가 아름답다. 주름진 얼굴이 아름답다. 굵어진 손마디가 아름답다. 쉬워진 목소리가 아름답다. 초점을 잃어가는 눈이 아름답다. 그분들의 온 삶이 아름답다. 그분들의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풍경이다. 자녀들을 위한 온갖 사랑의 사연들이 쌓인 맑은 샘이다. 희생의 향기가 풀풀 나는 초록 산이다. 부모님들은 살아계실제, 아니 그 이후에도 눈물솟도록 아름다운 마음의 풍경이다. 아름다운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떨린다. 영혼이 울리고 절절한 그리움이 생겨난다. 5월 꽃 향기 진하게 퍼지는 계절에 사람을 더욱 사랑하자. 존재 그대로 아름다우신 모든 부모님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전하며 크신 주님의 평강과 은혜를 구한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 5월 5일 2024년 -정용철- 나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습니다. 나는 우리 가족을 언제라도 만날수 있습니다. 이 하나가 나에게 얼마나 큰 기쁨인줄 이제야 알았습니다. 나에게는 가장 사랑하는 가족이 있습니다. 나는 우리 가족과 언제라도 전화를 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가 얼마나 큰 즐거움인 줄 이제야 알았습니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습니다. 내가 우리 가족 중 한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면 곧 답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하나가 나에게 얼마나 큰 위로인 줄 이제야 알았습니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습니다. 나는 우리 가족에게 언제라도 선물을 보낼 수 있습니다. 이 하나만으로도 내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 줄 이제야 알았습니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습니다. 나는 우리 가족과 언제라도 같이 식사를 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만으로도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 줄 이제야 알았습니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습니다. 나는 우리 가족에게 나의 아픔을 낱낱이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만으로도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 줄 이제야 알았습니다.
목회칼럼 2024년 4월
<하나님의 씨> 4월 28일 2024년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이유로초대교회 성도들은 원치 않는 고난을 받았다.믿음과 인격이 유린당하고육체, 사회, 경제적으로 제재당하고삶이 처절하게 매장당했다.대적자들은 성도들을 이렇게 매장하면예수의 복음이 곧 근절되리라 여겼다.헌데 그들이 참으로 모르는 것이 있었다.자신들이 매장한 성도들이바로 하나님의 씨앗이었다는 것을..깊이 매장당한 곳에서 그 씨는 발아하고싹을 내고잎사귀를 돋우며 꽃을 피워냈다.그리고 누구도 측량치 못할 풍성한 열매들을 맺었다.기독자 됨의 표증은 단지 종교적인 의식참여, 교리연구,입술의 고백, 열정적인 사역활동 등이 아니다.그리스도인 된다는 것은 영혼 깊은 곳에주님의 씨가 심겨져 뿌리내리고그것이 삶의 자리에서 복음에 합당한 열매,즉 의와 진리의 거룩함의 열매,사랑의 열매를 맺어가는 것이다.바람직하고 평안한 환경에서는 물론이거니와불합리하고 척박하게 보이는 환경에서도 말이다.“하나님에게서 나서 생명에 들어간 사람들은..하나님의 씨가 그들 깊은 곳에 자리합니다”(요일3:9)
<마귀의 계략> 4월 21일 2024년 귀신들이 모여서 인류를 파멸시킬 방법들을 의논하고 있었다. 한 귀신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없다고 말해 주자” 라고 했다. 다른 귀신은 “사람들에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말해 주자” 했고 또 다른 귀신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말해 주자” 라고 말하는둥 여러가지 방법들이 동원되었다. 헌데 이 의견들중 어느 것도 모든 귀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 한 귀신이 새로운 의견을 냈다. “우리 모두 세상에 가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하자. 또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원자라고 말해 주자. 그리고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자라고 말해 주자. 그러나 구원받을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말해 주자”. 이 의견을 듣고 난후 모든 귀신들이 이구동성으로 옳거니 하면서 이 주장을 채택했다. 오래 전 동부 뉴욕을 떠나 서부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항해하던 증기선 센트럴 아메리카 호에 물이 새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다행히 근처를 지나던 배가 구조 신호를 받고 달려왔다. 그런데 센트럴 아메리카 호의 선장은 구조선 선장에게 물이 새고 있지만 내일 아침까지는 괜찮을 것 같으니 날이 샐 때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간청을 했다. 밤중에 승객들을 구조선으로 옮겨 실을 때의 혼잡을 염두에 둔 결정이었다. 이에 구조선 선장은 한시가 급하니 승객을 빨리 옮겨 태워야 한다고 재차 요구했으나 아메리카 호 선장은 “날이 밝을 때까지 좀더 기다려 보겠습니다”라는 말만 되풀이 하였다. 그러다 결국 센트럴 아메리카 호는 내일을 보지 못했다. 한 시간 후에 갑자기 불빛이 사라짐과 동시에 물속으로 침몰하여 승객 모두는 배와 함께 수장되고 말았다. 구조받기를 뒤로 미룬 비극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뒤로 미루는 습관이 있다. 지금 할 일을 이후로 미룬다. 시간과 기회가 늘 있는줄 착각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확실한 미래, 절대적인 내일은 없다. 지금이 자신의 시간이다. 뒤로 미루는 것은 마귀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는 것이다. 마귀는 우리를 넘어뜨리고 파멸시키는 자이다. 그 놈은 우리로 마땅히 할 일을 여러 이유들을 내세워 미루게 하여 종내는 우리를 무너뜨린다. 오늘 할 일은 오늘 반드시 해야 한다. 오늘 주님 만나고 오늘 말씀대로 살고 오늘 주님께 영광 돌리야겠다. 오늘이 바로 기회이다. 오늘 충성하는 자에게 주님은 내일을 보장해 주신다.
<자비에 대해서> 4월 14일 2024년 자비는 하나님의 마음의 성품으로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따라 유순하고 온유하여 타인을 넓게 이해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구체적으로 자비는 (1)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일컫는다. 하나님에게는 절대적인 성품과 도덕적인 성품이 있다. 절대적인 성품은 하나님께서 영이시라는 것과 완전무결, 절대불변, 영원하시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하나님의 도덕적인 성품은 하나님께서 사랑이시고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시고 공의로우시고 의로우시고 좋으신 분이란 사실을 말한다. 하나님은 인자하심이 풍성하신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의 증거인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 구원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게 된다. (2) 자비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택하신 거룩한 자에게 자비로 옷을 입으라고 말씀하신다(골 3:12).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자비를 본받지 아니하면 벌을 받는다고 기록한다.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롬 11:22). 여기서 ‘인자’는 신약성경 원어인 헬라어 ‘크레스토테스’ 곧, 자비를 뜻한다. 주의 일꾼은 자비로 무장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선한 사람이다. (3) 자비는 성령의 열매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는 자비는 참된 자비라고 말할 수 없다. 성령의 열매는 영원한 것이기에 일시적인 인간의 자선행위를 자비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 성령께서 주신 자비만이 참된 자비이다. 온전하신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에게 임할 때 인간의 자비는 참된 자비가 될 수 있다. 성령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드리고 의지할 때 하나님의 자비가 자신에게 임하게 된다. 자비는 말이나 이론이 아닌 실천행위이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비로 무장하여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마음과 손의 봉사> 4월 7일 2024년 우리들이 일상생활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들중 하나는 `Service'라는 말이 아닌가 싶다. 이 단어는 한국 말로 ‘봉사' 또는 `섬김'이라는 뜻이 있고 또한 교회적으로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뜻도 품고 있다. 이 단어는 여러 의미로 사용되는 참으로 좋은 말이다. 그런데 아무리 좋고 우아한 말이라도 다른 단어와 함께 시용된다면 원래의 의미가 크게 퇴색될뿐 아니라 더 나아가 완전히 이상한 말이 되어버리고 만다. 가령 ‘service’ 앞에 ‘lip'이라는 말을 붙여서 `lip-service’(립 서비스) 라는 말을 만든다면 그 의미는 ‘말 뿐인 호의’ 또는 ‘공치사’라는 뜻이 되고, 이를 신앙적으로 풀이하면 ‘말 뿐인 신앙'이 되고 만다. 또한 ‘service’ 앞에 ‘eye’라는 말을 합성하여 ‘eye-service’(아이 서비스) 라는 말을 만든다면 이는 ’남들이 볼 때만 일하는 체하는 것’이란 뜻이 된다. 이 말을 믿음에 비유하면 ‘성경을 보기만 하고 실천이 없는 믿음’을 뜻한다. 그리고 ‘service’라는 언어에 귀 라는 ‘ear'를 붙여서 ‘ear-service’(이어 서비스)라는 말을 만든다면 그 의미는 ‘윗사람이나 권세자의 명령을 그저 들어 준다는 것’이라는 뜻이 된다. 이를 신앙적으로 풀이하면 ‘신자가 설교자의 설교를 결단없이 그저 들어 주는 것’이다. 믿음생활의 주된 과정은 설교를 단지 들어 주는게 아니라 그 말씀대로 실천하고 그 교훈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의미있고 가치있는 말씀을 듣고 느끼기는 해도 그것을 삶에서 적용하고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완전한 신앙생활이 아니다. 아니, 참 믿음과는 무관한 삶을 사는 것이다. 요한 웨슬리 목사가 이런 말을 했다. "천국에는 목사의 입과 신자들의 귀만 와 있더라" 라고..이 말은 목사가 립 서비스'에 치우쳤다는 뜻이며, 신자들은 `이어 서비스'에 치우쳤다는 뜻이다. 참으로 우리들을 각성시키는 말이다. 영적 지도자들이 ‘립 서비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교인들이 ‘이어 서비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개인 지체들과 영성 공동체의 앞날은 어찌 되겠는가? 우리들은 주님과 교회, 주변 세상을 위한 봉사와 섬김(Service) 에 치중하되 말과 눈과 귀의 봉사자 차원을 넘어 ‘마음과 손의 봉사자’(heart-hand-service)가 되어야겠다.
목회칼럼 2024년 3월
<부활절 후의 기도> 3월 31일 2024년 예수 부활생명이 하늘과 땅, 산과 바다, 자연과 봄꽃들, 그리고 영혼에 깊이 스며든 날, 마음의 옷깃을 여미며 이리 기도드린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에 대해 단호하게 고쳐 앉고 돌아 서게 하소서. 스스로는 무용 무능 무지함을 깨닫고 납작 엎드리고 겸손하게 하소서. 범사에 주님을 인정하고 그분 손길을 더욱 의지하게 하소서. 주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성령의 도움을 받아 믿음으로 헌신하게 하소서. 주님이 맡기신 사람들을 친절과 온유, 정직과 성실로 대하며 주님사랑을 나타내게 하소서. 조국과 교회, 세계평화와 복음전도를 위해 기도를 쉬지 말게 하소서. 일상이 신비로운 은혜이며 축복임을 알고 매일매일을 감사와 기쁨으로 지내게 하소서. 이후의 날들 주님을 앙망하며 소망과 기대, 설렘으로 지내게 하소서. 이 기도들이 꽃처럼 아름답게 열매맺게 하소서.
<당신이 왕이라면> 3월 24일 2024년 - 이해인 - "구해야 할 자들이 하도 많아 혼자서 처절히 피 흘려 죽은 당신이 진정 왕이십니까. 온통 귀먹고 병든 세상에산천이 울리도록 큰 대답 주십시오 당신이 왕이라면, 살아온 당신을 향해 또다시 밤마다 칼을 가는 자들이 유다와 함께 횃불 들고 달려오는데 당신을 모르노라 고개 흔드는 베드로와 나도 시시로 악수를 나누는데 그래도 당신이 왕이십니까. 빛보다 어둠 짙은 세상에 안겨 바보처럼 숨어서 울지도 못하는 약자의 설움을 가엾이 여겨주십시오.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 당신의 집은 보이지 않습니다. 날마다 조금씩 내가 죽지를 못해 내 안에 그대로 죽어 계신 분이여 어떻게 당신을 살려내야 합니까. 제발 큰 소리로 대답해 주십시오 당신이 왕이라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3월 17일 2024년 사순절의 후반부에 접어든 지금, 우리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욱 깊이 묵상하며 자기 십자가 질 것을 다시금 결단해야 한다. 우리는 십자가를 단지 믿음의 상징내지 기독교의 표현으로만 바라보거나 자신들 머릿 속에 지식으로만 남겨두어서는 안된다. 십자가의 정신과 그 실체가 우리의 일상 삶이 되고 믿음이 되어야 한다. 십자가는 다른 사람에게 필요하다고 여기어 그에게 그것을 짊어지도록 알려주거나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도 자신이 먼저 기꺼운 마음으로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자기 십자가는 오롯이 자신만의 몫이다. 자기 십자가는 주님을 위해 자신이 희생하고 헌신하는 사랑의 실천을 뜻한다. 십자가 앞에서는 어떤 핑계나 구실, 책임전가가 통하지 않는다. 주님 영광이 드러나고 자신의 영혼이 구원얻기 위해 스스로가 짊어져야 하는 것이 십자가이다. 예수님은 아무 잘못도 없이 기꺼이 십자가 위에 달리셨지만, 그 누구를 원망하거나 정죄하지 않으셨다. 그렇다면 죄인인 우리들은 죄 값으로 십자가에 달려도 아무 할 말이 없는 사람들이다. 헌데 우리들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데 불평이 참 많다. 우리들은 조금만 억울한 소리를 들어도, 아주 작은 손해를 입게 되어도 그에 대해 원망하고 못견뎌 하곤 한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진다 하면서도 크고 작은 일에 불평하고 불편해 하는 사람과 동행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히, 묵묵히, 잠잠히 자기 십자가를 지고자 하는 자들에게 가까이 다가 오셔서 십자가 길을 인도해 주시고 도와 주신다. 그리고 십자가 지기에 필요한 능력과 지혜를 주신다. 우리가 낮아지고 또 낮아진 마음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때 하나님은 우리를 끌어올려서 영화롭고 아름답고 행복한 자리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 주님을 만나서 영화롭게 되는 날까지 십자가의 길을 지치지 않고 걸어가는 우리 모두이길 기원한다. <인생의 사계절> 3월 10일 2024년 자연과 사계절은 서로 대립구도를 이루지 않습니다. 서로를 억누르거나 이기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정겹고 아름답게 공존합니다. 자연은 때에 따라 계절들의 옷을 덧입으며 그들의 향취를 빛냅니다. 자연은 한 계절을 보낼 때마다 그리움을 품고 해후를 기다립니다. 자연과 계절사이에는 이런 조화로움, 교감, 친밀감이 있습니다. 인생에도 사계절이 있습니다. 인생의 계절들은 평생 한번씩만 경험합니다. 인생과 각 계절들도 서로 각을 이루거나 배척하는게 아니라 친구되어 깊은 교류를 누리다가 영혼의 기억 속에 안치됩니다. 우리는 봄날에 생의 청사진을 설계하고 꿈을 꾸며 씨를 뿌립니다. 여름날에 노력하고 정진하며 최선다합니다. 가을날에 감사함으로 수고의 열매를 먹습니다. 겨울날에 모든 것을 비우고 내려놓고 하늘나라를 기다립니다. 자연과 계절은 은총이며 축복입니다. 인생도 축복입니다. 유년기, 청소년기, 장년기, 노년기등 매순간들이 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토록 다함없는 주의 은혜를 누리고 살아갑니다. <아름다움의 실체> 3월 3일 2024년 언젠가 집사람과 함께 동네 야산을 거닐던중 이름모를 예쁜 들꽃을 발견하고 꺾어 와서 꽃 병에 담았다. 한동안 좋은 볼거리이며 집안이 좀 환할것 같았다. 헌데 꽃 병에 들어간 그 꽃은 산에 있을 때만큼 예쁘지 않았다. 이유를 알았다. 배경들을 두고 꽃만 가져왔기 때문이다. 꽃이 예쁜 것은 꽃자체의 아름다움에 산에 있는 흙, 돌과 바위, 주변 나무와 풀들, 햇빛, 이슬, 바람, 안개, 새, 다람쥐, 작은 짐승들이 더해져서이다. 참 아름다움은 홀로 생성되지 않는다. 배경과 함께 할때라야 비로소 아름다와진다. 별들이 밝고 아름다운 것은 칠흑같이 어두운 하늘이라는 배경과 더불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만 아는 사람, 홀로인 사람은 아름다움이 반감된다. 지혜 지식 외모 힘 재능 기술이 남보다 뛰어나도 주변과 더불어 하지 않는다면 배경이 없는 들꽃과 같고 하늘없는 별과 같다. 사람은 주님과 함께 하고 가족 동료 자연과 진솔하게 어울릴때 우아하고 활력있는 인생을 살게 된다. 그리고 믿음과 소망, 사랑을 품고 살아갈 때 거룩하고 성결하고 격조있는 삶이 된다.
목회칼럼 2024년 2월
<회개의 단계> 2월 25일 2024년 신앙여정에서 가장 많이 듣고 실행해야할 요소중 하나는 회개이다. 신앙인들은 믿기 이전에도 회개해야 하고 믿은 후에도 회개해야 한다. 끊임없이 발생하는 죄로 인해서이다. 회개는 예수님의 공생애 첫 설교주제 였다. 예수님은 천국복음과 회개를 전하셨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던 세례 요한도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 1907년에 한국 평양에서 성령 대부흥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중심에는 온 교회와 성도들의 회개가 있었다. 회개에는 여러단계들이 있다. (1)회개의 첫 단계는 인간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서는 것이다.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설 때라야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게되고 해서 통회 자복하고 예수님을 삶의 구주로 믿게 된다. 주님 중심으로 삶의 방향을 전환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받아 주시고 구원해 주시고 당신 자녀로 삼아 주신다. (2)회개의 둘째 단계는 세속적 삶으로부터 성결, 거룩해 지는 것이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다고 해서 말과 행위들이 즉시 성결해지고 우아해지는 것는 아니다. 성결에 도달함은 평생에 걸친 과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지은 죄가 생각 날 때마다 즉시 그 죄를 자백하고 용서받아 성결함을 이루어가야 한다. (3)회개의 셋째 단계는 마음의 생각의 변화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우리는 육신의 생각을 사로잡아 영의 생각으로 새롭게 해야 한다. 또한 영의 생각으로 새로와지려면 성결의 영이신 성령과 늘 교통해야 한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기 위해 우리 곁에 와 계신다. 성령과 동행함으로 생각의 변화를 받아 새 피조물로 살아가길 바란다. 크고 작은 죄들을 회개함으로 주 안에서 항상 새로운 존재이길 기원한다.
<사순절 묵상구절들> 2월 18일 2024년 ➊ 요엘 2장 12~13절: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➋ 마태복음 4장 1~5절: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➌ 이사야 58장 6~7절: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난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➍ 창세기 3장 19절: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➎ 이사야 43장 25절: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➏ 고린도후서 6장 2절: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➐ 에스겔 18장 21절: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➑ 요한일서 1장 1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➒ 고린도전서 10장 23절: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사순절> 2월 11일 2024년 기독교 절기 중에는 사순절이 있다. 사순절은 날짜 선정에 있어서 부활절과 관련이있다. 부활절은 유월절 계산법을 따르는데, 춘분(春分) 다음에 오는 첫 음력 15일(보름)이 지난 첫 주일이 부활절이다. 첫 음력 보름이 주일이면, 그 다음 주일이 부활절이 된다. 그 부활절로부터 주일을 제외하고, 40일을 거슬러 올라가면 수요일인데 그날이 사순절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다. 올해 재의 수요일은 이번 2월 14일이다.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에 시작하여 부활절 바로 전 주간인 고난주간의 끝날인 토요일에 마치게 된다. 사순절 기간 안에는 주일이 여섯번 있는데 이 주일들은 “사순절에 속한 주일(Sunday of Lent)”이 아니라 “사순절 기간에 있는 주일(Sundays in Lent)”이다. 사순절 기간의 주일들은 사순절의 엄숙함이 조금은 완화된채 부활의 소망을 품은 “작은 부활절”처럼 지켜진다. 사순절(Lent)은 “길이(length)”를 의미하는 앵글로색슨어 “lencten”에서 유래한 말로, 봄의 기간을 나타낸다. 사십 일은 성경에 나타난대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와 시험과 유혹을 이겨내고, 하나님께서 맡겨신 공생애 사역을 준비하신 기간이다. 사순절은 다가올 부활절을 대비하여, 죄와 허물을 회개하고, 금식하며, 성령 안에서 준비하는 시간이다. 또 자신의 신앙을 검토하고 헤아리는 시간이기도 하다. 원래 초대교회의 사순절은 새 신자의 세례를 위해 금식하고 준비하는 기간의 출발점 이었는데 지금은 점차 모든 그리스도인이 참회하는 기간으로 확대되었다. 우리들은 이 사순절기에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더욱 집중하고, 세속적인 일을 삼가하고 절제하고, 이웃들을 섬기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영성훈련에 최선다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처한 상황에도> 2월 4일 2024년 물고기는 물과 다투지 않습니다. 물이 조금 차가우면 차가운 대로, 물이 조금 따뜻하면 따뜻한 대로, 물살이 조금 빠르면 빠른 대로 물과 같이 어울려 살아갑니다. 물고기는 자신이 물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고맙기 때문입니다. 산에 있는 나무는 산과 다투지 않습니다. 자신의 자리가 좁으면 좁은 대로, 자신의 주위가 시끄러우면 시끄러운 대로, 큰 나무들이 있으면 있는 대로, 햇볕이 덜 들면 덜 드는 대로 처지에 맞추며 살아갑니다. 나무는 자신이 산에서 어울려 사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고맙기 때문입니다. 햇님은 구름과 다투지 않습니다. 구름이 자신의 얼굴을 가리면서 잘난 척을 해도 조용히 참고 기다렸다가 찡그렸던 하늘을 더 파랗고 맑게 해줍니다. 구름이 비를 몰고 와서 모두를 적셔 버려도 바람과 함께 불평하지 않고 말려 줍니다. 햇님은 자신의 할 일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고맙기 때문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자신과 환경을 불평하거나 다투지 않습니다. 처해 있는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힘 다해 현재에 충실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목회칼럼 2024년 1월
<주여 제 믿음을 지켜 주소서> 1월 28일 2024년-언더우드 선교사 오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를 옮겨 앉히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서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 한 이곳,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사람뿐 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찌하나 걱정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니…”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洋鬼子)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만이 가득한 곳지만 이 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지켜주소서. <행복자> 1월 21일 2024년 분주하고 바쁘게 사는 사람들은 열심히 일해 좀 더 크고 좋은 집, 고가 자동차, 명품등을 소유하고 업적, 성취를 쌓으면 삶이 행복해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바라고 원하는 것을 얻고 성취했을 때 생의 목표를 달성 했다고 기뻐합니다. 헌데 그기쁨과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쁨의 지수가 현저히 줄어들게 됩니다. 그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외부 환경을 통해서 또는 어떤 조건을 충족시킴으로 얻어지는 것을 이름한다면 그것은 일시적 기분좋음입니다. 정오에 기분 좋았다가 저녁 쯤에 사라지는 변덕스러운 감정같은.. 나는 목회하면서 그런 변덕스러운 감정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어쩌다 사역에 조금 열매가 나타나면 기분이 좋았고 노력해도 사역에 열매가 미미할 때는 그 기분이 이내 사라지곤 했습니다. 참 행복은 한시적이 아닙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마르지 않습니다. 행복은 요건, 상황, 감정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행복과 기쁨은 스스로의 행위, 공로에서 기인하지 않습니다. 행복은 주님에게서 연유합니다. 주님이 모든 복의 근원입니다. 주님이 각양 좋은 선물과 은사의 생산자이십니다. 주님은 당신에게서 연유한 복을 인간세상에 하염없이 내려주십니다. 삶의 여건및 외부 상황에 관계없이 행복하려면 주님을 모시고 믿음 안에서 그분의 자녀,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보내 들이기에 앞서서 행한 고별설교에서 이스라엘을 ‘행복자’라 칭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주님의 백성’이어서 입니다. 우리도 복의 근원이신 주님과 함께 하면 언제 어디서든 행복합니다. 인생의 좁은 길을 걸어도 행복하고, 심지어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행복합니다. 열악하고 못된 환경, 상황이 잡아 흔들어도 우리는 행복자 자리에 서 있습니다. 우리들은 지난 날들을 주님과 동행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후에도 매일 주님과 함께 길을 걸으며 그분으로부터 근원한 행복을 마음껏 향유해야겠습니다. 이 주간도 주님이 허락하신 행복에 감사드리며 주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폴 포츠의 꿈>1월 14일 2024년 어떤 일이든 대충대충 이루어지거나 순식간에 쉽게 달성되는 법은 별로 없다. 크고 위대한 일일수록 많은 시간이 걸리고 열정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간혹 요행수로 예상치 못한 업적을 짧은 시간내에 쌓기도 하지만 이는 생애동안 극소수에 해당된다. 제품 수명 주기를 보더라도 주기가 S자 곡선으로 되어 있어 초기엔 더디게 성장하거나 거의 정체상태에 있다가 어느 시점을 지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이런 발전의 배후에는 물론 노력과 수고가 있다. 크고 작은 세상 일 모두가 마찬가지이다. 성장엔 일정한 시간이 걸리고 그만큼의 애씀과 수고도 있어야 한다. 10 여년 전 한 유명한 사건이 영국에서 일어났다. 평범한 사람들이 출연하는 영국 TV 노래경연 대회 ''브리튼즈 갓 탤런트‘ 에 당시 36세의 휴대폰 세일즈맨인 폴포츠가 출연해 큰 화제가 된 사건이었다. 그는 허름한 정장에 불룩하게 튀어나온 배, 부러진 앞니, 그다지 잘생기지 못한 얼굴에 자신감 마저 없어 보이는 표정을 지닌 사내였다. 그런 그가 오페라를 부르겠다고 경연대회 무대에 모습을 나타났을 때 관중들은 좀 김새하면서 그의 노래를 진지하게 들으려 하지 않았다. 관객들은 그가 어떤 노래를 부르던 큰 관심을 쏟지 않았다. 심지어는 심사위원들 조차 폴 포츠에게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노래를 시작하자 장내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노래가 진행되면서 모두의 입에서 탄성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배와 목에서 엄청난 오페라가 흘러나온 것이다. 사람들은 큰 감동을 받앗고 무명인이었던 폴 포츠는 그 시점부터 많은 이들이 알아보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물론 세상에는 폴 포츠보다 노래를 잘하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 헌데 사람들은 왜 그에게 김격해하며 열광했을까? 그것은 못생긴 외모로 인한 왕따, 교통사고, 종양 수술, 오페라 회사들의 문전 박대 등 수많은 좌절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았던 자신의 ‘꿈’에 대한 열정과 노력 때문이었다. 준비하는 자에겐 꿈은 미래이지만, 준비하지 않는 자에겐 꿈은 몽상일 뿐이다. 하지만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오더라도 비상할 날개가 없다면 하늘을 날 수가 없다. 언젠가 이룰 꿈을 위해 항상 준비하고 노력하는 자세야말로 꿈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비결이다. 우리들도 나이 탓, 환경 탓, 소유 탓 하지 말고 꿈을 이루기 위해 일어나 움직이며 무엇인가를 실행해야겠다.
<새 날 기쁨> 1월 7일 2024년 새 날 여명의 빛이 가슴에 와 닿으면 나는 거울 앞에 선 누이를 본듯 잔잔한 희열에 젖어든다. 또 하나의 새 날이 기뻐 오는 것은 이 날, 시간과 공간 안에서 체험할 수 있는 평범한 은총들로 인해서이다. 살짝 열린 블라인드 사이로 방 안에 침투한 투명한 햇살을 쬐일 수 있고, 창문에 부딪혀 되돌아가는 수 백개의 상쾌한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고, 잎사귀 모두 떨군채 추위에도 당당히 서 있는 나목을 볼수 있고, 높고 푸른 창공을 자유롭게 노니는 작은 새들의 귀여운 날개 짓을 감상할 수 있고, 진한 향 피어나는 커피와 어두운 색 초코렛을 음미할 수 있고, 반복되는 일상과 맡겨진 일에 새 정성 기울일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따스한 말과 환한 미소를 마음에 저장할 수 있고, 말씀 묵상과 기도의 경건연습 중에 영혼에 아름답게 금박이 된 주님 은혜와 평강을 더욱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새 날이 열릴 때 안개 스며듯이 촉촉히 찾아온 일상의 기쁨을 심장에 담고 감사하게 겸허하게 매일 하루를 살아간다.
목회칼럼 2023년 12월
<목회자의 감사> 12월 31일 2023년 바로 어제같이 느껴지는 년초의 시작을 뒤로한 채 이제 올 해의 끝단에 서 있습니다, 일손을 멈추고 한 해 만났던 사람들과 실행했던 일들, 기억나는 마음과 생각의 조각들을 돌아봅니다. 금년 한 해 저에게 주어진 모든 날들과 시간들, 사역들을 헤아려 볼때 온전하게 살아내지 못했기에 100% 만족스럽지도, 늘 행복하지만도 않았던 한 해였음을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여기까지 온 것이 홀로의 힘만이 아니었음을 또한 인정합니다. 올해 여정이 전적으로 주님 은혜의 손길로 인해서였고 또한 성도님들의 기도와 협력, 격려와 성원으로 인해서였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해 주시고 기도해 주시고 도와 주시고 힘이 되어 주셔서 참 고맙고 감사합니다. 저에게 부족함과 모자람이 여전했지만 성도님들의 도움과 협조, 관심과 배려에 많은 은혜를 받고 울림을 받았습니다. 성도님들의 칭찬과 웅원 덕에 지쳐가던 영성이 다시금 회복되어 일어나기도 했고 때로는 양심과 생각을 깨우쳐 주시는 부드러운 지적에 지혜를 얻기도 했습니다. 외적 삶의 상황들은 지속적으로 소요스럽고 소란스러웠지만 성도님들과의 함께 함 속에서 행복과 기쁨, 활력과 유쾌함을 누렸습니다. 혹 저의 모난 인품과 연약한 말 실수 때문에 일시라도 상처받고 아픈 적이 있었다면 넉넉함으로 감싸 주시기 바랍니다. 새해에는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가, 그리고 우리와 우리 사이가 한겹 돈독해지고 아름다워지길 소망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교우들의 일상사를 항상 복되게 하시고 영, 혼, 육을 강건하게 붙들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새해에는 복 많이 받으세요!
<성탄 편지> 12월 24일 2023년- 이해인 친구여, 알고 계시지요? 사랑하는 그대에게 제가 드릴 성탄 선물은 오래 전부터 가슴에 별이 되어 박힌 예수님의 사랑 그 사랑 안에 꽃피고 열매 맺은 우정의 기쁨과 평화인 것을. 슬픈 이를 위로하고 미운 이를 용서하며 우리 모두 누군가의 집이 되어 등불을 밝히고 싶은 성탄절 잊었던 이름들을 기억하고 먼데 있는 이들을 가까이 불러들이며 문을 엽니다. 죄가 많아 숨고 싶은 우리의 가난한 부끄러움도 기도로 봉헌하며 하얀 성탄을 맞이해야겠지요? 자연의 파괴로 앓고 있는 지구와 구원을 갈망하는 인류에게 구세주로 오시는 예수님을 우리 다시 그대에게 드립니다. 일상의 삶 안에서 새로이 태어나는 주님의 뜻을 우리도 겸손히 받아 안기로 해요. 그 동안 못다 부른 감사의 노래를 함께 부르기로 해요. 친구여, 알고 계시지요? 아기 예수의 탄생과 함께 갓 태어난 기쁨과 희망이 제가 그대에게 드리는 아름다운 새해 선물인 것을…. <성탄절의 기적>12월 17일 2023년 어느 추운 겨울, 함박 눈이 몹시 내리는 성탄절 날이었다. 신앙심이 돈독한 아내의 요청에 응해 성탄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남편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의심을 토해 냈다.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실 수 있지?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과 어울릴 수 있단 말인가? 그런 내용의 목사의 설교를 전혀 믿지 못하겠어.” 남편의 불평을 듣고 있던 아내는 남편을 이해시키려 여러 성경구절들을 동원하고 자신이 알고있는 성경내용을 들려 주었지만 남편의 의문을 풀어줄 수 없었다. 그때 집 문앞에 이르러 이상한 광경이 시야에 들어 왔다. 참새들이 눈이 너무 많이 쌓여 먹이를 얻지 못해 집 문앞에 비실비실 누어 있는 것이다. 가여운 참새들을 본 아내는 얼른 집으로 들어가 먹이를 가져와서는 새들에게 던져 주었다. 그런데 비틀대던 새들은 먹이는 아랑곳 하지 않고 그만 푸드득 하며 날아가 버렸다. 아내는 안타까워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새들아! 나는 너희들을 해하려는 것이 아니야, 이것을 먹지 않으면 너희들은 굶어서 얼어 죽는단다. 그래서 힘내라고 먹이를 주는 것이란다.” 허나 새들이 그 말을 들을리가 없었다. 아내는 날아가는 새들의 뒷모습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 뜻을 어떻게 너희에게 전할 수 있겠니? 내가 새가 되지 않고서는…” 그때 안타까워하는 아내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남편의 뇌리에 번쩍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조금전 예배 시 목사님이 했던 설교내용이었다. “그래! 하나님이 인간에게 계속 사랑을 베풀었지만 인간들은 하나님 품을 떠났던거야.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신 것이야. 그리고 그 사랑을 십자가로 표현 하셨던 거야” 무엇에 감동을 받은듯 남편은 고개를 떨구고 조용히 집안으로 들어가 처음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 : 14)라는 구절이 믿어지기 시작했다. 성탄절에 일어난 신비로운 기적이었다.
<소녀와 신사>12월 10일 2023년 고든의 글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길가에서 과일을 팔고 있는 작은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시간만 있으면 언제나 성경을 읽곤 하였다. 하루는 한 젊은 신사가 과일을 사려고 그녀 앞에 섰지만 이 소녀는 책에 열중해 있어 손님이 온 것을 알지 못했다. 젊은 신사는 소녀에게 물어보았다. “얘야, 너는 무얼 그리 열심히 읽고 있니?” “네, 하나님의 말씀이죠.” 헌데 이 젊은 신사는 회의주의자였다. 그는 소녀에게 다시 물었다. “누가 그 책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이야기 해 주었니?”“하나님께서 제게 그렇게 말씀하신 걸요.” “뭐, 하나님이 네게 말씀하셨다고? 말도 안돼! 너는 그를 만나 보지도, 함께 이야기도 하지 못할터인데..!” 그러자 소녀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젊은 신사를 쳐다보며 이야기했다. “누가 우리들에게 하늘에 태양이 있다고 이야기해 주던가요?” “그건 당연한 말이 아니니? 그건 누구도 말할 필요가 없는 거야. 태양, 바로 그것이 이야기해 주는 거지. 자, 봐라. 태양이 날 이렇게 따뜻하게 해주지 않니? 난 저 햇살이 좋단다.” “그래요! 아저씨 말씀이 옳아요. 그렇게 아저씨가 태양을 느끼듯 저는 하나님을 느껴요! 제가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께서는 저를 따뜻하게 해준답니다. 제가 이 성경을 읽어서 얻는 저 햇살과 따스한 마음은 하나님이 아니시고는 제게 줄 분이 없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쓰여졌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과 행위의 표준이 될 수 있다. 즉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디모데후서 3:16)이며, 성령이 가르치신 것(고린도전서 2:13) 이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말씀하신 것(고린도후서 13:3)이다. 한마디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데살로니가전서 2:13)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 기록 되었으므로(출애굽기 17:14) 절대 신뢰할 수 있고, 인간이 자의대로 해석할 수 없다.(베드로후서 1:20-21). 성경은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쪼개는 살아 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읽고 믿는 자는 심령이 변화되고 구원을 얻는다. 우리 모두 한 권의 책, 성경의 사람이 되자.
<우리가 가는 길> 12월 3일 2023년 우리는 저 멀리 하늘 저 곳을 목적지 삼아 한길 가는 행인이며 나그네입니다. 우리는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어떤 길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 길은 즐거움이 있는 소풍길, 꽃향기 풍기는 꽃길, 안락하고 편안한 대로가 아닙니다. 오히려 가기에 쉽지 않은 길입니다. 협착하고 위험하고 인기없어서 대부분이 꺼려하는 길입니다. 중도 포기없이 평생가야 하는 먼 길입니다. 그 먼길 서두름없이 묵묵히 가야겠습니다. 힘이 되고 위로 격려가 되어주는 동무들과 함께 가야겠습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야겠습니다. 감사하게도 우리가 걸어 가는 길 양편에는 믿음의 나무들이 아름드리 자라가고 있고, 길 앞에는 희망의 무지개가 하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주님을 의지해 한걸음 한걸음 내딛다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가까와 옵니다. 아니, 육신의 걸음걸이에 앞서서 우리 영혼은 이미 하늘 가슴에 안겨 있습니다. 한길 가는 우리들 믿음 안에서 남은 여정도 흔들림없이 가야겠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니라” (마7:14)
목회칼럼 2023년 11월
<삶과 믿음의 가치> 11월 26일 2023년 힘이 많다고 혼자 앞서서 너무 빨리 가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당신 뒤에는 연약한 사람들도 있으니 기다렸다가 그들과 함께 가십시오. 사랑이 많다고 혼자 앞서서 너무 크게 사랑을 드러내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당신 뒤에는 표현하기 쑥쓰러운 작은 사랑을 가진 사람들도 있으니 기다렸다가 그들과 함께 사랑을 행하십시오. 지식이 많다고 혼자 앞서서 너무 자신을 높이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당신 뒤에는 학습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기다렸다가 그들과 함께 오르십시오. 꿈이 많다고 혼자 앞서서 꿈을 너무 빨리 이루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당신 뒤에는 이루어지지 않은 꿈으로 애태우는 사람들도 있으니 기다렸다가 그들과 함께 꿈을 이루십시오. 자유가 많다고 혼자 앞서서 자유를 너무 즐기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당신 뒤에는 아직도 몸과 마음이 구속당하고 얽매인 사람들도 있으니 기다렸다가 그들과 함께 자유를 누리십시오. 용기가 많다고 혼자 앞서서 너무 내달리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당신 뒤에는 소심함으로 아직도 망설이는 사람들도 있으니 기다렸다가 그들과 함께 걸어가십시오. 복과 은혜가 많다고 혼자 앞서서 간증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당신 뒤에는 현실문제로 고통받는 사람들도 있으니 기다렸다가 그들과 함께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삶과 믿음의 가치는 자신은 내려놓고 남을 유익하게 하는 것입니다.
<감사의 방법들> 11월 19일 2023년 추수감사절에 감사의 생활화를 다시금 결심하면서 감사의 방법들을 모색해 보자. (1) 모든 것, 범사에 감사하라.우리의 삶에서 은혜와 감사가 아닌 것은 단 한 가지도 없다. (2) 생각이 곧 감사다.생각(think)과 감사(thank)는 어원이 같다. 깊은 생각이 감사를 불러 일으킨다. (3) 작은 것부터 감사하라.바다도 작은 물방울부터 시작되었다. 아주 사소하고 작아 보이는 것에 먼저 감사하라. 그러면 큰 감사거리를 만나게 된다. (4) 자신에게도 감사하라.성 어거스틴은 이런 말을 남겼다. “인간은 높은 산과 태양과 별들을 보고 감탄하면서 정작 자신에 대해서는 감탄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감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는 자만하거나 자기 과신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질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인간은 주님 형상으로서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5) 일상을 감사하라. 숨을 쉬거나 맑은 하늘을 보는 것처럼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절대할수없는것이 감사이다. 늘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것에도 감사하라. (6) 문제를 감사하라. 인생은 문제투성이이지만 그것에 대한 해결책도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문제들에도 분명 감사거리가 있다. (7) 사람들과 함께 감사하라. 장작도 함께 쌓여 있을 때 더 잘 타는 법이다. 감사에는 시너지 효과가 있다. 가족끼리, 공동체페 지체들 끼리 감사를 나누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로 돌아온다. (8)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라. 꼭 결과만 보고 감사하지 말라. 문제 앞에서 드리는 감사가 더욱 아름답고 절실하다. (9) 잠들기 전에 감사하라. 대부분의 사람이 짜증과 걱정을 안고 잠자리에 든다. 잠들기 전의 감사는 영혼의 청소가 된다. (10) 감사의 능력을 믿고 감사하라. 감사에는 메아리 효과가 있다. 감사하면 감사한 대로 이루어진다. <시원한 반전> 11월 12일 2023년 사건, 사고들이 예고없이 참 많이 일어난다. 이 세상이 안전하지 않다. 현실적으로 잘 살고 평안, 행복하기가 쉽지 않다. 최선 다해도 결과가 잘못되기도 한다. 진단 받았는데 오진으로 인해 병이 악화되기도 한다. 누군가의 선한 도움이 오히려 해가 되기도 한다. 날씨마저 정상생활을 어렵게 만든다. 어떤 문제들에는 마땅한 해결책이 없어 보인다. 암, 사고, 수많은 증후군은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정말 현실을 보면 힘들고 아득하다. 때로 믿음에도 회의가 일어나고 해서 믿음의 열매를 기대하기 힘든 때가있다. 헌데 우리들에게는 통쾌하고 시원한 반전이 있다. 현실을 넘어 우리들은 종내는 훨씬 잘될 것이라는...영화 예고 편에 멋있는 장면들이 펼쳐진 후 기대하라는 자막이 나오는 것처럼 우리들은 앞으로 펼쳐질 일들에 대해 기대해도 좋다. 이는 막연한 낙관내지 허황된 바람이 아니다. 성경은 이렇게 선언한다.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앞에서 경외하는 자는 잘 될것이요” (전도서 8:12), “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바란다” (요한삼서 1:2),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요한복음 8:28) 라고... 모든 것이란 형통과 곤고,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등 성도들 위에 일어나는 일체를 말하며 선을 이룬다는 것은 바람직한 결과로 나타난다는 말이다. 개인, 가정, 교회, 사역, 삶, 모든범사가선을이룰 것이다. 우리가 잘되는 이유는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의 능력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 안에서 우리와 동역하시면서 위대하고 신비한 일들을 이루어 가신다. 또한 그분의 은혜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한 것 보다 훨씬 나쁠 수 있지만 주님 은혜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크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 때문이다. 믿음은 세상을 이기는 동력이며 삶의 결실을 맺게하는 비결이다. 우리들은 우리의 믿음대로 될 것이다. 현실적 문제들로 힘들고 지칠 때가 있지만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한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이끄시고 보호하시고 지키실 것이다. 그분이 우리를 잘되게 하실 것이다. 당신의 뜻, 방법에 따라서.... 더 나아가 하늘나라에서는 최고로 잘되게 하실 것이다.
<기도하면> 11월 5일 2023년 죠지 뮬러 (George Muller) 기도하면 하나님이 보이고, 기도없이 생각하면 사람이 보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생각하면 사람이 일합니다. 생각하는 사람은 항상 판단에 의존하지만, 기도하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기도의 무릎을 꿇으면 하늘 문이 열립니다. 답답했던 삶에 환한 빛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기도하면 신기하게도 불가능한 일들이 가능해 집니다. 꼬였던 것들이 풀어지기 시작합니다. 온갖 해결책이 떠오릅니다. 기도하면 신비한 섭리가 일어납니다. 기도하며 걷다보면 어느덧 내가 함정도 지뢰밭도 무사히 지나갔음을 알게됩니다. 기도하면 감추었던 내 미래와 축복 들이 나타납니다. 내 인생을 향한 크고 놀라운 계획이 펼쳐 지기 시작합니다. 기도하면 천사의 손길이 돕습니다. 나를 위하여 누군가가 움직입니다. 둘이서 기도하면 하늘 문이 열립니다. 부부가 마음을 합해서 기도하면 그 가정에 불가 능한 일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부부는 가장 강하고 부요한 사람들입니다. 기도하면 문제가 작아집니다. 문제를 내려다 보게 됩니다. 사람들의 인기와 인정에서 자유하게 됩니다. 용서의 힘이 생깁니다. 상처가 치유가 됩니다. 마음이 넓어집니다. 이 놀라운 약속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난하고 비천하신지요? 기도하면 더 깊은 은혜의 사람, 더 놀라운 능력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단 하나의 빈곤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기도의 빈곤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 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목회칼럼 2023년 10월
<새 피조물> 10월 29일 2023년 1517년 10월31일에 일어났던 종교개혁운동은 종교적 삶과 교회생활은 물론 모든 삶의 분야들을 일변시켰다. 개혁운동을 통해서 전 유럽은 속속들이 바뀌고 변화하게 되었다. 그런 변화들 중에서 특히 기독자들에게 절실했던 개혁운동의 내용들이 있다. 첫째, 종교개혁은 성경을 되찾아 성경으로 돌아가려는 운동이었다. 이는 오직 성경 중심의 삶과 믿음을 반석 위에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특수층만이 아닌 일반대중에게도 성경을 허락하려는 시도였다. 즉 성경의 대중화운동이었다. 종전에는 사제들의 전유물이었던 성경이 평신도에게까지 개방되어 모두에게 하나님 말씀이 신앙의 유일한 규범및 교리의 척도가 되었다. 따라서 교황의 교서나 교회의 규칙같은 것이 성경을 대신하거나 보충할 수 없었다. 성경은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둘째,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한 운동이었다. 개혁자들은 구원은 인간의 선행이나 공로, 업적이 아닌 오로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인류의 구원이 완성됨을 주장하였다. 성경의 증언처럼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연결시키는 중보자이시며, 그분만이 은혜 안에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는 구주이시다. 이 은총에 대한 재인식은 그리스도를 되찾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것이 종교개혁운동의 핵심적 의미가 되었다. 셋째, 종교개혁은 우리들을 신앙의 본질로 회복시키는 운동이었다. 신앙의 본질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죄에서 자유함을 얻고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의 근거는 오직 믿음에 있는 것이다. 즉 우리들은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고 영생을 얻게 된다. 죄에 시달려 절망에 허덕이던 루터에게 마지막 위안과 희망을 안겨 준 것은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었다. 그리고 이 확신이 루터로 하여금 종교개혁 이라는 큰 과업을 완수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오늘도 종교개혁이 필요하다. 우리들은 성경을 믿음과 삶의 척도로 여기고 성경대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해야 한다. 오직 믿음으로 행해야한다. 이런 삶을 통해 우리들은 항상 새피조물로 존재하게 된다.
<아름다운 관계> 10월 22일 2023년 사람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공동체에 소속되어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고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다. 심리학자 매슬로우는 이를 소속및 애정욕구라 칭했다. 소속에의 욕구는 창조질서에 속한다. 하나님은 아담을 만드신 후 그가 독처하는 것을 좋지않게 보시고 돕는 베필로 하와를 만드셨다. 돕는 베필이란 공동체에 소속되어 사랑하고 섬기고 함께 일을 도모하는 사회적 존재라는 뜻이다.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생이 평안, 행복해진다. 삶의 의미도 증폭된다. 성경은 행복에 이르는 비결중 하나를 시34:12-14의 질문과 대답을 통해 제시한다. 12절에서 시인은 ‘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복받길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묻는다. 그 답으로 14절에서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는 것’ 이라 말한다. 즉 착한 일과 좋은 관계가 행복의 비결이라는 것이다. 미국 대기업들은 신입사원을 선발할 때 실력 외에도 공동체 일원으로서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만들어가는 능력, 즉 인간성과 공감능력도 고려한다. 또한 좋은 관계는 예배를 주님께 열납되게 한다. 주님은 ‘형제에게 원망들을 일이 있거든(불편한 관계)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관계회복) 그후에 와서 예물드리라’(마5:23,24)하셨다. 은혜롭고 아름다운 교회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잘 믿고 성경대로 사역하는 교회이다. 지체들간 영혼의 소통이 있고 화평한 관계가 유지되는 교회이다. 1세기 안디옥 교회는 사도, 선지자, 교사, 유대인, 이방인, 왕족, 노예, 흑인등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세상적 기준으로는 융화하기 힘든 교회였다. 헌데 그들은 마음을 연합하여 말씀을 연구하고 금식하며 주님을 섬겼다. 선교사도 파송했다. 정말로 멋진 교회다운 교회였다. 하나님은 모두가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길 바라신다. 우리들은 부르심을 받은대로 온유와 겸손과 오래참음으로 옷입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화목과 하나됨을 위해 힘써야겠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10월 15일 2023년 김준엽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며 살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었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 하겠습니다.
<모나미 153 브랜딩> 10월 8일 2023년 “모나미 153 브랜딩”이란 책이 있다. 이 책은 벌써 60년도 더 된 300원짜리 볼펜을 파는 회사가 어떻게 지금도 하루에 20만 자루를 만들며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지를 밝히고 있다. 불과 14.5센티의 작은 볼펜인데 1963년에 처음 출시된 이래 지금까지 43억 자루 이상이 팔렸다고 한다. 모나미 볼펜을 일렬로 늘어 놓으면 지구를 열다섯 바퀴나 돌 수 있다고 하니 실로 어마어마하게 느껴진다. 바디, 구금(팁을 감싸는 덮개), 노크, 스프링, 그리고 심으로만 구성된 모나미 볼펜이 1980년대 저출산 시대와 더불어 학교마다 학생들 수가 줄어들고 이에 따라 문구 시장이 축소되는 위기 속에서도 어떻게 살아 남을 수 있었는지 경이롭기도 하다. 이 책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본질(本質)”이다. 본질이란 모나미가 존재하는 이유(identity)로 모나미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붙드는 것이다. 한때 모나미는 유통 사업에 손을 댄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되는 듯 했으나 결국 벽에 부딪혔다. 이후 모나미는 펜을 만드는 일이 가장 자신들이 잘하는 일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본질에 집중하자 여러 곳에서 협업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러 회사와 콜라보를 통해 한정판으로 다소 고가로 책정된 제품임에도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서로 다른 컨셉의 “모나미 팝업 스토어”를 만든 것이다. 이로 인해 모나미는 고객들에게 더욱 참신하게 다가갔고 상품 매출도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요즘 이구동성으로 교회들이 위기라 말한다. 교회의 심각성을 고려할 때 맞는 말이다. 헌데 위기는 새로운 기회를 가져온다. 그 기회는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다. 어려울수록 다시금 교회는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 교회의 생명은 본질에 있다. 주변 것들은 본질을 좀 더 아름답게 보여주는 외관이지만 핵심 가치는 아니다. 모나미 볼펜처럼 교회가 무엇이며,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붙잡는 것이 중요하다. 사역자에 대한 본질도 마찬가지이다. 사역자는 누구이며, 사역자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교회가 교회 본연의 사역에 충실하는 한편 교회 내부에만 멈춰 있지 않고, 세상에 한 반짝 더 나아가 그들을 위해 헌신한다면 교회는 내외적으로 지금보다 더 나아질 것이다. 현대교회에 찾아온 위기는 새로운 기회로 나아가는 전환점이 될 수도있다.
<시간 선용> 10월 1일 2023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공정한 선물가운데 시간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하루 24시간, 1440분을 똑같이 주셨다. 외모, 재능, 은사, 힘, 지혜등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시간의 분량에 있어서는 모두가 정확히 하루 24시간을 사용한다. 시간은 멈추거나 되돌릴 수 없는 것으로 앞으로 전진하기만 한다. 언젠가 우리 각자에게 할당된 시간이 다 소모될 때 우리들은 생의 종말을 고하게 된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시간을 주셨을 때 우리의 생이 시작되고 그 시간이 끝날 때 지상에서의 생도 마치게 된다. 따라서 시간은 생명같이 귀한 것이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당신은 인생을 사랑하십니까? 그러면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인생이라는 것은 바로 시간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날에 우리가 영육간에 행한 모든 것으로 우리를 심판하실 것이며 또한 시간사용에 대해서도 셈하시고 심판하실 것이다. 성공한 사람은 매사에 열심을 다하면서도 절제했으며 무엇보다도 시간관리를 효과적으로 잘한 사람이다. 반면에 실패의 큰 이유중 하나는 시간관리를 제대로 못한 것이다. 아무리 지식이 출중하고 재능이 있어도 시간을 헛되어 낭비하거나 남용하면 낙오자가 될수 밖에 없다. 요한 웨슬레는 시간을 5분 단위로 잘 나누어 사용함으로 자투리 시간 조차 선용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시계를 통해 알리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동일하지만 느끼고 음미하는 시간은 다 다르다. 즉 시간의 양은 모두에게 같지만 시간의 질은 사람마다 다르다. 성경은 “세월을 아끼라”고 우리들에게 교훈한다. 세월을 아끼는 것은 ‘기회를 사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누구에게나 주님이 허락하신 인생 기회가 있는데 이를 잘 선용해야 한다. 시간을 낭비하거나 무미건조하게 보낸다면 우리들은 악에 빠질 수가 있다. 주님은 이 시대를 ‘때가 악하고 음란한 세대’ 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들은 계획없이 대충대충 살게 아니라 성경에서 제시된 믿음의 삶이 무엇 인지를 제대로 알고 살아야겠다. 참 지혜는 주님이 누구인줄 알고 그분 뜻대로 사는 것이다. 주님 뜻은 우리들이 거룩해지는 것이며 주님이 주신 시간을 선용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주님을 경배하고 이웃과 세상을 섬기고 몸된 교회를 받들고 영혼전도에도 최선을 다함으로 시간선용을 이루어 가길 기원한다.
목회칼럼 2023년 9월
<하늘나라 가는 자들> 9월 24일 2023년 어느 날 감리교 운동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가 기도를 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는 잠이 들면서 하늘나라의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가 황금 유리가 깔린 찬란한 보석 길을 따라 하늘나라에 도착하니 천국의 수위천사가 정중하게 마중하여 주었습니다. 웨슬레는 마음에 궁금하던 질문을 수위 천사에게 묻습니다. ‘천사님, 나와 더불어 영광스러운 감리교 운동을 하던 성도들이 하늘나라에 얼마나 왔습니까?’ 그는 상당한 기대를 하고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천사의 답을 기다렸습니다. 천사는 잠깐만 하더니 하늘나라 명부를 쭉 훑어보고 한참 후에야, ‘감리교인 명단은 하나도 없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웨슬레의 충격과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내 신앙에 무슨 잘못이 있었나 보다. 나의 선교 활동은 결국 실패했구나. 그렇다면 칼빈의 교리가 맞나보다. 천국은 온통 칼빈주의자들로 가득 찼겠구나’ 하면서 다시 천사에게 ‘그러면 장로교인은 얼마나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이에 천사는 다시금 생명록을 꺼내보더니, ‘미안하지만 장로교인은 한 사람도 없소.’라고 대답했습니다. 웨슬레는 다시금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장로교인도 천국에 없다니, 그렇다면 우리들의 종교개혁은 그야말로 실패를 해버렸구나. 결국 하늘나라는 천주교인으로 가득 찼겠구나’ 생각하며 심히 풀이 죽었습니다. 그 어려운 종교개혁을 이루었는데 어찌된 일인가 의아해하며 그는 천사에게 ‘그렇다면 하늘나라에는 모두 천주교인들만 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이번에도 천사는 같은 말을 합니다. ‘여기 이 생명록에 적혀 있는 것을 보면 천주교인도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천국에는 도대체 누가 있소?’ 웨슬레는 흥분되어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불교인입니까? 아니면 회교도들입니까?’ 천사는 조용히 펼쳤던 생명록을 덮으며, ‘하늘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십자가의 피로 씻음받은 그리스도인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하고는 사라져 버렸다고 합니다. 하늘나라는 교단, 교파, 배경따라 갈수 있는게 아닙니다. 누구던지 예수님을 영접하며 그분이 유일하신 구주이심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고 하늘나라 시민이 됩니다!
<선교- 하나님의 꿈> 9월 17일 2023년 ‘짐 엘리엇’은 하나님 앞에선 경건했고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선 진지했으며 주님을 향한 비전에 있어선 열정적이었다. 그는 선교사로서 자신의 생명을 주님께 기꺼이 드릴만큼 철저했다. 그는 선교적 사명을 품고 단 한 명의 기독교인도 없는 에콰도르의 아우카 인디언 마을로 향했다. 헌데 그는 그곳에서 그토록 간절히 바랬고 사랑했던 아우카 부족에게 제대로 복음을 전해보지 못한채 잔인하게 그들의 창과 화살에 살해되었다. 자신처럼 선교의 열정을 지녔던 4명의 선교사들과 함께...그때 그의 나이 28살이었다. 그가 순교당한지 1년 후 간호사인 엘리엇의 아내 엘리자베스가 남편을 이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아우카 족에게로 갔다. 그때 그녀는 몰랐는데 아우카 족은 남자는 죽이지만, 여자는 죽이지 않는 부족이었다. 5년 동안 아우카 부족을 위하여 헌신한 엘리엇의 부인이 안식년이 되어 돌아간다고 하자 추장이 파티를 열어주며 그녀가 누구인가를 물었다. 그러자 엘리자베스는 “5년 전에 당신들이 죽인 남자가 제 남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저도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말했다. 그녀의 사연을 들은 아우카족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했다. 다섯 선교사들이 순교한 후 그들의 가족과 엘리엇 선교사의 부인이 그 부족에게 끝까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했고, 이에 감동받은 부족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생명을 드리겠다고 헌신했다. 그로부터 약 10여 년 후 선교사들의 가슴에 창과 화살을 꽂았던 ‘키모’라는 아우카족 사람은 아우카족 최초의 목사가 되었고, 순교한 선교사들의 자녀 중 2명은 그들의 아버지가 순교의 피를 흘린 팜 비치 강가에서 ‘키모’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 중 하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고통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남편을 잔인하게 잃었던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남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으실 하나님의 꿈을 보았다. 그녀는 하나님의 꿈 때문에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고통과 분노를 주님의 용서와 사랑으로 바꾸었다. 하나님의 꿈은 세상을 구원하고 세상을 바꾼다!
<록펠러의 인생> 9월 10일 2023년 록펠러는 20대에 사업을 시작하여, 33세 때는 백만장자가 되었습니다. 43세 때는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공을 위하여 자신의 건강과 행복을 망가뜨렸습니다. 53세 때부터 머리털과 눈썹까지 다 빠지는 탈모증에 걸렸고, 억만장자였으나 소화장애로 하루에 우유 조금에 과자 몇 조각 외에는 먹을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렀습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고 안절부절하는 영혼을 더 이상 지탱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 후 55세 때 암 선고를 받고 의사들로부터 앞으로 1년도 못 산다는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신문기자들은 “세계 제일의 부자 록펠러 죽다”는 기사를 써놓고 죽을 날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록펠러는 긴긴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던 새벽녘에 응접실 탁자 위에 놓인 성경책을 펼쳤습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구절이 누가복음 6:38이었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이 말씀이 그의 마음에 부딪혀 왔습니다. 그동안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으기만 하였지 주는 일을 몰랐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삶은 변화되었습니다. 모으기만 하던 삶에서, 나누고 주는 삶으로 삶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록펠러 재단’을 만들어 그의 것을 나누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의 건강이 회복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빠졌던 머리카락이 다시 나기 시작하였고 먹은 음식이 잘 소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건강을 회복한 그는 무려 98세까지 살았습니다. 1년 후에 죽는다는 사람이 그로부터 40년을 넘게, 그것도 건강하게 살았습니다. 인생에는 채우고 모으는 시기가 있고 주고 나누고 내려놓는 시기가 있습니다. 인생 전반부가 쌓고 모으는 시기라면 후반부는 나누고 베푸는 시기입니다. 참 인생의 행복은 마냥 모으는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고 베풀고 섬기는데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주는 자가 더 복되도다’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주는 자, 베푸는 자에게 더 넉넉히 채워 주십니다. 우리들이 지닌 것으로 베풀고 나누며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한 변호사의 간증> 9월 3일 2023년 젊은 나이에 벌써 성공의 길에 들어선 영국의 한 변호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영국 의사당 앞에서 비중 높은 변호를 하기로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일에 대해 많은 긴장과 부담감을 가진 나머지 지나친 스트레스로 인하여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이후 출세 가도를 달리던 그의 인생은 점차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정신착란 증세로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급기야 그는 자신이 더럽고 추한 무가치한 존재라고 자학하며 자살까지 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주변에 그를 불쌍히 여기며 관심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그는 복음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쓸모 없다고 여기며 자살까지 하려 했던 그가 죽음과 절망의 사슬로부터 풀려 나오는 데는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자신의 죄를 담당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 으로써 더럽고 추한 자신의 삶이 새로운 삶으로 변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변한 삶의 모습과 그렇게 변하게 하신 주님사랑의 감격을 시로 간증 했습니다. “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누엘 피로다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저 도적 회개 하고서 이 샘에 씻었네 저 도적 같은 이 몸도 죄 씻기 원하네 속함을 얻은 백성은 영생을 얻겠네 샘솟듯 하는 피 권세 한없이 있도다” 이는 그의 간증시로 찬송가 258장의 1절입니다. 그는 바로 윌리엄 카우퍼(William Cowper)로서 영국 문학사에 있어서 고전문학가로 손꼽힐 만한 인물입니다. 카우퍼는 스가랴서 13장 1절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라는 구절을 읽다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카우퍼는 자신이 예수님 보혈로 인해서 세상의 굴레로부터 영원히 해방된 자유의 몸이 되었음을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날 정케하신 피 보니 그 사랑 한없네 살 동안 받는 사랑을 늘 찬송하겠네’. 우리들도 예수님 사랑을 입고 새사람으로 변화받은 자들이다. 즉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자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골로새 3:10)이다. 늘 새 사람, 새 지체, 새 영으로 살아가시길 기원한다.
목회칼럼 2023년 8월
<암흑 가운데서도 노래할 수 있는 이유> 8월 27일 2023년 1930년대 미국에 큰 공황이 찾아왔을 당시, 법률가 출신이자 무정부주의자(無政府主義者)인 클래런스 대로라는 유명한 무신론자가 있었다. 그는 미국에 경제공황에 발생하자 이때가 자신의 무신론을 선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강연을 할 때마다 “여러분, 이 사태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이 어려운 상황을 우리에게 주시겠습니까? 우리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만 보아도 분명히 하나님은 없습니다” 라고 힘주어 말하곤 했다. 그리고 정부를 비판하면서 무정부주의적인 자기의 신념을 큰 목소리로 선전했다. 하루는 흑인들이 모여있는 자리에서 무신론 강연을 하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여러분, 우리는 다 잃어버렸습니다. 꿈과 재산을 잃었고 노래까지 잃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노래를 부를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자 갑자기 맨 뒷자리에 앉아있던 한 할머니가 손을 번쩍 들더니 크래런스를 향해 “아니요, 저는 노래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말에 그는 “아니 할머니, 어떻게 우리가 이 지경이 됐는데 정말 노래할 수 있단 말입니까?”했더니, 그 할머니는 큰소리로 “네, 환경때문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노래할 수 있습니다”라고 외쳤다. 그런데 할머니 한 사람이 자신만만하게 외치자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맞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때문입니다” 라고 동조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에 방금 전 한 무신론자가 하나님이 없다고 외치던 강연장의 분위기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인정하는 군중들로 인해 확 바뀌었다. 당시 무신론으로 유명세를 치루고 있던 클래런스는 자신의 학설보다는 하나님의 존재하심, 살아계심을 외치며 고백하는 군중들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고 고개를 숙인 채 강연장을 떠났다. 세상이 소란스럽고 살기 힘들어도 우리들이 여전히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출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 때문이다. 주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들 마음에 노래를 빼앗기지 않고 기쁨과 평안을 지닐 수 있게 해 주신다. 우리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현실을 극복하며 주님께 찬송을 올릴 수 있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시 40:3)
<찰스 콜슨의 변화된 삶> 8월 20일 2023년 찰스 콜슨은 미국 닉슨 대통령 시절에 대통령 보좌관으로 있으면서 권력을 누렸던사람이다. 머리가 비상하고 냉철했던 그는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되어 옥에 투옥되었다. 그때 상원의원이던 퀴에는 콜슨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였고 그를 찾아가 위로하며 책을주었다. 찰스 콜슨의 형 집행기간이 7개월 가량 남았을 때, 평상시처럼 기도하는 퀴에의 마음에 콜슨을 위해서 대신 옥살이를 해야겠다는 감동이 생겼다. 변호사였던 퀴에는 특수법조문 안에 다른 사람을 대신해 형기를 치를 수 있다는 내용이 언급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법원에 제안해 보았지만 거절당했다. 허나 퀴에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콜슨이 마침내 감옥에서 마음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믿는 자가 값없이 베푼 사랑 앞에 교만하기 그지없던 그의 자아가 무너졌고 자신도 누군가에게 사랑을 베풀어야겠다는 마음도 들었다. 콜슨은 남아 있는 형기 동안 어떻게 동료 죄수들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을지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죄수들이 제일 싫어하는 빨래를 자청해서 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 죄수들은 콜슨의 태도를 믿지 못하고 다른 속셈이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들의 서늘한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결같이 봉사하는 콜슨의 모습을 보고 동료들이 하나 둘씩 감동을 받기 시작했다. 그들은 콜슨과 더불어 기도 모임을 시작하고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다. 콜슨은 그의 자서전에서 “평생 동안 집안에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던 나는 저들을 사랑하면서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발견했다”고 고백했다. 콜슨은 그 때 일평생 죄수들을 위해서 살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그는 형기를 마치고 나와서 “거듭나기”라는 책을 발간했는데 그 책은 미국 사회의 커다란 화제 거리가 되었다. 콜슨은 감옥에서 결심한대로 <교도소 선교회>를 조직해서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썼다. 그후에 그는 종교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템플턴 상을 받게 되었다. 한 외국잡지는 탬플턴 상을 수상한 찰스 콜슨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 “현재 미국의 가장 건강한 사상적 영향을 끼치고 있는 저술가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전도자, 그리고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가장 따뜻한 이웃인 그가 새로운 이웃이 되어 우리 곁에 돌아왔다.” 누구나 콜슨처럼 변화받고 콜슨처럼 쓰임받진 않는다. 허나 누구던 어떤 방식으로던 주님으로부터 쓰임받을 수 있다. 퀴에와 콜슨처럼 주님의 사랑을 담고 있으면 쓰임받는다.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주님 일을 행하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
<스티브 잡스의 한 마디> 8월 13일 2023년 스티브 잡스는 애플 컴퓨터 사 초창기에 성장이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을 때 효율적인 마케팅 전략을 짜기 위해 고민하다가 당시 펩시콜라 마케팅의 천재이던 존 스컬리를 영입하기로 했다. 존 스컬리는 기발한 광고전략으로 펩시콜라가 코카콜라를 따라잡게 한 사람이었다. 그가 입사하던 당시에 펩시콜라는 코카콜라와 “콜라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그때 펩시콜라는 코카콜라의 적수가 못 되는 만년 2등 브랜드였다. 그는 30세의 젊은 나이에 펩시콜라의 부사장에 취임했다. 존 스컬리는 “블라인드 테스트”와 “펩시 제너레이션” 광고를 기획했는데 이 두 편의 광고가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덕분에 펩시콜라의 매출은 결국 코카콜라의 아성을 뛰어넘게 되었고 펩시콜라는 세계적인 브랜드가 되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1977년 펩시콜라의 사장이 되었다. 스티브 잡스가 스컬리를 자회사로 영입하고자 했을 때, 스컬리는 이미 충분한 재산과 지위를 가지고 있었기에 자리를 옮길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잡스가 거액의 연봉을 제시하면서 아무리 설득해도 스컬리는 끄떡하지 않았다. 그 후 6년의 시간이 지난 후, 잡스는 스컬리에게 마지막으로 이런 도전적인 말을 던졌다. “당신! 언제까지 설탕물이나 팔아먹으면서 여생을 허비하겠소? 나와 함께 세상을 바꾸는 일에 자신을 한 번 던져보지 않겠소?” 결국 이 말이 스컬리의 마음을 움직였다. 훗날, 스컬리는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잡스에게 스카웃 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스컬리의 생을 바꾸게 한 스티브 잡스의 말 한 마디는 우리들 삶에도 울림을 준다. 우리는 남은 남들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대로 적당히 살다가 주님 앞으로 가면 좋고 못가도 할수 없지 라며 인생을 살아야겠는가? 아니면 인생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교훈과 모범을 따라 주의 일에 헌신하면서 의미있고 가치있게 살아가겠는가? 가장 온전하고 위대하신 주님께 스카웃되어 주변과 사람들을 변화시켜며 살아갔으면 좋겠다.
<성경에 나오는 10가지 건강, 치유식품들(3)> 8월 6일 2023년 하나님은 우리 몸을성령의전으로삼으시고 이를 귀중히 여기시고 건강하게 잘 유지하도록 꼭 필요한 식품들을 허락해 주셨다. 성경에 언급된 10가지 치유 식품들을 제시한다. 7. 향신료, 계피이다. 출 30:23-25에, “너는 상등 향품을 가지되 액체 몰약 오백 세겔과 그 반수의 향기로운 육계 이백오십 세겔과 향기로운 창포 이백오십 세겔과 계피 오백 세겔을 성소의 세겔로 하고 감람 기름 한 힌을 가지고 ..향을 제조하는 법대로 향기름을 만들지니”했다. 향신료는 향료나 향을 만들뿐 아니라 음식과 의약품의 재료로 사용되었다. 향신료는 칼슘, 칼륨 및 아연과 같은 미네랄의 훌륭한 공급원으로 B 복합 비타민이 풍부하다. 계피는 항산화 작용을 하며 마늘은 심장 및 면역 문제를 돕는다. 이들은 소화 촉진, 면역 체계 보조, 통증 완화 또는 감염 퇴치와 같은 치유 특성을 가지고 있다. 8. 콩과 렌즈 콩이다. 사무엘하 17:28에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꿀과 버터와 양과 치즈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에게 먹게 하였으니” 했다. 콩과 식물은 야곱이 에서를 위해 준비한 붉은 팥죽과 다니엘의 채식 식단에 사용되었다. 콩은 단백질이 풍부해서 특히 임산부에게 중요한 식품이며, 좋은 항산화제이며 포화 지방이 적다. 콩은 고단백질과 높은 섬유질로 육류를 대신할 수 있다. 9. 견과류이다. 창세기 43:11에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가지고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예물로 드릴지니 곧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유향나무 열매와 감복숭아(아몬드) 이니라”했다. 피스타치오와 아몬드 견과류는 저칼로리 간식이다. 피스타치오 너트는 항산화 성분이 높고 암 방지 성분인 레스베라트롤을 포함되어 있다. 아몬드는 단백질과 섬유질이 가장 많은 견과류 중 하나이며 신체에 필요한 성분인 망간, 마그네슘, 칼슘을 함유하고 있다. 10. 아마씨이다. 잠언 31:13에 “그는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며”했다. 아마는 성서에서 아마포와 함께 옷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그것은 높은 섬유질, 오메가 -3 지방산, 단백질 및 리그난 을 포함한 것으로 의학적 가치가 크다. 영양가들은 아마씨를 시리얼, 스무디, 심지어 제빵에 큰 영양분으로 사용하는 것을 좋다고 권한다. 지금까지 언급한 10가지 음식들은 하나님께 자연을 통하여 인류에서 베푸신 하나님의 자연 은총이다. 인간의 몸과 건강에 필요한 건강식품을 허락하신 주님 은혜에 감사드리며 건강 중에 주의 뜻을 이루어 가시길 기원한다. <성경에 나오는 10가지 건강, 치유식품들(2)> 7월 30일 2023년 하나님은 우리 몸을성령의전으로삼으시고 이를 귀중히 여기시고 건강하게 잘 유지하도록 꼭 필요한 식품들을 허락해 주셨다. 성경에 언급된 10가지 치유 식품들을 제시한다. 4. 발아 곡물과 빵이다. 에스겔 4: 9에, “너는 밀과 보리와 콩과 팥과 조와 귀리를 가져다가 한 그릇에 담고 떡을 만들어 네 모로 눕는 날수 곧 삼백 구십일에 먹되”했다. 성경에서 빵은 생명의 공급원으로 표현된다.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부르셨다. 성서 시대의 빵은 오늘날처럼, 해로운 정제 방법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당시의 빵은 발아시킨 천연 곡물로 식단의 기본 음식이었다. 발아 곡물 빵은 씨앗이 부분적으로 발아될 때까지 곡물을 밤새 수분이 있는 곳에 담그거나 발효시키는 일련의 과정을 거친다. 이런 과정은 탄수화물을 더 쉽게 소화할 수 있게 만든다. 발아 곡물은 섭취하면 아미노산이 높은 식이 섬유가 되며 또한 항산화 활성을 가지게 된다. 5. 산양 우유 및 제품이다. 잠 27:27에 “염소의 젖은 넉넉하여 너와 네 집의 음식이 되며 네 여종의 먹을 것이 되느니라” 했다. 성서 시대에는 염소의 생우유와 치즈가 주 음식 공급원이었다. 이것은 현대 음식처럼 저온 살균되지 않았다. 젖소보다 쉽게 소화되기 쉬운 산양 우유는 유당이 적고 여러 비타민, 효소 및 단백질을 포함하고 있다. 전 세계 인구의 65%가 염소 우유를 마신다. 이것은 염증성 질환의 치료에 도움이 되며, 완전한 단백질로 비누의 원료에도 사용된다. 6. 여러 종류의 과일이다. 사무엘상 30: 11-12에 “무리가 들에서 애굽 사람 하나를 만나 그를 다윗에게로 데려다가 떡을 주어 먹게 하며 물을 마시게 하고 그에게 무화과 뭉치에서 뗀 덩이 하나와 건포도 두 송이를 주었으니 그가 밤낮 사흘 동안 떡도 먹지 못하였고 물도 마시지 못하였음이니라 그가 먹고 정신을 차리매” 했다. 성경에 나오는 무화과, 포도, 석류와 같은 작은 과일은 신선한 과일로 먹거나 음료, 케이크 등의 재료로 사용된다. 석류는 항염증, 항산화 및 항종양 특성을 가지고 있다. 미네랄과 비타민 A, K, E와 같은 비타민이 풍부한 무화과는 칼로리가 낮고 섬유질이 높다. 포도에는 대장암과 전립선암을 예방하고 뇌졸중 위험을 줄이는 것으로 알려진 강력한 항산화제인 레스베라트롤이 포함되어 있다. 석류, 무화과, 포도 등은 비타민과 미네랄이 풍부하기에 신선한 과일 그대로 혹은 건조시켜 간식으로 섭취하면 건강에 좋다.
목회칼럼 2023년 7월
<성경에 나오는 10가지 건강, 치유식품들(2)> 7월 30일 2023년 하나님은 우리 몸을성령의전으로삼으시고 이를 귀중히 여기시고 건강하게 잘 유지하도록 꼭 필요한 식품들을 허락해 주셨다. 성경에 언급된 10가지 치유 식품들을 제시한다. 4. 발아 곡물과 빵이다. 에스겔 4: 9에, “너는 밀과 보리와 콩과 팥과 조와 귀리를 가져다가 한 그릇에 담고 떡을 만들어 네 모로 눕는 날수 곧 삼백 구십일에 먹되”했다. 성경에서 빵은 생명의 공급원으로 표현된다.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부르셨다. 성서 시대의 빵은 오늘날처럼, 해로운 정제 방법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당시의 빵은 발아시킨 천연 곡물로 식단의 기본 음식이었다. 발아 곡물 빵은 씨앗이 부분적으로 발아될 때까지 곡물을 밤새 수분이 있는 곳에 담그거나 발효시키는 일련의 과정을 거친다. 이런 과정은 탄수화물을 더 쉽게 소화할 수 있게 만든다. 발아 곡물은 섭취하면 아미노산이 높은 식이 섬유가 되며 또한 항산화 활성을 가지게 된다. 5. 산양 우유 및 제품이다. 잠 27:27에 “염소의 젖은 넉넉하여 너와 네 집의 음식이 되며 네 여종의 먹을 것이 되느니라” 했다. 성서 시대에는 염소의 생우유와 치즈가 주 음식 공급원이었다. 이것은 현대 음식처럼 저온 살균되지 않았다. 젖소보다 쉽게 소화되기 쉬운 산양 우유는 유당이 적고 여러 비타민, 효소 및 단백질을 포함하고 있다. 전 세계 인구의 65%가 염소 우유를 마신다. 이것은 염증성 질환의 치료에 도움이 되며, 완전한 단백질로 비누의 원료에도 사용된다. 6. 여러 종류의 과일이다. 사무엘상 30: 11-12에 “무리가 들에서 애굽 사람 하나를 만나 그를 다윗에게로 데려다가 떡을 주어 먹게 하며 물을 마시게 하고 그에게 무화과 뭉치에서 뗀 덩이 하나와 건포도 두 송이를 주었으니 그가 밤낮 사흘 동안 떡도 먹지 못하였고 물도 마시지 못하였음이니라 그가 먹고 정신을 차리매” 했다. 성경에 나오는 무화과, 포도, 석류와 같은 작은 과일은 신선한 과일로 먹거나 음료, 케이크 등의 재료로 사용된다. 석류는 항염증, 항산화 및 항종양 특성을 가지고 있다. 미네랄과 비타민 A, K, E와 같은 비타민이 풍부한 무화과는 칼로리가 낮고 섬유질이 높다. 포도에는 대장암과 전립선암을 예방하고 뇌졸중 위험을 줄이는 것으로 알려진 강력한 항산화제인 레스베라트롤이 포함되어 있다. 석류, 무화과, 포도 등은 비타민과 미네랄이 풍부하기에 신선한 과일 그대로 혹은 건조시켜 간식으로 섭취하면 건강에 좋다.
<성경에 나오는 10가지 건강, 치유 식품들(1)> 7월 23일 2023년 하나님은 우리 몸을성령의전으로삼으시고 이를 귀중히 여기시고 건강하게 잘 유지하도록 꼭 필요한 식품들을 허락해 주셨다. 성경에 언급된 10가지 치유 식품들을 제시한다. 1. 생선이다. 레위기 11:9에 “물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너희가 먹을 만한 것은 이것이니 강과 바다와 다른 물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것은 너희가 먹되” 했다. 생선은 건강에 좋은 오메가-3 지방산을 함유하고 있다. 특히 연어, 청어, 송어, 고등어, 흰살 생선 등과 생선은 영양소와 단백질의 훌륭한 공급원이 된다. 미국 심장협회는 심장에 건강한 오메가-3 지방산을 일주일에 2회 정도 생선을 통해 섭취할 것을 권장한다. 2. 생 꿀이다. 마가복음 1장 6절에 “요한은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했는데 여기에 나오는 석청이 생 꿀이다. 생 꿀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귀중한 자산으로 영양이 풍부한 음식이다. 세례 요한은 광야생활을 하면서 야생 메뚜기와 꿀을 먹었다. 꿀은 항산화, 항진균 및 항균 특성으로 인해 종종 “액체 금”이라고 불리고 있다. 그것은 면역 체계를 강화하고, 인후통이나 기침을 진정시키고, 건조한 피부를 부드럽게 하고, 심지어 상처 치유를 돕는 데 사용된다. 또한 꿀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은유적 비유이기도 하다. 성경에서는 꿀이 달콤한 것처럼 하나님 말씀도 달다고 표현했다. 3. 올리브 유이다. 누가복음 10:34에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했다. 성서시대에 중동지역에는 올리브 나무가 참 많았다. 십자가 전날 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피와 땀을 흘리시면서 기도한 겟세마네 동산도 올리브가 가득한 동산이었다. 그린 올리브는 최고급 열매와 기름을 생산한다. 올리브 기름은 음식을 맛있게 절이고 양념을 만드는데 사용된다. 올리브 기름은 빵을 굽는데도 사용된다. 또한 약용으로 상처, 피부를 부드럽게 하는데 사용되었고 등불을 밝히는데도 사용되었다. 그리고 제사장, 선지자, 왕을 세우고 그들에게 신성한 기름을 부을 때 사용되었다. 올리브 유는 소화가 가장 잘 되는 지방 중 하나이며 신체 조직, 기관 및 뇌의 노화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되며 암, 심장병, 위궤양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한다.
<본질과 비본질> 7월 16일 2023년 견지망월(見肢忘月)이라는 말이 있다. ‘달을 보기 위해서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끝을 보지 말고,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달을 보라’는 것. 즉, 달을 보라고 했는데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 끝을 본다는 비유로 본질이나 더 중요한 것을 놓치고 대신 비본질 즉 덜 중요한 것에 매달리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어떤 일이나 사연에는 본질인 핵심 가치와 비본질인 주변 가치가 있다. 핵심 가치 (본질)를 놓치거나 잃어버리고 엉뚱한 일, 지엽적인 일에 매달리다 보면 일이 낭패를 겪거나 헛수고를 할 때가 있다. 사람은 마땅히 해야 되는 일을 하지 않으면 마땅히 해선 안 될 일을 하게 된다. 응당 있어야 될 곳에 있지 않으면 응당 있으면 안 될 곳에 서성거리게 된다. 해서 우리들은 본질과 비본질을 분별해야 하며 선후 완급을 챙겨야 한다. 먼저 할 일과 뒤에 할 일을 구분해야한다. 미국 윤리 신학자인 라인홀드 니이버는 이렇게 기도했다. “주여,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그대로 받아들이는 평화를 주시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신속히 행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시며, 이 둘 사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신앙생활에서도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신앙세계에서의 본질은 복음이다. 사탄은 광명한 천사의 탈을 쓰고 침투해 와 사람을 현혹시키고 복음의 광채를 흐리게 한다. 사탄은 복음이 아닌 지엽적인 것들로 성도들을 편가름 하며 믿음의 정수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성도들이 크게 다투고 갈라지는 것은 복음때문이 아닌 교리, 정치, 이념, 사상등 비 본질적 문제 때문이 아닌가? 이것들은 영생과 구원, 진리에관련없는주변가치들이다. 사도바울은 구원과 진리에 관계된 본질적인 부분을 다룰 때는 단호한 태도를 보이지만, 비본질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온화하게 다룬다. 비본질을 옳다 그르다 판단하고 주장하는 잘못을 범치 말고, 그리스도인의 신앙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근거한 본질과 비본질을 분별하는 지혜를 구해야겠다. 우리 모두 비본질로 인해 실족하거나 추락하지 말고 본질로 자신과 교회를 지키며 세워나가기를 기원한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에베소서 4:15)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7가지 표시> 7월 9일 2023년조셉 마데라 Joseph Mattera 1. 매일 하나님의 뜻에 머뭇거림 없이 순종한다.우리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기도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마태복음 26:39). 우리가 순종적인 자세로 하루를 시작할 때, 성령으로 우리를 채울 수 있는 기회를 주님께 드릴 수 있다. 2.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자 하는 온전한 결단에서 나오는 평안의 삶을 산다. 우리가 모든 면에서 주님을 알고자 하고 주님께 순종할 때, 평안 가운데 있게 된다. 매일 주님께 순종함으로 우리의 염려를 주님께 드릴 수 있고, 기도와 간구로 우리의 불안을 이길 수 있다.(빌립보서 4:6~7, 베드로전서 5:6). 3.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진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성도를 향한 주님의 명령이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 이라며 십자가가 성도와 관련되어 있음을 확증했다.(갈라디아서 2:19~20). 4. 선천적으로 갖춰진 능력을 넘어서 산다. 하나님은 첫 번째 언약에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분노하셨다.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했기 때문이다(시편 78:41).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할 때 자연적·이성적인 세계의 한계를 넘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으로 나아가게 된다. 5. 자신의 삶을 아끼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을 아끼지 않으려는 의지에 따라 거룩한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사도행전 20:22~24). 주님 향한 사랑과 사명의식이 온전한 충성을 가능케 한다. 6. 말뿐이 아니라 삶으로 증거한다. 우리가 주님과 온전히 연합할 때 살아있는 편지가 되고, 사람들은 우리의 말뿐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본받고 따르게 된다.(고린도전서 3:2~3, 디모데전서 2:10~14). 7. 열매를 많이 맺는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하나님 안에 거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생명과 성품을 닮기에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한복음 15:1~7). <기독자의 자유> 7월 2일 2023년 근대 인류의 역사는 ‘자유를 위한 투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을 위시해서 대한민국 3·1운동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봉건군주, 제국주의와 싸워 자유를 쟁취하여 왔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자유에 대해서 네 가지로 말했다. 어디에서나 말할 수 있는 자유, 어디에서나 예배할 수 있는 자유, 결핍으로부터 해방 받을 자유, 공포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을 자유 등이다. 헌데 이런 자유들을 모두 얻었다고 이제 나는 자유인이다 말할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자유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하나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이것은 소극적인 의미의 자유이다. 또 하나의 자유는 ‘무엇을 향한 자유’이다. ‘무엇을 향한 자유’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보다는 훨씬 더 적극적인 자유이다. 이 자유는 단순히 예속과 억압의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 자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바로 이런 자유, 즉 스스로 자유 할 수 있는 것이다. 참 자유는 기피하거나 도피하거나 해방되거나 포기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는게 아니라 진리를 통해 스스로 자유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누리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요 8장 34절에서 “죄를 범한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 따라서 어떤 사람도 예수님께서 그 죄의 짐을 벗기시지 않는 한 그는 참으로 자유 할 수가 없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으셨고, 그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셨다. 사망과 죄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은 모든 사람이 죄로부터 자유함을 누리도록 해주셨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 분 안에 ‘굳게 서야 할 뿐만 아니라 다시는 종의 멍에 메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유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유를 원하지만 스스로는 자유케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를 부르셨기 때문에 자유케 된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이 자유를 범죄하는 수단으로 사용치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섬기는 일에 써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 5:1~13).
목회칼럼 2023년 6월
<매사 최선다하자> 6월 25일 2023년 누구나 잘 살고 행복하기 위해 꿈꾸고 노력하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기대한 대로 행복을 이루며 사는 것은 아니다. 다른 이보다 열성다해 사는 사람일지라도 종종 아픔, 고통, 눈물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생명체로 태어나서 그럭저럭 살아갈 순 있지만 참으로 잘 산다고 인정받으며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헌데 다른 이들보다 유독 힘든 일에 종사함으로 생이 더욱 힘겹고 처량해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일명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런 일이라 하는 직업들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이들은 고속도로의 유기된 시체들을 치우는 사람들, 겨드랑이 및 각종 신체부위의 냄새를 테스트하는 사람들, 온갖 쓰레기 수거자들, 가공이건 자연산이건 각종 비료를 검사하는 사람들, 그리고 성인용품 공장의 공원들이다. 위의 직업군에 종사하는 사람들 중에는 자원해서 그 일을 감당하는 자가 있지만 대부분은 선택의 여지없이 그 일에 연루되었을 것이다. 그들이 남이 꺼려하는 힘들고 거친 일들을 하는 이유는 잘 살기 위해서이다. 하면 남들이 꺼려하는 어렵고 힘든 일에 도전하고 헌신한다고 바라고 꿈꾸는 수준만큼 잘 살수 있을까? 꼭 그렇지 않다. 하면 남보다 쉬운 일에 종사한다고 열매가 더 맺어지고 행복도 배가 될까? 그것도 그렇지 않다. 실상, 세상에는 쉬운 일이 없다. 행복과 성공, 만족과 기쁨에 도달하기 위해서 결코 간편함, 쉬움, 녹록함같은 것은 없다. 아니 인생자체가 쉬운 것이 아니다. 인생과 삶은 시와 문학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감상이 아니다. 인생은 살아가면서 어쩌다 대박도 터지고 복덩이도 굴러오고 복권도 당첨되는 요행수가 아니다. 또한 인생은 노력을 다해도 그 결과를 예상대로 보장받을 수 없는 예측불허이다. 불행한 사건, 사고에 연루된 사람들은 우리보다 땀과 눈물을 적게 흘렸을까? 그들에게 남을 웃기고 울릴만큼의 감동스런 행동들이 없었을까? 때때로 인생은 해석하기가 참 난해하다. 우리 인생을 판단하시고 결실맺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 이시다. 우리들은 범사를 주님 손에 맡기고 소망을 갖고 주어진 일에 노력하고 헌신해야 한다. 힘들다고 포기해서도 안되고, 안된다고 자포자기해서도 안된다. 우리의 사명은 결과를 그분께 맡기고 위탁된 일을 충실히 행하는 것이다. 교회 일이건, 가정 일이건, 사회 일이건 범사에 주님 뜻안에서 최선다하는 것이다. 최후승리는 분명 그런 자에게 돌아간다. <기도 - 하늘 언어> 6월 18일 2023년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관계를 위한 언어를 배우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었다면 그 나라의 모국어를 배우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그 모국어가 바로 기도입니다. 마틴 루터는 “믿음이란 한 마디로 기도다”라고 말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사귐과 대화입니다. 비록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한다 할지라도 신비한 방식으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삶의 길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지금 이곳에서 대화하듯 드리는 기도가 가능합니다. 이런 사귐의 기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하고 평강과 안식을 경험하게 하며, 우리 자신이 변화되는 은혜를 덫입게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씨름이기도 합니다. 즉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강청하는 호소입니다. 사귐의 기도는 조용한 묵상과 잔잔한 대화의 형태를 지닌다면, 씨름의 기도는 외치고 부르짖는 간구의 형태를 지닙니다. 사귐의 기도는 기도자의 내적 평안과 내적 변화가 목표이며, 씨름의 기도는 이 세상의 변화와 땅 위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사귐의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 이름의 임재 안으로 기도자가 들어가는 것이며, 씨름의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세상을 향하여 선포함으로 세상의 문제 속으로 들어갑니다. 우리는 조용한 묵상의 기도를 통해서 내적 변화와 평강을, 또한 간절한 씨름의 기도로 외적 세상의 변화와 변혁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귐과 씨름의 기도 속에는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 자기 일만이 아닌 세상의 일을 위한 기도 내용이 포함됩니다. 이런 기도를 두고 중보기도 혹은 ‘도고기도’라고(예수님만이 중보 자이기 때문에) 합니다. 이렇게 남과 세상을 위해 드리는 기도를 예수님께서 기쁘게 받으십니다. 그 속에는 사랑이 담겨 있기때문입니다. 외국어 하나를 구사만 해도 유익이 대단하다면, 기도의 언어를 잘 사용한다면 그 유익은 어떠할까요? 기도의 언어를 배우는 우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아름다운 관계> 6월 11일 2023년 사람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공동체에 소속되어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고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다. 심리학자 매슬로우는 이를 소속및 애정욕구라 칭했다. 소속에의 욕구는 창조질서에 속한다. 하나님은 아담을 만드신 후 그가 독처하는 것을 좋지 않게 보시고 돕는 배필로 하와를 만드셨다. 돕는 배필이란 한 사회에 소속되어 사랑하고 섬기고 함께 일을 도모하는 사회적 존재라는 뜻이다.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생이 평안, 행복해진다. 삶의 의미도 증폭된다. 성경은 행복에 이르는 비결중 하나를 시편 34:12-14의 질문과 대답을 통해 제시한다. 12절에서 시인은 ‘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복받길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묻는다. 그 답으로 14절에서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는 것’이라 말한다. 즉 선행과 좋은 관계가 행복의 비결이라는 것이다. 미국 대기업들은 신입사원 선발시 실력 외에 공동체 일원으로서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만들어 가는 능력, 즉 인간성과 공감능력도 고려한다. 또한 좋은 관계는 예배를 주님께 열납되게 한다. 주님은 ‘형제에게 원망들을 일이 있거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후에 와서 예물드리라’ 하셨다. 은혜롭고 아름다운 교회는 하나님을 잘 믿고 성경대로 사역하는 교회, 지체들간 영혼의 소통이 있고 화평한 관계가 유지되는 교회이다. 주후 100년경 안디옥 교회는 사도, 선지자, 교사, 유대인, 이방인, 왕족, 노예, 흑인등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세상적 기준으로는 융화하기 힘든 교회였다. 헌데 그들은 마음을 연합하여 말씀을 연구하고 금식하며 주님을 섬겼다. 선교사도 파송했다. 정말로 멋진 교회다운 교회였다. 하나님은 모두가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길 바라신다. 부르심을 받은대로 온유와 겸손과 오래참음으로 옷입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화목과 하나됨을 위해 힘쓰자. 주님께서는 우리로 아름다운 사이가 되게 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셨다.
<하늘은행에 송금하라> 6월 4일 2023년 죄로 얼룩진 현세 세상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를 드러냄에 있어서, 또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하고 주변의 불쌍한 이웃들을 향한 기독자로서의 사랑과 섬김을 측정함에 있어서 가장 확실한 것은 돈과 소유, 시간에 대한 태도를 살펴보는 것이다. 모두에게 시간만큼 소중한 것은 없으며 물질세상에서 재물만큼 필요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소유와 시간의 범주에서 벗어날 존재는 하나님과 그가 부리시는 영들 뿐이다. 세상은 얼마나 많이 소유하고 있느냐를 사람들에게 묻고 그것을 성공과 행복의 근거로 삼으려 한다. 헌데 주님은 재물의 축척, 쌓음을 물으시는게 아니라 그것을 얼마나 잘 사용하느냐를 물으신다. 세상적 관심은 주로 받는데 있다. 헌데 주님의 관심은 주고 나누는데 있다. 세상의 관심은 크기, 규모, 양에 있지만 그리스도의 관심은 동기에 있다. 선하고 아름다운 동기말이다. 사람들은 손에 쥔 것이 어느 정도인지를 살펴보지만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남에게 준 것이 어느 정도인지를 헤아리는 것이다. 돈은 불신자들에게는 만족을 얻는 절대 수단이지만, 신자들에게는 은혜의 통로이다. 물론 믿는 이라 해서 재물을 무시하거나 경시해선 안된다. 물질의 축복도 있기 때문이다. 재물은 중립가치로 사용하는 이의 자세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 기독자들은 재물을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장을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 좀 타산적인 표현을 쓰자면, 나중에 우리가 하늘나라에 갈 때 거기에 반드시 우리를 맞아 줄 친구들이 있도록 해야만 한다. 우리가 하늘 문에 들어설 때 거기서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는 무리들- 즉 전에 환자였던 사람들, 영혼이 곤고했던 사람들, 어린아이들및 노약자들이 하늘나라에 가 있는 것은 바로 우리가 재물을 그들을 위해서 지혜롭게 사용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헌신 중에 드린 돈이 이 환영하는 무리의 모임을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이 땅의 돈을 하늘은행에 송금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 이는 자신의 돈으로 사려깊고 지혜롭게 어려운 사람들을 섬기고 헌신하는 것이다. 죽을 때 입는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어 돈을 하늘에 가지고 가지 못하지만 이를 미리 하늘에 보내는 방법이 있으니, 바로 주님과 남을 위해 선용하는 것이다.
목회칼럼 2023년 5월
<성령의 역사> 5월 28일 2023년 “나, 오늘 당신과 함께 교회에 가려고 하는데.” 남편으로부터 이 말을 들은 그리스도인 아내는 깜짝 놀랐으나. 그가 그렇게 하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 내심으로 매우기뻐하였다. 항상 사업과 돈버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는 나머지 영적인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처럼 보였던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교회에 가는 길에, 그리스도인 아내는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기 시작하였다. “오늘 설교는 무엇에 관한 것일까?” “성경 말씀은 어디일까?” “교회력에 의하면 오늘은 무슨 주일일까? 어쩌면 오늘은 불길한 일요일 일지도 몰라.” 교회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예배 순서를 얼핏 보고 낙심하였다. 설교본문 말씀이 창세기 5장이었던 것이다. 남편은 설교가 시작해 끝날 때까지 가만히 앉아서 고대인들의 이름이 적힌 긴 목록, 그것도 누가 누구를 낳고 몇 살을 살고 죽었다더라는 현실생활과는 관계없는 이야기를 지루하게 들어야할 것이다. 더군다나 보통 사람의 눈으로 읽을때 창세기 5장에는 진지한 복음의 내용및 삶에의 적용이 거의 없지 아니한가? 헌데 하나님은 그날 당신께서 수행하실 계획이 있으셨고, 그래서 남편을 예배에 참석케 하셨고 또한 아내의 염려도 기우에 불과했음을 알게 하셨다. 남편을 향한 성령의 역사를 누구도 막거나 방해하지 못했다. 남편은 일견 지루하게 들릴 수도 있을 설교를 큰 관심을 갖고 경청했고 예배 시간이 끝나기까지 경건하게 예배에 임했다. 그리고 몇 주일 후, 그는 그리스도께로 돌아왔다. 그녀는 남편에게 그리스도인이 되는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만든 것이 무엇이었냐고 물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창세기에 나오는 그 말씀이지. 한 구절이 계속 반복되는데, 나는 그것을 피해 달아날 수가 없었소. 그 “죽었더라”는 문구말이오. 그후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소. 그래서 나에게 구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인생의 삶과 죽음의 과정을 섭리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교회들이여> 5월 21일 2023년 현대 교회가 많이 흔들리고 휘청거린다. 교리적 분열과 갈등, 세속적 대형화, 목사직의 세습화, 물질주의, 상업주의, 정치세력에의 편승등으로 안티 기독교인들,가나안 교인들이 급속히 증가하면서 존귀함의 대상에서 조롱과 멸시의 대상으로 전락해 가고있다. 한 통계는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를 17.6%로 명시했다. 그럼에도 교회는 여전히 모든 이들의 희망이며 기대이다. 인간적 소망의 불씨가 꺼지고 세상적 기대가 무산되었어도 교회는 세상의 유일한 대안이다. 그 이유들이 있다. 교회에는 주님 이름이 있고, 그분 영광이 있고, 하나님말씀이 있고, 예수님이 머리로 존재하시고, 하늘의 신령한 축복과 선물이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의 빛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빛을 발할 수 없다. 교회만이 세상을 비추는 유일한 빛이다. 세상은 교회를 닮아간다. 세상이 타락해서 교회가 타락하는게 아니라 교회가 타락하기에 세상도 혼탁해진다. 소돔과 고모라성은 악인때문이 아니라 소수의 의인이 없어서 망했다. 거룩하고 의로워야 할 교회가 의롭지 못하면 세상은 대부분 불의해진다. 교회는 특유의 교회다운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 예배, 말씀, 기도, 찬양, 전도등에 주력해야 한다. 이런 영성활동을 위해 교회는 존재한다. 주의 일에의 열정을 회복해야 한다. 교회는 세상원리를 좇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위탁하시고 당부하신 주의 일들에 헌신해야 한다. 교회는 상처받고 아파하는 이웃, 세상을 사랑으로 섬겨야한다. 사랑해야 참 제자로 인정받는다. 세속화의 물결에 흽쓸려 본연의 모습을 잃어가는 교회를 목도하면서 이렇게 기도한다. “모든 교회들이 주님께서 세우실 때의 거룩함, 사랑, 사명열정으로 되돌아가게 하소서 !”
<부모 효도 10계>5월 14일 2023년 1. 부모님과 가능한 많은 대화를 나누십시오. 부모는 자식과 대화의 시간을 가장 즐거워하십니다. 2. 부모님께 일감을 드리십시오. 효도란 부모님을 방구석에 가만히 모셔만 놓는 것이 아닙니다. 3. 부모님도 취미를 가지시도록 도와 드리십시오. 사회에서나 교회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즐길 수 있도록 하십시오. 4. 여행의 기회를 드리십시오. 노인은 새로운 분위기와 경험을 즐기십니다. 5. 부모님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십시오. 연세가 드시면 기억력도 쇠약해지고 마음도 소심해지고, 잔소리도 늘게 되고, 공연한 고집도 부릴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파악하고 이해하십시오. 6. 가족끼리 외출할 때 부모님도 종종 모시고 가도록 노력하십시오. 자녀들만 데리고 나가는 아들과 며느리에 대해 섭섭함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7. 집에 손님이 오면 부모님께 먼저 인사드리도록 한 후 대화를 나누십시오. 이런 예법을 어린 손자 손녀들에게 가르치십시오. 8. 사소한 병이라도 나시면 꼭 병원으로 모시고 가십시오. 연세가 드실수록 생명에 대한 애착, 건강에 대한 근심이 더 많아집니다. 9. 매월 일정한 용돈을 드리십시오. 부모님의 이름으로 통장이라도 만들어 드리시면 더욱 좋아하실 것입니다. 10. 부모님께 신앙의 기회를 드리십시오. 천국의 안내자가 될 때 가장 큰 효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5월 7일 2023년 나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습니다. 나는 우리 가족을 언제라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하나가 나에게 얼마나 큰 기쁨인 줄 이제야 알았습니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습니다. 나는 우리 가족과 언제라도 전화를 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가 나에게 얼마나 큰 즐거움인 줄 이제야 알았습니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습니다. 내가 우리 가족 중 한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면 곧 답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하나가 나에게 얼마나 큰 위로인 줄 이제야 알았습니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습니다. 나는 우리 가족에게 언제라도 선물을 보낼 수 있습니다. 이 하나만으로도 내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 줄 이제야 알았습니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습니다. 나는 우리 가족과 언제라도 같이 식사를 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만으로도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 줄 이제야 알았습니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습니다. 나는 우리 가족에게 나의 아픔을 낱낱이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만으로도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 줄 이제야 알았습니다. -정용철·시인-
목회칼럼 2023년 4월
<인생의 깊이>4월 30일 2023년 물체간의 거리는 인간이 만든 최첨단 과학 장비 및 기계를 사용해 측정한다. 바다 깊이는 음향측심기라는 장비를 이용하여 초음파를 쏘아댐으로 측정하며, 우주간의 거리는 연주시차법, 세페이드 변광성의 주기, 허블의 법칙등으로 잴수 있다. 헌데 인생의 깊이는 그 어떤 장치를 동원해도 측정불가이다. 그것은 현상적으로 측정할수 있는 물리적 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지식 정보 수양을 통해서도, 오감과 느낌을 통해서도 그 깊이를 알수 없다. 인생의 깊이는 밑바닥까지 스스로 가보기 전에는 결코 알수 없다. 밑바닥까지 가는 길은 기도하는 것이다. 진실한 기도는 내면의 깊숙한 곳에 도달하여 그곳의 실체를 드러낸다. 그곳에 웅크린채 생을 어지럽게 만드는 수치, 비밀, 탐욕, 교만, 욕망등을 보게 하여 그것들을 벗고 버리게 한다. 또 그곳에 주님께서 심어주신 믿음, 꿈, 소망등을 보게 하여 그것들을 키워가고 자라가게 만든다. 기도할 때 주님께서 그렇게 역사하신다.기도하는 자는 심연까지 내려갔기에 삶에 깊이가 있다. 무게감도 있다. 그는 요동치는 상황에서도 넘어지거나 자포자기 하지 않는다. 보이는 것들로 쉽게 행복해 하고 쉽게 불행해 하지 않는다. 기도하는 자는 인생의 깊은 의미를 안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안다. 즉 존재의식, 목적의식, 사명의식을 깨닫는다. 깊음의 근원, 그곳은 기도를 통해서 추적된다. 외연확장, 외부와의 소통도 귀하지만 기도중 내면과의 소통은 더욱 중요하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삼상12:23)
<하나님의 은혜> 4월 23일 2023년 로마의 황제가 한 원로원의 집에 만찬초대를 받았다. 그의 집에 도착했을 때 많은 종들이 황제를 위한 음식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모두가 긴장한채 음식을 장만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나이든 종이 정신 없이 일하다가 응접실에 놓여 있는 값비싼 도자기 하나를 깨뜨리고 말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실수였다. 그 광경을 목도한 집 주인은 화가 치밀어 그 종을 끌어내어 집 뜰에 있는 연못 속에 집어 넣으라고 하였다. 그 연못에는 무시무시한 악어들이 살고 있었다. 종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용서를 구했으나 주인은 완강하였다. 그집 가보를 깨뜨리는 사람은 누구든 악어의 밥이 되게 하는 것이 그 집에서 정해놓은 규례이고 또한 그런 일이 예전에 이미 있었기 떄문이다. 만찬 분위기가 서늘해진 것을 느낀 황제가 집 주인에게 도자기를 깨뜨린 종을 용서해 줄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자기 집의 가율이라는 명분으로 용서할 수 없음을 고했다. 종을 살릴 방도가 없어지자 황제는 그 집안에 있는 또 다른 도자기를 일부러 깨뜨렸다. 그리고는 주인에게 말했다. “이보시오. 나도 당신 집의 가보를 깨뜨렸으니 당신의 가율에 따라 저 종과 함께 연못 속에 던져 나를 죽이시오!” 그러자 그 원로원은 심히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자신의 가보를 깨뜨렸다고 해도 신하로서 황제를 벌하고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 원로원은 할수 없이 그 종을 용서해줄 수 밖에 없었다. 이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연상 시킨다. 이 세상에서 구약의 법, 즉 율법대로 따져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선행과 공적에 따라 구원 얻을 이는 한 사람도 없다. 누구이던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같이 되시고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셔서 우리로 죄사함을 얻고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은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우리들은 은혜로 구원을 얻고 늘 주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간다. 주의 은혜를 주변사람들에게 전하고 나누며, 은혜를 갚는 마음으로 주의 일에 헌신하는 우리 모두이길 기원한다.
<고노스케의 마음가짐>4월 16일 2023년 마쓰시다 고노스케는 94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하기까지 570개의 기업과 13만 여명을 거느린 자수성가한 기업 총수였다. 그는 “가난한 것”, “허약한 것”, “못배운 것” 세가지를 하늘로부터 받은 큰 축복이라고 했다. 가난했기에 부지런히 일하지 않고는 잘 살수 없다는 것을 배웠고, 약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건강의 소중함을 일찍이 깨달았고 건강에 힘썼기에 늙어서도 30대의 체력을 유지할수 있었으며, 배움이 짧았기에 모든 사람을 스승으로 받아들여 지식과 상식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장애물이라 생각했던 것들을 멋지게 디딤돌로 바꾸었다. 그에게는 평생 지키고자 했던 마음가짐이 있었고 그런 마음으로 살았다. 1) 물욕이 없는 마음으로 물욕이 없으면 몸이 넉넉해진다. 2) 교만이 없는 마음으로 교만이 없으면 사랑의 마음이 생긴다. 3) 욕심이 없는 마음으로 욕심이 없으면 의리를 지킨다. 4) 사욕이 없는 마음으로 사욕이 없으면 남을 의심하지 않는다. 5) 자만심이 없는 마음으로 자만심이 없으면 남을 공경한다. 6) 허물이 없는 마음으로 허물이 없으면 남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7) 탐욕이 없는 마음으로 탐욕이 없으면 남에게 아첨하지 않는다. 8) 분노가 없는 마음으로 분노가 없으면 말이 부드러워진다. 9) 조급하지 않는 마음으로 조급성이 없으면 일이 원만해진다. 10) 어둠이 없는 마음으로 어둠이 없으면 심령이 고요해진다. 11) 두려움이 없는 마음으로 두려움이 없으면 후회하지 않는다. 12) 미혹함이 없는 마음으로 미혹함이 없으면 남을 탓하지 않는다. 고노스케는 일생내내 마음관리를 잘함으로 성공적인 생을 살았다. 올바른 인생의 길잡이는 마음에 달려있다. 마음을 지키는 것이 관건이다. 잠 4:23에 ‘모든 무릇 지킬만한 것중에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했다. 마음의 어둠이 드리우지 않도록 매일매일 성령 안에서 바른마음 옳은마음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살아가시길 바란다.
<엠마오 도상의 그리스도> 4월 9일 2023년 부활절이 오면 많이 인용되는 ‘엠마오 도상의 그리스도’라는 유명한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은 네덜란드의 출신 화가 렘브란트(REMBRANDT)의 작품이다. 이 시대 위대한 영성학자인 헨리 나우 엔은 이 그림을 묵상하면서 ‘탕자의 귀향’이란 책을 썼고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렘브란트는 탁월한 그림 솜씨로 많은 돈을 벌면서 부유하고 행복한 삶을 살았다. 헌데 그런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갑자기 깨지고 말았다. 사랑하는 아내가 일찍 죽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내의 죽음으로 절망에 빠진채 붓을 던져 버리고 그림을 포기했다. 자신마저 거의 포기상태에 이르렀다. 이렇게 절망과 좌절의 삶을 삶을 살아가는 렘브란트에게 어느날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셨다. 그때 그는 죽음이 인생의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새 믿음을 가지고 희망 중에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그때 그린 그림이 바로 ‘엠마오 도상의 그리스도’이다. 예수님 죽음으로 절망에 빠져 있는 두 제자를 찾아오시며 동행하시며 만찬까지 함께 하시는 주님의 모습에 렘브란트는 큰 은혜를 받고 영감을 얻어 그림을 그렸다. ‘엠마오 도상의 그리스도’ 작품은 현재 암스테르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람들이 그 그림의 가격을 물어 보았을때 렘브란트는 ‘아내의 죽음을 통해 주님을 만났고 생명이 무엇인지 깨달아 그린 그림이니 값을 칠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는 “나는 위대한 생명의 비밀을 깨닫고서야 이 그림을 그릴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렘브란트는 육신적으로 풍요롭고 행복하다고 여길 때는 주님을 만나지 못했지만 아내를 잃고 인생의 허무함과 좌절을 느끼는 길목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은 어떤 절박한 환경에서도 절망하지 않는다. 도종환 시인의 시귀처럼 흔들리면서 피지 않는 꽃이 어디 있으며 젖지 않고 자란 줄기가 없듯이 성도들은 세상에서 흔들리고 젖으면서도 절대로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독수리처럼 매일매일 새 힘을 얻는다. 주님과 동행하면 날아가도 곤비치 아니하며 걸어가도 피곤하지 않다. 주님께서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려 부활하셨다!
<십자가 길로의 초대> 4월 2일 2023년 우리는 강해 보이길 원합니다. 그리고 그 강함의 증거로 세상에서 잘 나가는 모습만 보여주길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와는 정반대로 사셨습니다. 욕을 먹고 오해를 받으며 심지어 ‘패배자’라고 조롱 당하셨습니다. 그분이 택하신 길은 타락한 세상의 길과 달랐습니다. 가장 매혹적인 힘과 세속적 번영의 우상을 버리고 십자가의 예수님과 함께할 때, 우리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의 삶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힘의 길에서 떠나 미련해 보이는 십자가 길을 함께 걷자고 초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과 동행하는 걸음걸음에 하늘의 능력과 지혜가 부어집니다. -러셀 무어-
목회칼럼 2023년 3월
<신곡> 2023년 3월26일 중세기 이탈리아 산중 높은 곳에 위치한 어느 수도원에 이른 아침부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사제가 나가보니 무척 피곤에 지쳐 보이는 중년의 사내였는데 그는 아마 밤새 산을 오른 것 같아 보였다. 사제는 문을 열어주며 물었다. "누구를 찾아 오셨나요?" 중년의 사내는 힘겹게 숨을 토해내며 말했다. ‘예, 저는 평화를 찾습니다.’ 이 사람이 그 유명한 「신곡」의 저자 단테(Dante Allighieri)였다. 수도원의 문을 두드리며 마음의 평화를 구하고 있었던 때, 그의 나이는 40에 접어들고 있었다. 당시 그는 중년기의 방황을 경험하고 있었다. 마치 어두운 숲속에 던져진 외로운 참새와 같은 처지의 영혼이 된 것이다. 단테는 20대에 사랑의 실패를 경험하고, 30대에는 고향 피렌체에서 정치에 입문했다가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향에서 쫓겨났다. 그는 40대에 접어들면서 갈데없는 영혼의 방랑자가 된 것이다. 헌데 그후 영혼의 힘을 되찾고 나이 43세가 되던 해 붓을 들어 13년간에 걸쳐 책을 썼는데 그 책이 신곡(Divine Comedy)이다. 단테가 책 제목을 이렇게 붙인 것은 인생은 더 이상 비극이 아니라 위대한 희극, 기쁨과 평화의 서사시인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신곡은 이런 말로 시작된다. ‘내 인생의 한 중간 눈을 떠보니 나는 바른 길을 벗어나 어두운 숲속에 있었다.’ 그리고 이런 말로 끝맺는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자유하다. 나는 참으로 완벽하게 고요한 평화를 맛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한 평화의 시작이었다.’ 이 말은 단순히 <신곡>이란 책의 시작과 마지막을 수식한 표현만이 아니라 단테 자신의 고백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건강하고 행복한 삶이 어디에 있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데 그것은 영혼의 평안함이다. 찬송가 413장 작시자는 이렇게 영혼의 평안을 노래한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던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참된 평안은 오직 예수 안에서 거할때 주어진다. 주님과 함께 그 어디나 하늘나라이다.
<십자가의 무게> 2023년 3월 19일 30년 동안 연극에서 예수의 역할을 맡은 안톤 레이지라는 유명한 배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모든 카메라 장비를 짊어진 어느 부부가 여행 중에 안톤 레이지의 연극을 관람하게 되었다. 연극 관람 중에 부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들어 옮기는 자기 남편의 사진을 찍을 수 있다면 보기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점심시간에 부부가 무대에 접근했고 남편은 십자가가 있는 곳으로 갔다. 부인은 스텝 진들의 허락을 받고 십자가를 들어올리는 남편의 모습을 사진에 담으려 했다. 그런데 남편이 십자가를 들어 올리려고 필사적으로 힘썼지만 결국 그 십자가를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그가 십자가를 가지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동안 배우 안톤 레인지가 가까이 다가왔다. 부부는 그에게 “이것은 단지 연극일터인데 당신은 왜 사람이 들어올리지 못할 정도로 무거운 십자가를 사용합니까?”라고 물었다. 그 배우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만일 내가 십자가의 무게를 느끼지 않는다면 내 역할을 결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신앙생활이 그와 같다. 믿음 생활은 십자가의 무게를 느끼며 그것을 스스로 지는 과정이다. 십자가를 들어올려 그것을 지는 일에 아무런 무게를 느끼지않는다면 그것은 참 믿음, 참 십자가가 아니다. 십자가 지는 일에 그 어떤 댓가도 치르지 않는다면, 그 일에 자신의 수고와 땀과 피를 쏟지 아니하고 고통과 아픔을 느끼지 않는다면 자신은 십자가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만일 내가 그 무게를 느끼지 않는다면 연극일지라도 내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라고 말한 안톤 레이지의 고백이 우리 기독자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믿음의 의미이며 가치이다. 참 십자가는 장식구나 장식품처럼 가볍거나 화려하지 않다. 십자가는 늘 묵직하며 진중하다. 그것은 지는 사람에게 큰 짐이다. 338장 찬송가 작사가는 ‘십자가 짐같은 고생이나’했다. 십자가는 큰 짐이기에 그것을 질때는 다른 것을 겸해 질수 없다. 해서 십자가 지는 것은 다른 것은 내려 놓아야 하는 희생이다. 신앙여정에 희생이 없다면 그것은 우리의 손과 하나님의 손에 먼지와 재로 돌아올 것이다. 반면에 십자가 이후에는 주님이 주시는 영광이 있다.
<십자가 다리> 2023년 3월 12일 여러차례 강도 상해 죄를 저지른 두 명의 범죄자들이 한 은둔자의 도움으로 회개하게 되었다. 그 두사람은 은둔자에게 자신들의 모든 죄를 고백하고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은둔자는 그들에게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성지순례를 할 것을 권했다. 두 사람은 곧 커다란 십자가를 만들어 길을 떠났다. 처음에는 모든 일이 순조로워 있다. 십자가의 무게가 대단했지만, 아직 그 정도를 짊어질 힘은 충분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어깨가 붓고 저려왔다. 이에 두 사람은 무거운 십자가를 변형시킬 생각을 해냈다. 그들은 어느 마을 목공소로 들어갔다. 한 사람은 십자가의 긴 쪽을 잘라냈다. 그리곤 "자 이제 훨씬 짧아 졌지만, 그래도 이것도 분명 십자가이지" 라고 말했다. 또 한 사람은 십자가의 두께를 반으로 쪼개어 두 개의 십자가를 만들더니 그중에 하나를 바닥에 내려 버렸다. "자, 이제 훨씬 가벼워졌지만, 그래도 엄연한 십자가지" 두 사람은 이제 한결 편해졌다.그들은 가볍고 짧아진 십자가를 지고 사막 길에 들어섰다. 헌데 그곳에서 사정은 또 다시 악화되었다. 그들은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 사흘 동안 사막을 헤매었다. 나흘째 되던 날, 그들은 저 멀리 지평선 너머 도시를 발견하고는 기뻐 어쩔줄 몰라 했다. 그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빠른 걸음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저녁 무렵이 되었을 때, 그들은 예기치 않은 장애물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 앞에 깊은 골이 패어져 있는 것이었다. 헌데 그 골을 건널 만한 다리가 아무 데도 없었다. 한 사람이 방법을 생각해 냈다. "우리 십자가로 임시 다리를 놓읍시다." 그러나 한 사람의 십자가는 길이가 너무 짧았고 또 한사람의 십자가는 길이는 맞았지만 두께가 너무 얇아 약했다. 결국 그들은 다리를 건너지 못한채 도시를 바라만 보면서 굶어 죽고 말았다. 믿음 생활은 제 십자가를 지고 하늘도성을 향해 순례하는 과정이다. 헌데 우리들은 때때로 십자가의 무게를 감당키 힘들어 하면서 십자가의 무게와 길이를 줄이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이런 유혹을 받을 때마다 주님십자가를 생각하자. 주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를 결코 가볍게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죽음의 순간까지 자신의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셨다.
<사순절 보내기> 2023년 3월 5일 사순절은 자신의 삶과 믿음에 대한 성찰의 시간이며, 주님 십자가를 깊이 음미하고 제 십자가를 결단하면서 주님과의 깊은 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 절기이다. 이 거룩한 절기를 의미있고 뜻있게 보내기 위한 몇가지 제안들을 제시한다. 1. 용서 구하기 사순절은 회개의 절기이다. 이절기에 우리들은 주님 뜻대로 살지 못했음을 회개하고 또한 형제 자매, 이웃들에게도 원망 들을만한 행위가 있었음을 회개해야 한다. 2. 친절 베풀기 다른 이들을 친절과 온유함으로 대할때 예수님의 마음에 참여케 된다. 예수님은 사역기간 중에 자신에게 다가온 남녀노소 모든 이들을 사람과 친절로 대하셨다. 3. 성경책 한권 깊이 묵상하기 66권의 성경중 책 하나를 택해 정독하고 묵상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이는 개인 경건시간의 질을 높일수 있는 훌륭한 방법이며 말씀에 깊이 몰입할수 있는 비결이다. 4. 도움 필요한 이들을 돕기 참여하고 싶은 기관이나 단체를 찾아보고 자신의 상황에 맞게끔 사순절기간 내내 봉사활동에 참여해 보시라. 하면 섬기기 위해 오신 주님을 십분 이해하게 될 것이다. 5. 외로운 이들을 방문하기 투병중에 있는 이들, 독거노인, 홀로된 이들, 대화나누길 바라는 이들을 방문하여 기도해 주고 함께 울고 함께 웃어준다면 그만큼 삶의 자리가 밝고 따스해 질 것이다. 6. 만나는 이에게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말하기 사람들이 가장 듣기 바라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이다. 쑥스럼을 이겨내고 사순절 동안 식구들, 친구들, 지인 모두에게 최소한 한번씩은 “사랑해"라고 말해 보자. 7. 작은 잔치베풀기 성경은 하늘나라를 잔치에 비유한다. 이웃과 지인들을 위해 요리를 준비하여 그들과 함께 즐기면서 서로 힘이 되고 위로 받는다면 그것이 하나님나라의 잔치인 셈이다.
이외에도 사순절을 뜻있게 보내는 방법은 많다. 자신에게 맞는 것을 찾아 행함으로 이번 사순절기가 더욱 경건하고 복되길 바란다.
목회칼럼 2023년 2월
<기도란> 2023년 2월 26일 “사랑하는 하나님, 제 침묵 속에 부드럽게 말씀하소서, 밖으로 제 주변의 시끄러운 소리와 안으로 제 두려움의 시끄러운 소리가 끊임없이 저를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때도, 주님 음성이 제 귀에 들리지 않을 때도, 주님이 여전히 제 곁에 계심을 믿게 하소서. 주님의 작고 부드러운 음성을 듣는 귀를 주소서. ‘무거운 짐 진 자여,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그 사랑의 음성이 제 길잡이가 되게 하소서” 아멘. 이는 영성 신학자인 헨리 나우웬의 기도문이다. 기도는 단순히 그리스도인의 하루 일과의 필수요소나 어려울 때 도움의 출처가 아니다. 주일아침이나 식사시간에 국한된 것도 아니다. 기도는 삶이다. 기도는 먹고 마시는 것, 움직이고 쉬는 것, 가르치고 배우는 것, 놀고 일하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 스며든다. 기도는 우리가 있는 곳에 하나님도 함께 계시다는 끊임없는 인식이다. 그 분은 좀 더 가까이 와서 당신이 주신 삶의 선물을 마음껏 누리라고 언제나 우리를 부르신다. 기도는 하면 할수록 더 하고 싶은 갈망이 생긴다. 기도의 삶을 살면 하나님과 단둘이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 갈망이 점점 커진다. 이는 기도없는 사람들의 생각과 정반대이다. ‘내 삶이 곧 기도니까 굳이 따로 기도할 필요가 없다’가 아니다. 반대로 하나님과 단둘이 시간을 보내며 기도하고 싶은 갈망은 늘 더 커지는 법이다. 기도는 우리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그분께 발돋음 하게 만든다. 진심의 기도는 우리를 자기 집착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기도야말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하여금 내 존재의 구석구석에 파고들게 하는 길이며 힘이다.
<사순절> 2023년 2월19일 처처에 충만한 봄 생명과 기운을 즐기면서 계절의 은총을 주신 주님을 향한 감사가 우러나온다. 또한 벌써 이렇게 됐네 하면서 느끼는 세월의 속도에 대한 아쉬움도 베어나온다. 벌써 2월 말에 접어들었다. 세월을 아끼며 살아야겠다. 이번 수요일 (22일)은 사순절을 시작하는 재의 날이다. 재의 날은 주님뜻대로 살지 못한 죄를 각성하면서 재를 이마에 뿌리고 참회의 기도를 드리는 날이다. 이날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주셨습니다’라고 인도자가 선포하면 기도참여자들은 ‘주여, 나의 참회를 받아주소서’라고 고백한다. 이 짧은 기도시간에 참여자들은 하나님앞에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 것을 결단하고 다짐한다. 재의 날로부터 부활절 직전까지 주일을 뺀 40일 간을 사순절이라 부른다. 사순절은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되새기며 경건훈련과 영성생활, 절제에 힘쓰는 거룩한 절기이다. 물론 성도는 늘상 경건의 사람이어야 하지만 특히 사순절에는 더욱 주님을 닮은 거룩성에 힘써야 한다. 사순절기에 거룩을 회복해야 할 이유들이 있다. 이 시대가 거짓 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참과 거짓이 구별이 모호하고 선과 악의 경계가 흐릿해졌다. 복음의 본질이 호도되었고 구원의 핵심도 희미해졌다. 뉴에이지, 초월명상등 인위적인 유사 영성이 각광받고 있다. 많은 스크린, 문학, 음악의 내용들에 거짓 영들이 스며들어 있다. 이런 시대에 참 영성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 십자가와 부활의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이 성도로서 가야 할 방향이고 본질의 회복이다. 또한 이 시대는 너무나 관능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인터넷과 미디어를 위시, 매체들은 경쟁하듯이 쾌락을 부추긴다. 예전 은밀하게 성행하던 관능주의가 이제는 버젓이 안방까지 침투, 사람들을 정욕의 노예로 만들고 있다. 부도덕한 성적타락으로 가정이 망가지고 청소년들의 장래가 흐려지고 사회가 혼란스럽다.이런 시대를 치유하기 위해선 복음과 십자가로 돌아가야 한다. 말씀과 기도가 거룩성을 회복시키며 영혼을 살린다. 그리고 이 시대는 물질 만능시대이기 때문이다. 물질로 삶을 판단하고 심지어는 인격까지 가늠한다. 물질적 부로 로 성공, 행복을 논한다. 우리들은 물질 중심에서 영혼 중심, 인간중심에서 하나님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주님을 닮은 거룩함만이 건강한 생과 삶을 세워가는 비결이다. 우리 모두 이 사순절기에 거룩함의 영성을 다시금 세워 가자.
<자아발견> 2023년 2월12일 여기 한 사람의 이력서를 소개한다. 1832년-주의회 의원 선거에서 처음으로 낙선하다. 1833년- 낙선후 사업을 시작했으나 실패하다. 1836년- 반복된 실패로 신경쇠약에 걸려서 무척 고생하다. 1838년- 하원의장 선거에 낙선하다. 1840년- 선거인단 선거에서 패배하다. 1843년- 하원의원 선거에 다시 도전하나 낙선하다. 1848년- 하원의원 선거에서 다시 낙선하다. 1855년- 상원의원 선거에서 낙선하다. 1856년-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나 낙선하다. 1858년- 상원의원 선거에서 다시 낙선하다. 1860년- 미 합중국 대통령에 당선되다. 위 사람의 일대기는 성공일까? 실패일까? 이력을 보면 실패의 경험이 훨씬 많다. 아니 대부분의 도전에서 실패했다. 헌데 마지막에는 그간의 모든 실패를 덮는 승리를 거두었다. 위의 기록은 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인 링컨의 일대기이다. 헌데 링컨의 승리비결은 기도에서 나왔다. 그는 백악관에 들어간 후 그곳을 기도실로 만들었다. 그는 정치를 기도로 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는 어렵고 험난한 시절에 기도했고 실패 시에도 믿음을 잃지 않고 기도했다. 그가 수차례 실패했음에도 포기를 몰랐던 것은 끈기있는 기도 덕이었다. 기도로 일관한 링컨은 결국에는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어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냈다. 기도가 만들어낸 인간 승리였다. 여러분의 일대기를 한번 표현해 보시라. 남들보다 업적과 치적이 많은 분들이 있을 터이고 부족하고 연약한 분도 있을 터이다. 허나 조금은 초라해 보이고 해서 마땅히 일대기라고 적을 것이 없더라도 걱정하지 마시라. 믿음 안에서 쉬지않고 기도하고 최선을 다한다면 언젠가는 비범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기도로 주님과 교제하는 사람은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 아니 주님께서 그렇게 내버려 두시지 아니하신다. 주님께 기도하는 자는 한순간의 실패들을 경험할지라도 종내는 그 모든 실패를 뛰어넘는 성공과 기쁨을 얻을 것이다. 삶이 어렵고 힘들어도 기도의 신앙을 가지고 꿋꿋이 살아가자! 주님의 손은 기도하는 자의 팔을 들어 주신다.
<아름다운 노년기> 2023년2월5일 모든 인간들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유아기,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를 거쳐 노년기에 이르게 된다. 자연에 4 계절이 있듯이 인생에도 계절들이 있는데 노년기는 인생 겨울에 해당한다. 인생의 각 계절들은 나름대로의 특성과 멋이 있고, 그들을 아름답고 우아하게 만들어 가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노년기를 아름답고 생기있게 보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볼품없고 미약하게 보내는 이들도 있다. 미국의 자동차 산업을 크게 발전시킨 찰스키터링은 나이가 80이 넘어서도 새로운 기계를 발명하는 등 매사에 적극적이었다. 83회 생일 때 그의 아들이 “아버지, 이제 연구를 중단하고 좀 쉬시지요!”라고 말했을 때 키터링은 “오늘만 생각하는 사람은 흉하게 늙는다. 그래서 나는 항상 미래를 바라본다!”라고 대답했다. 사람으로 하여금 흉하고 볼품없이 노년기를 보내게 하는 다섯 가지 독약이 있는데 그것들은 ‘불평, 의심, 절망, 경쟁, 두려움’등이다. 이들의 양이 늘어가게 되면 노년기의 얼굴은 점차 굳어지고 정신과 영혼은 무미건조해지고 메마르게 된다. 반면에 아름답고 윤기있게 노년기를 보내게 하는 다섯 가지 묘약들도 있는데 이들은 ‘사랑, 여유, 용서, 아량, 부드러움’등이다. 이런 묘약의 양이 많아질수록 육신의 피부는 탄력을 오래 간직하게 되고 영혼은 더욱 풍성해진다. 그리고 노년기에 영육간 좀더평안하고아름다워지려면다음세가지를유념해야 한다. 첫째, 육신적인 것에만 집중하지 말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고 영혼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이고, 둘째, 남의 일에 함부로 참견하는 습관을 버리고 사려깊은 눈으로 바라보고 성원해 주라는 것이며, 셋째, 대화시 같은 말을 반복하거나 남을 비방하는 것을 삼가라는 것이다. 성경은 “젊은 자의 영화는 그의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움은 백발이니라” (잠 20:29)고 말씀한다. 이 귀절은 인생의 노년을 부정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오히려 긍정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인생의 노년기는 스스로가 흉하게 만들어 갈 수도 있고 아름답게 만들어 갈 수도 있다. ‘불평, 의심, 절망, 경쟁, 두려움’등 다섯 가지 독약은 계속 줄이고 반면에 ‘사랑, 여유, 용서, 아량, 부드러움’등 다섯 가지 묘약은 더욱 더해가며, 아울러 위의 세 가지를 꼭 염두에 두고 실행함으로 아름답고 활력있는 노년을 만들어 가는 우리 모두이길 소망해 본다.
목회칼럼 2023년 1월
<사랑의 기적> 1월 29일 2023년 매컬리스터라고 하는 의사가 있었다. 그는 갑자기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그 충격으로 중풍병자(뇌졸증)가 되었다. 휠체어를 타야만 하는 이 의사는 죽기로 결심했다. 기회만 있으면 자살을 시도해서 간호원이 늘 옆에 붙어 있어야만 했다. 어느날 간호사가 의사를 태운 휠체어를 밀고 바닷가로 산책을 나갔다. 먼 바다를 바라보면서 이 의사는 죽기 위한 계책을 꾸민다. 그는 간호사에게 “나를 좀 높은 언덕으로 올려다 주시오 그리고 당신은 내려가서 잠시 수영이나 해요. 간호사가 수영하는 동안 빠져 죽을 계획을 한 것이다. 의사 속셈을 전혀 모르는 간호사는 그의 말 대로 휠체어를 언덕 위에 올려 놓고 즐겁게 수영을 즐겼다. 의사가 자신의 계획대로 물에 빠져 죽으려고 한 바로 그 순간, 바다 쪽에서 ‘저를 구해 주세요’라는 간호사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수영을 하다가 다리에 쥐가 난 것이다. 온 몸을 모두 움직일 수 없게 된채 점점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데 주변에는 그녀를 구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때 갑자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휠체어를 타고 있던 의사가 벌떡 일어나 물속으로 뛰어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간호사를 건져내 생명을 구했다. 의사가 생명을 구해야겠다는 생각만으로 물속에 뛰어든 순간 이미 그의 중풍병은 감쪽같이 나아 있었다. 기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남에게 없는 특별한 초인적 능력을 부여 받아야만 기적을 행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랑이 가득하면 놀라운 일이 발생한다. 고전 13장의 말씀처럼 사랑은 가장 위대한 능력이고 가치이다. 사랑은 기적을 일으키고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만든다. 사랑으로 섬기면 기적같은 일이 필요할 때 그 일이 일어난다. 사랑 자체가 기적이다. 위의 의사처럼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바치는 순간 남도 살리고 자신도 사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능동적이고 선택적인 큰 사랑 안에 생명을 창조하는 능력을 허락하신다. 우리들 삶의 자리에서 크고 작은 사랑들을 실천하며 살아야겠다. 기회되는대로 말이다. 작은 물이 모여서 큰 강물이 되듯이 일상에서의 작은 사랑의 물들이 모아져 주변에 생명과 행복과 기쁨을 주는 은혜의 강이 될 것이다. 참으로 가치있고 아름다운 인생은 사랑한 만큼이다. 우리의 믿음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한 만큼이다.
<입술의 안내자> 1월 22일 2023년 언젠가 한 서커스에 호랑이, 사자들이 등장해 춤추고 재롱피우면서 관객들을 즐겁게 하는 것을 T.V.에서 본적이 있었다. 인간은 맹수는 물론 다양한 야생동물들을 길들이는 법을 터득해 왔다. 원숭이가 상업광고에서 연기하는 것을 가르치고, 바다 돌고래가 관중들의 박수소리에 맞추어 거대한 몸을 수차례 회전하는 것을 훈련시키며, 눈망울 큰 사슴이 손으로 먹이를 우아하게 먹게끔 훈련시켜 왔다. 지구촌에 거하는 대부분의 피조물들은 인간이 길들 일 수 있다. 잘 길들여지지 않는 것, 아니 스스로 길들일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자신의 혀이다. 우리들은 작은 혀를 통제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는다. 야고보는 짐승, 새, 바다 생물들은 사람이 길들일 수 있지만 자신의 혀는 길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목사로서 다른 이들보다 혀를 자주 이용하는 편이다. 목회자의 사역활동의 대부분은 혀, 즉 말로써 행해진다. 설교, 기도, 교육, 상담, 회의등에 혀가 사용된다. 따라서 혀를 잘 조절하고 관리해야 하는데 간혹 혀가 내 의지를 벗어나 제 맘대로 말하고 제 맘대로 표현한다. 나는 지금까지도 혀를 길들여 가는 과정중에 있다. 혀를 길들이고 관리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는 혀 끝에 있는 말들이 마음 깊숙한곳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마음은 말들을 생산하고 모으는 저장소이다. 주님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하셨다. 따라서 혀를 통제하기 어렵다는 말은 마음을 통제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혀는 선과 악 모두에 의해 사용될 수 있다. 한 혀로 찬송할 수 있고 남을 저주 할 수도 있다. 동일한 혀로 경건의 말을 할수 있고 세속적 언사를 쓸 수도 있다. 학자 피터 데이비스는 “혀는 한편으로는 대단히 종교적이나 다른 한편으로는 가장 세속적이다” 했다. 말과 행위들을 다스리려면 주님께서 오셔서 마음을 관리, 감독하시고 통제하시도록 해야 한다. 주님이 마음에 계시면 그곳에서 나가는 모든 말들은 선하고 덕스럽고 은혜로울 것이다. 주님이 조절하시는 말에는 복과 생명이 가득할 것이다.
<겸손의 생활화> 1월 15일 2023년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와 겸손의 마음으로 이는 기독자들이 응당 지녀야할 마음이다. 기독자들의 겸손한 마음과 온유한 심정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및 그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겸손을 이웃에게 나타내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겸손이란 가치없는 것이 되고 만다. 헌데 기독자의 겸손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를 때 실체화 된다. 즉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여 서로 종이 되며 각각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며 서로 순복하라” 고 하신 말씀을 쫓을때 겸손해 진다. 헌데 지혜, 재능에 있어서, 혹은 받은 바 신령한 은혜에 있어서 우리가 어떻게 우리보다 훨씬 뒤떨어지는 사람을 낫게 여길 수가 있겠는가 라는 질문이 생긴다. 그러나 그 질문은 마음 속의 참 겸손이 무엇인지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생긴다. 참 겸손은 하나님의 광명한 빛 아래서 자신은 진실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하나님 만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게 하기 위하여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을 때 드러나고 생성된다. 참 겸손의 사람은 "오, 주여, 당신을 찾으려고 나는 나 자신을 버렸사오니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케 마옵소서"라고 하게 된다. 이렇게 되고서야 비로서 자기 중심의 자아를 끊어 버리고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게 되고, 해서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또는 모든 사람의 종으로 여기게 된다. 실제 어떤 종은 주인보다 더 지혜로울런지 모른다. 그러나 신실한 종이라면 종으로서의 마땅한 정신과 태도를 지니고 연약하고 부족함 많은 주인을 오히려 우러러보며 그를 극진히 존경하고 섬긴다. 죄와 허물많고 실수와 실패투성이인 제자들의 발을 씻기던 그리스도의 정신처럼 말이다. 겸손한 사람에게는 시기와 질투가 없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앞에서 다른 사람들이 섬김과 존경 받음을 볼 때는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 다른 사람은 칭찬을 받고 자기는 오히려 천대받고 무시당해도 참을 수 있다. 이는 그가 마치 바울 사도와 같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 고 한 그 정신을 배웠기 때문이다. 동료들의 실수와 죄를 보고 날카로운 말로 책망하고픈 유혹을 받을 때에도 겸손한 사람은 “서로 참으며 서로 용서 하기를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용서해 주신 것같이 하라”고 기록된 성경말씀을 늘 마음에 새기고 삶을 살아간다. 우리 모두 주 예수를 옷입고 긍휼과 자비,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의 일상을 살아가길 기원한다.
<비우기> 1월 8일 2023년 인생은 두 시기로 나뉘어진다. 전반부의 채우기의 시기와 후반부의 비우기의 시기이다. 전반부는 육체, 지혜가 자라고 친구도 생기고 가정도 이룬다. 돈, 명예도 생긴다. 헌데 후반부에는 육체가 쇠해지고 지혜가 감소되고 재정능력 도 감소된다. 자녀들은 집을 떠나고 친구들은 하나 둘 세상을 떠난다. 종내는 빈손으로 남게 되고 생명마저 내놓는다. 인생을 떠날 때는 모든 것을 다 내놓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채우기에만 급급할게 아니라 비우기도 배워야 한다. 채움은 한순간 편리함과 기분좋음을 제공하지만 그 채움이 생의 짐이 되기도 한다. 비움은 한순간 불편하고 아쉽지만 종내는 인생을 가볍고 건강하게 만든다. 위도 적당히 채울 때 건강하다. 예수님은 비우기의 대가이시다. 그는 하나님과 본체이시나 그것을 비우시고 종 형체로 오셨다. 주님의 비움이란 신성을 포기한게 아니라 하나님으로서의 귄위를 주장하시지 않은 것이다. 기독자에게 비우기란 채울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예수님을 본받아 무가치한 것들을 내려놓고 부인하는 것이다. 바우기의 예들이 있다. 불필요한 물건들에 대해 적게 사고, 적게 소비하는 것이다. 행복이 아닌 것들에 대해 적게 벌고 적게 먹는 것이다. 무가치한 일에 대해 적게 생각하고 적게 활동하는 것이다. 비우기의 요건들이 있는데 먼저 단순함이다. 이는 군더더기가 없는 꼭 필요한 본질만 있는 것이다. 가짜는 복잡하지만 진리는 참 단순명료하다. 신앙생활은 예수님만 보고, 믿고, 따르는 것이다. 또 느림이다. 이는 속도를 줄임이다.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닌 방향이다. 일상과 영성에 성찰의 여유를 갖고 자신도 찾고 이웃도 보고, 위에 계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어야 한다. 그리고 지족이다. 이는 현상에 만족 함이다. 지족은 탐욕을 극복케하며 감사생활을 부추키어 생을 우아하고 아름답게 만든다. 생의 의미와 가치는 잘 비우기에 있다. 비울 것을 비우는 순간 행복, 기쁨, 건강이 찾아온다. 비울 때 자신을 뛰어넘어 세상도 보게 되고 주님도 체험한다. 하면 우리들은 정도 이상의 일, 스케줄, 생각, 소유등을 줄여야 하지 않겠는가? <신년의 기도> 1월 1일 2023년 ● 다시 맞은 새해, 꿈꾸는 것들이 바람대로 이루어지고 모든 삶이 아름답게 열려 이 한 해가 행복으로 가득하게 하소서, ● 때때로 힘이 드는 시련이 다가오더라도 극복하며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으로 누구도 탓하지 않고 부족한 만큼 말씀으로 채워 강인하고 성숙한 삶으로 살게하소서, ● 주님에게 언제나 마음을 비우고 진정으로 가슴에서 울리는 기도를 드림으로 매일 매일 기쁨과 만족이 흐르게 하소서, ● 주님께 사랑을 받고 그분에게 사랑을 드리는 따뜻하고 은혜로운 한 해로 살게하소서, ● 끝없이 드넓은 하늘같이 아주 넓은 마음을 지니고 힘든 이웃들에게 기회있을 때 마다 베풀어 주위에 빛이 되게 하소서, ● 우리 가슴이 섬김을 가꾸는 밭이 되게 하소서, ● 진정 오늘밖에 없는 것처럼 매 시간마다 반성과 감사와 고마운 마음을 지니고 온유하게 살아가게 하소서, ● 대하는 이들 모두가 이런 삶에 행복을 얻게 하소서, ● 내일을 위한 희망적인 설계 속에 오늘 최선을 다한 일들이 내일 보람의 꽃으로 활짝피어 사람들로 이를 보면서 힘을 얻고 위로를 받게 하소서, ● 병들어 멀미나는 이 세상 지쳐 쓰러져 가는 이들이 보이면 사랑의 손길을 펼쳐 그들의 슬픔과 절망의 마음이 위로 받고 용기와 희망을 얻어 일어서게 하소서, ● 올 한 해 모든 이들에게 아픔을 모르는 세월이게 하소서, ● 가슴마다 따뜻한 언어들로 가득 채워 바라보는 세상이 맑게 보이고 하루하루 가는 날짜가 희망의 숫자로 남게 하소서, ● 매일 일상이 아름답고 귀한 추억이 되게 하소서, ● 사람들이 너무 힘들어 주저앉고 싶을 때 내 친절한 말이 그들에게 위로와 용기가 되는 삶의 힘으로 살아 나게 하소서, ● 매 하루의 시작을 기분 좋게 출발하게 하시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매 순간들이 즐거움과 멋, 우아함으로 피어나게 하소서, ● 그리고 내 기도가 모두의 꿈이 이루어지는 큰 희망이게 하소서,
목회칼럼 2022년 12월
<한 해의 끝자락에서> 12월25일 2022년 나는 원리를 적용하고 응용하는 일에 약하다. 반면에 암기하고 기억하는 단순한 일에는 조금 강한 편이다. 해서 학창시절에는 암기과목을 선호했었다. 헌데 지금은 수시로 건망증세에 시달린다. 기록하지 않은채 기억력만 믿다가 중요 모임약속과 병원약속을 몇차례 잊었고, 필요한 물건의 위치를 기억못해 동일한 물건을 구입한 적도 있었다. 무원고 설교하다가 갑자기 준비한 내용이 끊겨 혼줄난 적도 있었다. 헌데 아무리 기억력이 탁월해도 인간은 주변을 스쳐갔던 사람들, 경험했던 사연, 사건, 사고들을 모두 기억하지 못한다. 인간의 뇌에는 망사체구조 라는게 있는데 이것은 인간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을 걸러내어 잊어야할 것은 잊고 기억해야할 것은 기억하게 해주는 제어 장치이다. 만약 삶의 터전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상들을 머리에 입력해 기억해야 한다면 머리는 금새 터지고 말 것이다. 망각도 크신 은혜이다. 헌데 망상체구조가 제대로 작동 못한채 기억해야 할 것은 잊고, 잊어야 할 것은 기억하는 것, 특히 좋은 것은 쉽게 망각하고 안 좋은 것은 오랫동안 기억하는 것이 우리의 문제이다. 우리들은 삶을 비폐하고 힘들게 했던 사람들, 환경들을 오랫동안 기억하며 상처투성이 생을 살아가는 경향이 있다. 일상사의 망각증세로 인한 곤란함도 있지만 부정적 과거지사를 도에 넘치게 기억하고 각인시킴으로 고통을 가중시키곤 한다. 한 해를 마감하는 시점이다. 겸허히 마음의 옷깃을 여미며 한 해를 돌아본다. 부족하고 모자람에도 예까지 온 것, 은혜이고 축복이다. 감사하고 감사하다. 그런한편 하나님과 식구들, 주변 사람들 앞에서 부끄럼 많았던 한 해였음을 고백한다. 생각, 계획, 언어, 행위등에 실수가 있었고 시행착오도 많았다. 좀 더 사랑하고, 좀 더 용서하고, 좀 더 베풀고, 좀 더 참을 수 있었는데, 좀 더 잘 믿고, 좀 더 충성할 수 있었는데… 때때로 난 그러질 못했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아쉬운 마음안고 이런 결심을 해본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 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부름의 상을 위해 좇아가리라.” 바울의 결심과 같은..
<예수 탄생일 유래> 12월18일 2022년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날을 성탄절이라 부른다. 성탄절을 영어로는 크리스마스라고 하는데 이는 그리스도(Christ)와 미사(Mass)가 결합된 말이다. 사실 신약성경에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날에 대한 정확한 언급이 없다. 또한 2 세기의 교부들도 예수님의 탄생일에 대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 왜냐면 당시 성도들은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보다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신학적, 교리적인 부분을 더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3세기가 되면서 그리스도 인들은 예수님의 생일을 축하하고 싶은 경건한 생각을 하게 되었고 각자가 마음대로 날을 정해서 기념하고 축하했다. 해서 각 지역이나 교회마다 예수님의 생일이 모두 달랐으며 4세기 이전까지는 공식적인 크리스마스 축하도 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3세기초 로마교회의 주교였던 히폴리투스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때가 기원 후 29년이라 추정하고 그 날짜를 만월인 3월 25일로 추측하게 된다. 그리고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정확히 33년의 시간이 흘렀고 예수님의 잉태와 죽음은 같은 날인 3월 25일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결국 예수님께서 수태 9개월 만에 태어나셨다는 계산을 하게 되어 12월 25일이 예수님의 탄생일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기독교회는 313년에 안식 후첫날(막16:2)을 주의 날, 즉 주일로 부르고 이어서 공휴일로 제정했으며 또한 336년에 예수님의 태어나신 날을 12월 25일로 공식화하게 되었다.
<벤허 이야기> 12월11일 2022년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두 장교가 있었다. 한 사람은 잉가솔(Ingersol)이라고 하는 대령이고 다른 사람은 루 웰래스(LewWallace)라고 하는 장군이었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이야기는 예수님에 관한 모독적인 이야기였다. 잉가솔 대령이 말했다.”그 예수라고 하는 친구 있지 않습니까? 예수쟁이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니, 하나님이니 하고 허튼소리를 하는데 예수라고 하는 친구를 멋진 연애장이로 만들어 에로틱한 소설을 쓰면 어떨까요? 그러면 돈을 많이 벌 수있겠지요?” 그러자 월래스 장군이 응수했다. ”아, 그것 참 좋겠는 걸 참 훌륭한 소설이 되겠지...” 그 후 그들은 제대를 했다. 제대를 하고 이 것 저 것 할 일을 찾아보았으나 별로 신통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 끝에 전에 기차를 타고 가다가 예수라고 하는 사람에 대한 에로틱한 소설을 써 베스트셀러가 많이 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던 일이 생각이 났고 해서 월래스는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실제로 성지까지 가서 소설의 자료를 수집하기도 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생겼다. 그가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예수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면 할수록 그의 마음이 변해가는 것이었다. 마침내 그가 목적한 소설의 원고가 끝났다. 그런데 처음에 계획했던 소설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흘러간 소설이 되었다. 원고의 마지막 장을 끝낸 다음에 월래스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의자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게 되었다. 그리고 신앙 고백을 했다. “진실로, 진실로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그 소설책의 이름이 <벤허> (Ben Hur)이다. 성경은 단순한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에는 모든 것들을 정복하는 생명과 빛, 능력이 있어서 누구든 성경말씀에 진실되이 접하면 말씀의 능력과 지혜를 을 얻고 인생과 삶이 총체적으로 변화된다. 성경과 벗할 때 그 말씀이 우리에게 하늘 가는 길을 안내해 주며, 암초에 걸려 세상 바다에 빠지지 않도록 빛을 비추어 준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온갖 어두움을 물리치는 빛, 죽음을 이기는 삶, 주님의 재림에 대한 약속, 영원히 지속될 영광에 대한 보증을 확신하게 된다. 성경은 예수님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좋고 복된 선물이다. <일일 부흥회> 12월4일 2022년 오늘은 일일 부흥회의 날이다. 아직도 코로나 펜테믹 기간 중이어서 정황 상 예전같은 부흥회를 진행하기 쉽지 않기에 주일 오전, 오후 두번의 집회로 부흥회를 진행한다. 일일 부흥회를 갖는 목적이 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말씀의 은혜를 받고 우리들의 믿음과 헌신, 충성을 다시금 다지기 위해서이다. 은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는 선물로 인생을 풍요하고 행복하고 만드는 모든 것’ 이다. 은혜에는 영적인 것, 정신적인 것, 물질적인 것등 모든 것이 포함된다. 은혜 없이는 우리들은 한순간도 평안하고 행복할 수 없다. 아니 은혜 없이는 한순간도 존재할 수 없다. 공기없이 짧은 시간도 버티지 못함처럼 모든 피조물들은 매 순간 은혜의 범주 속에 살아간다. 특히 성도들은 더욱 더 은혜 속에 살아간다. 우리들은 주님이 택한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은혜는 언제, 어디서나 누릴 수 있다. 집안과 직장, 비즈니스, 학교등 지에서 누리며 심지어는 감옥, 전쟁터에서도 누릴 수 있다. 은혜는 일상을 통해서 누리며 특별히 선하고 착한 일을 할 때도 누릴 수 있다. 헌데 삶의 자리에서 주님 은혜를 가장 크게 누리는 곳은 단연 교회이다. 교회는 주님의 이름과 권세, 능력과 존재감이 있는 곳으로 은혜의 통로이며 저수지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은혜를 교회에 저축하시고 분배하신다. 교회의 예배시간은 은혜가 내려오는 시간이며 전도, 성경공부, 봉사, 섬김, 구제등의 교회 사역들 역시 은혜를 흡인하는 통로들이다. 교회 사역 중에서도 더 큰 은혜를 받을 결심을 하고 준비, 마련한 장이 있다. 부흥회이다. 전세계적으로 교회 문화가 가장 발달한 곳이 한국인데 한국교회들은 부흥회를 통해 질적, 양적으로 큰 성장을 이루었다. 1970,80년대 부흥회의 물결이 한국교회들을 휩쓸었다. 대다수의 교회들은 일년에 한,두차례 부흥회를 개최하면서 개인 성장과 교회부흥의 근거로 삼았다. 부흥회기간중 성도들은 일상을 전면 중단하면서 오직 은혜받기 위해 하나님께 매달렸다. 오늘날 부흥회의 열기가 예전 같진 않다. 현대인들은 모이기에 별반 애쓰지 않는다. 세상문화에 심취하고 생활고에 바쁘고 분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들에게 늘 필요한 것은 심령부흥이다. 그 부흥의 은혜를 공급하는 것이 바로 부흥회이다. 오늘 일일부흥회 시 은혜받기를 사모하면서 영혼을 오직 하나님께 집중하여 주님께서 예비하신 풍성한 은총을 누리시길 바란다. 또한 주님께서 은혜의 도구로 강사 목사님을 온전히 붙드시고 울림있게 사용하시기를 기원한다.
목회킬럼 2022년 11월
<나무의 소망> 11월27일2022년 한동안 녹색 옷을 입었던 나무들이 계절의 옷을 훌훌 벗고 서서히 겨울 준비에 들어 가려한다. 나무들은 몸을 이동하지 않고 한 곳에서 조용히 계절의 변화를 받아낸다. 아니 애초부터 나무들은 오로지 선택된 곳에서만 존재하고 생존하며 생명을 향유한 다. 나무는 심겨진 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치고 잎을 생산하고 꽃망울을 띄우고 열매를 맺고 그곳에서 내내 주어진 생을 소화해 낸다. 나무는 자신이 뿌리내린 토양에 대해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움직일 수 없는 불변의 처지를 지루해 하지도 않는다. 비탈길이건, 집안 정원이건, 강가 해변가이건, 깊은 산속이건, 길가이건, 혹은 어떤 척박한 땅 일지라도 나무는 체념하지도, 왜 그곳이냐고 묻지도 않는다. 자신의 몸을 태동시킨 그곳에서 모질게 운명을 개척하면서 나이테가 더해질수록 더 깊이 땅을 파고든다. 추위, 더위, 가뭄, 폭풍, 폭설, 자연재해등을 꿋꿋이 견디면서 위탁된 삶을 묵묵히 살아간다. 역경의 환경을 버텨가며 묵묵히 서 있는 나무를 보노라면 우직함을 넘어 숭고함마저 느낀다. 나무에게서 생명력, 인내, 끈기, 내려놓음, 사명의식등 인생의 온전함, 성숙함에 이르게 하는 지혜를 배운다. 그리고 어떤 환경에서도 사라지지 아니할 소망을 배운다. 나무는 깊이있는 소망으로 살아간다. 나무는 잎사귀를 떨구고 가지가 잘려 나고 베임을 당해도 그루터기로부터 다시 생명을 생산한다. 욥기서는 나무의 소망을 이렇게 말한다. “나무는 소망이 있나니 찍힐찌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어지지 아니하며(욥14:7)”. 사람은 원했던 것에 실패하고 얻은 것을 잃어버리고 사랑했던 자들과 이별할 때 불행과 비참함을 느낀다. 헌데 실패, 상실, 잃음, 심지어는 육체의 죽음보다도 더 큰 불행은 살아가는 동안 내부에서 소망이 고갈된채 죽어가는 것이다. 소망을 상실함이 가장 큰 불행이다. 인간은 소망을 먹고 소망으로 숨쉬는 존재이다. 사람은 음식없이 40일,물없이 3일, 공기없이도 8분 정도는 버티지만 소망없이는 단 한순간도 살 수 없다. 특히 기독자들의 소망은 하늘에까지 연결되어 있다. 땅에서 시작된 소망이 하늘에 견고하고 튼튼하게 닻을 내리고 있다. 해서 어떤 환경에서도 그 소망은 끊어지지 않는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그리스도이시다. 나무는 자신도 소망없이 존재할 수 없음을 알고 변함없이 한 곳에 우뚝 선채로 거룩하고 튼실한 소망을 주변에 쉬임없이 토해내고 있다. 계절 옷을 탈의한 채 쓸쓸하지만 성스럽게 탈바꿈해가는 주변 나무를 통해 존재됨의 이유와 근거를 깨닫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오늘 유난히 감격스럽다.
<감사거리들> 11월 20일 2022년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이다. 감사는 성경의 권면이자 성도로서 마땅히 갗추어야 할 덕목이기에 평소 설교 중에 이에 대한 언급을 종종 하는 편이지만 아무래도 감사절시에는 감사설교를 더욱 많이 하게 된다. 감사설교의 주된 내용은 작은 일에도 감사, 어려울 때도 감사, 그리고 범사에 감사하자는 것이다. 이는 성경이 그렇게 명하기 때문이다. 헌데 감사설교를 할 때마다 나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물음이 있다. “나에겐 정말 범사 감사할 조건이 많은가”라는 것이다. 헤아려보면 감사거리가 늘 있었다. 예전과 작년은 물론 올해에도 감사할 사안들이 많았다. 여전한 코로나 전염병, 치솟는 물가고, 가족식구들의 병고, 교회모임의 제한등으로 현실은 영과 몸을 위축시킬 만한데 하나님 은혜와 사랑은 조금도 퇴보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강하게 역사했다. 일전에 한 목사님과 통화하면서 “올해 나에게 감사거리가 많아 나는 하루에 적어도 다섯번 감사하고 잠자리에 든다. 그만큼 내 삶은 감사로 충만했다”라는 말을 들었는데 사실 나에게도 올 한해 감사거리들이 풍성했다. 아주 큰 것들만 열거해보면 우선 올 한해 건강 중에 지내왔다. 평생 약을 복용해야 하는 갑상선과 고혈압, 콜레스트롤 환자임을 제외하곤 어떤 병치례도 없이 지내왔다. 코로나 환자가 되었지만 회복되어 정상으로 돌아왔다. 복잡한 사건, 사고도 없었다. 자주 운전하면서도 차 고장난 적이 없었고 교통사고에 연루된 일이 없었고 운전티켓도 없었다. 연로하신 어머니와 장모님이 병환 중에 있지만 급격히 악화되는 일 없이 Stable 컨디션이다. 골골이 처럼 자주 아파하지만 집사람도 하루하루를 잘 살아가고 있다. 교회도 평온하게 진행하고있다. 눈에 보이는 괄목할만한 부흥은 없어도 모두들 처한 위치에서 최선다해 교회를 섬기고 있다. 육신적으로 연약한 성도들이 있지만 기도와 인내로 잘 극복해 가고 있다. 아. 이세형 집사님께서 투병중 지난 5월 말에 하늘나라 가신 것은 참 안타깝다. 우리 교단 북가주지방회도 작지만 조금씩 알차게 자라가고 있다. 이 또한 은혜이며 감사거리이다. 그리고 나는 지난 10월에 생일을 맞이해 한살 더 먹었는데 나이들어감이 아쉽지도 서럽지도 않다. 남은 인생에 오늘이 가장 젊은 날이기 때문이다. 위에 열거한 것들은 분명히 감사거리들이다. 이외에도 헤아리고 따져보면 감사할 이유들을 더 발견케 된다. 미국 토크 쇼의 여왕이었던 오프라 윈프리는 ‘불우한 삶을 행복한 삶으로 반전시켰던 것은 감사였다’고 고백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매일 잠들기 전에 감사를 헤아리고 고백해 보시라. 그 감사거리가 우리들을 행복하게 할 것이다.
<은총 받은 자들> 11월 13일 2022년 문학가 오스카 와일드의 우화적 단편이 있다. 이 이야기는 예수께서 과거에 은혜를 입혀준 몇 종류의 사람을 그 후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우화적으로 엮어본 것이다. 처음 예수는 한 주정꾼을 만난다. 그는 거의 폐인과 같이 된 젊은이였다. 예수께서 왜 그런 생활을 하고 있소 하고 물었더니 주정꾼은 이렇게 대답한다. 당신이 내가 절름발이였을 때 나를 일으켜 걷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걸어 다닌들 무엇을 먹고 살라는 말이요. 그동안 직업을 구해 보았으나 만족한 직업 하나도 없었오. 그 다음 예수는 한 여자가 창기가 되어 남자들 사이에서 희롱받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된다. 예수는 그 여자에게 말한다. 어째서 이런 생활로 되돌아갔오? 창기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나를 구렁텅이에서 건져 새 사람을 만들어준 것 같았으나, 옛 생활에서 발을 씻은들 무슨 행복이 있겠습니까? 나는 더욱 고독해서 살 수가 없었기 때문에 다시 창기의 생활을 시작 했습니다. 그 후 예수는 한 불량자가 정신없이 이웃과 싸움질을 하고 있는 장면에 부딪힌다. 예수는 그에게 묻는다. 이보시오 청년, 어째서 이리 거칠게 살아가고 있소? 불량자는 예수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당신이 눈을 뜨게 해 준 소경이었소. 그러나 눈을 뜨고 무엇을 보라는 거요? 보이는 것이 모두 신경을 돋우고 귀찮고 화나는 세상이 아니오? 결국 나는 화풀이도 하고, 마구 치고 받고 하는 생활이 나에게 주어진 길이라고 생각하였소.저자는 이 글에서 ‘주님이 베푸신 은총을 은총으로 살려내지 못한 채, 다시금 어둠속으로 돌아가 안타깝고 불쌍하게 살아가는 인간상을 그리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참으로 크고 신비로운 것이다. 위의 글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만이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임하는 주님 은혜는 말과 글로 담기에는 너무 웅대하고 위대하다. 우리들은 창기의 삶에서 구원되거나 소경이 눈을 뜨는 이상의 큰 은혜들을 날마다 입고 누리고 있다. 우리들은 은총을 받은 자들이다. 헌데 문제는 우리들도 때때로 ‘주님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이감사 절기에 감사를 회복해야겠다. <천국가면 불평이 사라질까요> 11월 6일 2022년 두 사람이 죽어서 천국에 갔다. 한 사람은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은 게으르고 불평불만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세상살이가 어떠했느냐고 물으셨다. 그러자 부지런한 사람은 힘들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면서 감사를 드렸다. 헌데 불평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세상은 너무 불공평해서 자신은 단 한 번도 행복한 순간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 사람은 자기가 살던 집도 좁고 돈도 마음껏 써 보지 못하였고 또 자식들도 다 속을 썩이고 부인도 마음에 안들고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었다며 계속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번에 하나님께서 그 두 사람이 거처할 곳을 안내해 주셨다. 두 사람은 자신 앞에 펼쳐진 광경에 놀라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두 사람에게 주어진 땅은 세상에서 결코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신천지였다. 부지런한 사람은 역시 하늘나라는 아름다운 곳이라며 감탄해 마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벌써부터 소매를 걷고 일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이내 아름다운 집과 정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이루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불평 많은 사람은 똑같은 환경인데도 불구하고 집도 없고 차도 없고 무슨 하늘나라가 이러냐며 계속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계속 투덜댔지만 소용이 없자 하는 수 없이 먹을 것을 구하고 잠잘 집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만든 집은 이내 오물과 쓰레기로 가득차고 벌레들이 기어다녔으며 지붕에서는 비가 새고 벽은 금이 갔다. 그 사람의 불평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차라리 세상이 더 좋았다며 한탄만 거듭했다. 얼마 후에 하나님이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을 심판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난 너희 두 사람에게 똑같은 조건을 줘 보았다. 하지만 한 사람은 그 조건으로 천국을 건설했고 또 한 사람은 동일한 조건을 갖고서도 지옥을 만들었구나.” 그러자 불만 가득한 사람이 하나님께 따져 들었다. 천국은 무위도식하는 곳이지 이렇게 힘들게 일하는 곳이 아니지 않느냐고 항변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끝을 맺으셨다. “천국을 오해하지 말아라.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 그리고 심는대로 거둔다는 진리는 땅의 논리가 아니고 애초 천국의 논리였다. 천국의 논리로 살면 그 사람은 지옥에서도 천국을 건설하며 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천국을 거저 주어도 지옥으로 만들 것이다. 너는 그와 같은 자이기에 결코 천국의 땅 한평 이라도 내줄 수 없다. 네가 만든 지옥에서 영원토록 살아라.”
목회칼럼 2022년 10월
<개혁에 관련한 성경귀절들> 10월30일 2022년 왕상 15:11,12, ”아사가 그 조상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남색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내고 그 열조의 지은 모든 우상을 없애고” 대하 15:12, “또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고” 대하 17:6, “저가 전심으로 여호와의 도를 행하여 산당과 아세라 목상들도 유다에서 제하였더라” 겔 18:31, “너희는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마 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9: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눅 19:45,46,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요 2:14-16,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약 4: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엡 4:23,24,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믿음 생활이 힘든 이유> 10월23일 2022년 히 11장 1절에는 믿음의 정의가 나온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것들의 증거니.” 또한 6절에서는 믿음의 실체가 나온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히 11:6)”. 즉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영존하시는 것과 그분께서 구원(상) 주시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처럼 믿음은 위대하고 좋은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믿음생활을 잘 하기가 쉽지 않다. 자신의 믿음에 완전 공감하여 100% 점수를 주며, 격한 찬사를 보내는 사람은 없을게다. 거기엔 이유들이 있다. 우선 믿음의 세계는 육신의 눈으로 가늠하고 측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세상 것들은 실적과 크기, 모습등으로 외부로 분명히 드러난다. 예컨대 학력, 체력, 능력등은 성적, 기록, 실적으로 확연히 드러난다. 헌데 믿음은 스스로 “나는 믿음이 있다, 영성이 깊다” 고 주장해도 이를 객관적으로 입증하기가 어렵다. 하나님 앞에서 그분으로부터 판단받기 전까지는 누구의 믿음이 좋고 혹은 그릇되고의 순위를 사람이 매길수 없고 우열을 가릴 수도 없다. 믿음의 결과를 논할 때 우리가 오감으로 체감할 수 있는 결과가 금방 드러나지 않고, 혹은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기도해도 지금 당장 큰 유익이 오는 것 같지도 않고 때로는 상황이 점점 악화되기도 한다. 말씀을 읽고 찬양을 해도, 전도를 하고 봉사를 해도 의미있는 변화를 느낄 수 없는 경우도 제법 있다. 또한 현대인들에게 믿음의 세계는 그리 급하거나 절실한 것이 아니기 떄문이다. 물질적 세계 속의 사람들에게는 믿음보다 더욱 급한 것이 있으며 그것을 따라가며 추구한다. 이것들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거리 같은 것들로 공중의 권세잡은 자 마귀로부터 온 것이다. 분명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가 실재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런 육신적, 정욕적, 세상적인 사고에 빠져 살기에 눈에 보이는 단편적인 세계를 넘어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 안착하기가 예상보다 쉽지 않은 것이다. 우리들은 육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을 이겨야 한다. 이 세상에 견고한 진을 구축해 믿음을 방해하는 마귀를 성령과 말씀, 주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대적하고 물리치고 극복해야 한다. 그럴때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다.
<인간 지식과 하나님 지혜> 10월16일 2022년
<10달러의 기적> 10월9일 2022년 돈리 란 중년 사내가 있었다. 그가 경영하던 작은 회사가 자금조달이 여의치 않아 부도를 내고 문닫게 되었다. 그는 졸지에 모든 것을 잃어린채 알거지가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그의 아내마저 그를 떠났다. 그는 평소 친분이 있던 친구들을 찾아 갔는데 그들은 부자였던 돈리만을 좋아했던지 가난한 돈리는 거들떠 보지 않았다. 살 길이 막막해진 돈리는 죽기보다 싫었던 구걸에 나섰다. 거리에서 낯모르는 사람들에게 동정을 구하기도 했고 고급 식당 앞에서 고급진 옷을 입은 부부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럴때마다 퉁명스럽게 거절을 당했다.어느날 거리에서 구걸하던 중 길을 가던 한 여인이 돈리에게 10달러 지폐를 건네주면서 “이것으로 식사를 드시고 용기를 잃지 마세요. 당신이 직업을 곧 얻도록 기도할께요”라고 말하며 갔다. 10달러를 받은 돈리는 5불로 요기를 하고 5달러를 남겼다. 헌데 바로 옆에서 한 노인이 부러운듯 돈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돈리는 나머지 5불을 꺼내 노인에게 빵을 사 드렸다. 헌데 이 노인은 빵을 조금 떼어 먹다가 종이에 쌌다. “내일 드시려고 합니까?” 노인은 “아닙니다. 저 길가에 신문팔이 꼬마가 있어요. 그 아이에게 나눠 주려고 합니다.” 두 사람은 남은 빵을 가지고 아이에게 가서 빵을 주었다. 아이가 맛있게 빵을 먹는데 옆에 길 잃은 개 한 마리가 다가왔다. 그 아이는 나머지 빵 조각을 개에게 주었다. 이어 아이는 흥겨운 마음으로 신문을 팔기 위해 뛰어갔고 노인도 일감을 찾으러 떠났다. “나도 이렇게 있을 순 없지” 하면서 돈리는 길 잃은 개의 목걸이에 적힌 주소를 보고 주인을 찾아가 개를 돌려 주었다. 나이 지긋한 개 주인은 너무 고마워 하며 “당신처럼 양심적인 사람에게 나의 가게들중 하나를 맡기고 싶오. 내일 나를 찾아오시오:”라고 말했다. 돈리는 자신에게 전해 주었던 부인의 10달러 도움과 그 돈 안에 임재한 생명과 행복의 움직임을 느끼며 주님께 감사를 드렸다. 그는 섬김과 나눔의 기적과 위대함을 새삼 깨달았다.
<잠잠한 말씀> 10월2일 2022년 우리집 길 건너에 안과와 치과가 붙어 있다. 매 화요일 새벽에 정원사가 그곳 잔디를 깎는데 이른 아침의 소음이 짜증을 유발시킬 정도이다. 이 시대는 소리들이 넘친다. 외부로부터 사람 소리, 차 소리, 도로공사 소리, 잔디깎는 소리, 앰뷸런스 소리, 비행기 소리등이 들려온다. 집안에 들어서면 T.V. 소리, 전화 소리, 컴퓨터에서 나오는 소리,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에어컨 및 히터 소리, 변기 물소리, 시계침 돌아가는 소리들이 들린다. 이들로 인해 꼭 들어야 할 진리와 생명의 소리인 주님 음성을 놓칠 때가 있다. 테레사 수녀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헌데 하나님은 소음이 있는 곳에선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침묵의 친구이십니다”. 소음들 중에서 주님음성을 잘 들을 수 없는 것은 주님은 잠잠히 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강한 바람, 큰 지진, 불가운데 큰 소리로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라 잔잔하고 작은 음성으로 말씀하신다. 물론 하나님은 큰 소리를 내시기도 하신다. 그것은 우리들이 조용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들을 수 없을 때이다. 잠잠한 하나님음성을 들으려면 우리들은 많은 생각과 상념들, 떠들석한 세상환경에서 벗어나 거룩함, 고요함의 침묵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침묵 중에 영혼의 귀를 열고 그분의 음성에 집중해야 한다. 구약시대의 성전은 바깥뜰, 안뜰, 성소, 지성소의 4개 구역으로 구분되었고 하나님이 계시는 곳은 세상적 소리들이 완전 차단된 지성소였다. 거룩함의 침묵 안에서 우리 영혼은 주님음성을 온전히 듣고 반응하게 된다. 세상이 소요스럽고 시끄러울수록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보다 주님께 더욱 귀 기울이며 그분 뜻을 분별해야 할 것이다. 그런 후에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꼭 해야 할 말을 주실 것이다.
목회 칼럼 2022년 9월
<당신을 아프게 했다면> 9월25일 2022년 주여, 당신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들로 인해서 내 마음도 아프게 하소서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미워하고 상처받은 자를 위로하기보다는 판단하고 가르치려 함으로 당신 마음을 아프게 했다면 내 마음도 아프게 하소서 영적교만에 사로잡혀 주님의 이름을 경시하고 세상과 벗한 채 주님과의 교제를 등한시 함으로 당신 마음을 아프게 했다면 내 마음도 아프게 하소서 행위로 공적을 쌓은채 주님 은혜를 가리우고 세상 성공을 이루려고 주님 이름을 도용함으로 당신 마음을 아프게 했다면 내 마음도 아프게 하소서 인본적 성경적용으로 진리를 흐리게 하고 언행의 불일치로 복음전도에 방해요소가 됨으로 당신 마음을 아프게 했다면 내 마음도 아프게 하소서 주여, 당신을 슬프고 아프게 했다면 나로 하여금 처연한 영혼의 고뇌와 불꽃의 고통을 맛보게 하소서 그리고 나를 깨우치시고 알게 하소서 당신이 나를 징계하셨음을... 징계 후에는 당신 손길로 나를 다시 세워 주소서 ! <용서하고 사랑하며> 9월18일 2022년 기독교자로서의 생과 삶은 주님을 정점으로 시작되고 그분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주님을 구원의 주로 알고 믿고 영접하고 그분의 뜻과 생각을 좇고 따르는 것이다. 신앙생활에서 믿음의 대상으로서 하나님 외의 대안은 없다. 믿음여정의 처음도 나중도 하나님 만이 믿음의 주이시고 바라보고 따라가야 할 인도자이시다. 신앙생활은 단지 주님에 대한 정보와 교회제도, 예배의식등의 숙지가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형성된다. 해박한 성경지식, 교회 법, 탁월한 행정력, 뛰어난 기도 말이 있어도 주님과 긴밀한 영적관계가 아니라면 그것은 참 믿음이 아니다. 헌데 문제는 주님과의 착실한 관계임에도 믿음이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을 뿐 아니라 때로 시험 받고 유혹에 휩싸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열심히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에 정성다하며 찬송에 몰두하면서 주의 일에 열성다함에도 말이다.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들 중에서 믿음이 성장치 않길 바라며,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교회가 부흥 안되길 바라는 사람은 없을게다. 자신은 주님과 속깊은 관계라 하면서도 영성개발이 더디고 신앙발전이 느린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용서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경한다면서 다른 이를 미워하고 무시하고 거절하면 믿음생활, 교회생활에 큰 기쁨이 없다. 용서없는 기독생활에는 활력, 생동력이 없다. 용서의 반대개념은 사랑, 이해, 용납등인데 대인관계가 이들을 기반으로 진행되지 않으면 믿음생활은 그만 생명력과 능력을 상실하고 만다. 주님과의 관계가 믿음을 견인하고 유지하는 최고의 근거이지만 이에 못지 않게 지체들과의 관계도 활짝 꽃 피어야 한다. 간혹 영적, 정신적으로 상처받고 아픈 것은 믿음 안에서의 형제 자매 와의 관계때문인 경우가 참 많다. 인간은 연약하기에 보이는 사람때문에 아파하고 고민할 때가 종종 있다. 나 역시 목회하면서 본의 아니게 사람에게 상처받고 또 상처 줄 때도 있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 좋았던 주님과의 관계가 서서히 시들어 가며 믿음의 약화, 침체에 빠져들게 된다. 요즘 기도할 때 혹 마음에 살짝이라도 새겨진 미움의 대상자가 있는지를 점검해본다. 만일 있다면 용서하고 사랑케 해달라 간구한다. 용서는 상대방에게 줄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생각하면 우리 모두 주님으로부터 용서받지 않았던가? 이 가을은 용서가 무르익는 계절이었으면 한다.
<생각할 수록 좋아지는 사람> 9월11일 2022년 생각할수록 좋아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발견하고 만나고 교제나누는 것은 인생의 소소한 행복이며큰 기쁨입니다. 오늘도 살아 있음을, 호흡이 남아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하는 사람, 언제나 마음이 따스하여 대하기 편한 사람, 만날 때마다 먼저 즐거운 인사를 하는 사람, 조그만 호의에도 고맙다는 인사를 할줄 아는 사람, 틈날 때마다 책을 읽는 사람, 전화를 잘못 걸고 미안하다고 사과할 줄 아는 사람, 잘못 걸린 전화에도 친절한 사람, 얼굴에서 훈훈한 미소가 떠나지 않는 사람, 잘못한 걸 알면 잘못을 솔직히 시인하는 사람, 자기보다 못한 사람 앞에서 목에 힘주지 않는 사람, 때로는 손해를 보고도 소문내지 않는 사람, 나이 들어가는 모습이 깨끗한 사람, 고급 옷이 아니어도 늘 단정한 사람, 어느 자리에서나 맡은 일에 열성인 사람, 남에게 말 한대로 자기도 그렇게 살려는 사람, 차를 운전하고 가면서 양보 받았을 때 손을 흔들어 주는 사람, 음식점에서 음식먹은 후 종업원에게 진정 고마움을 표하는 사람, 한 포기의 들풀과 한송이 야생화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 그리고 성경대로 예수 믿으면서 범사에 겸손한 사람..
<이런 내 마음> 9월4일 2022년 집을 나설 때 머리를 빗고 옷 매무새를 살피듯이 사람 앞에 설 때마다 생각을 다듬고 마음을 추스려 단정한 마음가짐이 되면 좋겠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를하고 거울을 보듯이 내 마음도 날마다 깨끗하게 씻어 진실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보면 좋겠습니다.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고 치료를 하듯이 내 마음도 아프면 누군가에게 그대로 내 보이고 빨리 나아지면 좋겠습니다. 책을 읽으면 그 내용을 이해하고 마음에 새기듯이 사람들의 말을 들을 때 그의 삶을 이해하고 마음에 깊이 간직하는 내가 되면 좋겠습니다. 위험한 곳에 가면 몸을 낯추고 더욱 조심하듯이 어려움이 닥치면 더욱 겸손해지고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내가 되면 좋겠습니다. 어린아이의 순진한 모습을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오듯이 내 마음도 순결과 순수를 만나면 절로 기쁨이 솟아나 행복해지면 좋겠습니다. 날이 어두워지면 불을 켜듯이 내 마음의 방에 어둠이 찾아들면 얼른 불을 밝히고 가까운 곳의 희망부터 하나하나 찾아내면 좋겠습니다. 헌데 이런 내 마음이 되길 소망함에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 더욱 좋겠습니다.
목회 칼럼 2022년 8월
<이타적 기독교인> 8월 28일 2022년
<이타적 기독교인> 임마누엘 칸트는 “이기주의”라는 논문에서 이기주의를 철학적으로 설명했다. 첫째, 논리적 이기주의로 자기생각과 판단, 이론은 늘 옳다고 하는 것이다. 둘째, 미학적 이기주의로 자신의 심미적 취향에 만족하고 자기 느낌이 항상 옳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사고와 감성을 절대화 하는 것이다. 세째, 도덕적 이기주의로 옳고 그르다고 하는 객관적 기준이 없고 내가 기준이 되어 내게 이로우면 이로운 것이요 내게 해가 되면 악하고 해롭다하는 것이다. 칸트의 언급처럼 오늘날도 삶의 모든 분야에 계층, 지역, 집단, 국가 이기주의가 팽배해 있고 현대인들은 거기에 깊이 함몰되어 간다. 기독자들도 이기주의 사조에 점차 빠져들고 있다. 아니 세상사람들은 자신들보다 교회와 성도들을 더욱 이기적이라고 비난한다. 그들은 세상과는 달라야 할 기독자들의 삶에서 이기적 모습만 보는듯 하다. 교회의 이기적 모습은 안타깝게도 세상사람들을 복음과 구원에서 멀어지게하는 빌미를 제공한다.기독자들은 이기적으로 평가되어선 안되는 존재들, 하늘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들이다. 거듭난 사람들에게는 그들만의 정체성과 삶의 가치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이타심이다. 성경의 위인들은 믿음으로 살면서 이타적 삶을 실천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타심의 본보기였고 교과서였다. 행 2장 말미에는 초대교회의 모습이 그려진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서로 교제하고, 일심으로 기도에 전념했다. 자신들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 공유했고, 기쁨으로 음식을 나누었다. 그들은 마음과 뜻을 같이 했다. 초대교회는 당시에도 세력을 발휘했던 이기주의를 버리고 나와 너, 우리 모두의 공동체 삶을 지향하고 구현했다. 하나님께서는 초대교회에 큰 축복을 베푸셨다. 각종 기사와 표적이 나타났고,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들이 더해 졌으며, 온 백성들에게 칭송을 들었다. 초대교회의 이타적 사랑은 예수님으로부터 기인했다. 예수님의 이타적 삶이 가장 극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주님은 온 인류를 위해 자신을 십자가 에서 희생하셨다. 따라서 새생명으로 거듭난 자들이고 예수를 믿음의 주로 고백하고 따르는 우리들은 자기 중심적이며 이기적인 삶을 중단하고 초대교회가 보여주고 예수님이 몸소 실천하셨던 이타적 사랑을 행하며 그것을 세상에 증거함이 마땅하다.오늘 현실이 척박할수록 우리들은 성령의 능력과 지혜 안에서 이타적 생각과 계획, 언행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며 세상에 희망을 주는 성도다운 성도들 이었으면 좋겠다. 믿음생활의 시작과 과정과 끝은 경건하고도 이타적인 사랑과 섬김이다!
<일터에서의 주님 임재연습> 8월 21일 2022년
<일터에서의 주님 임재연습> 16세기 카르멜회 수사였던 로렌스 형제는 오랜기간 수도원 주방에서 일했다. 그는 주방 일을 주님의 일로 여기며 하나님에 대한 지속적 사랑과 순종을 실천했고, 그 일을 통해서 주님의 임재하심을 실생활 속에서 누리는 법을 배웠다. 로렌스는 자신이 행한 바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나는 번철 위의 오므렛을 뒤집을 때에도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했다. 심지어는 지푸라기 하나를 줍는 일까지도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했다. 대다수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특별한 법을 찾고 있다. 그들은 갖가지 방법으로 그분의 임재하심을 느끼려고 많이 애쓴다. 헌데 큰 일이 아니더라도 무슨 일이든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한다면 그것이 좀 더 쉽고 직접적인 임재연습이 아니겠는가. 주님 일을하는 데는 복잡한 것이 없고 단지 정직하고 단순하게 주어진 일을 하기만 하면 된다. 로렌스 형제는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책들을 많이 읽거나 고행과 수련을 통해서가 아니라 주방에서 음식을 준비하고 식기를 닦는 자신의 일을 통해서 주님 임재를 느끼고 누렸다. 일터는 주님의 임재를 훈련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곳이다. 일터에는 다양한 성향의 사람들이있다. 믿는 이들이 있고 불신자들도 있다. 마주하기 까다로운 상사도 있다. 공동체 문화에 적응못하는 후배들도 있다. 행하는 일에 열매맺어 기쁠 때가 있고 열심냄에도 열매가 적어 패배감과 부족감을 느낄 때도 있다. 일터에는 여러 유형의 사람들과 이런 저런 사연및 사건들이 넘치며 따라서 압력과 중압감이 그치지 않는다. 기쁘던 힘들던 삶의 자리와 일터는 주님 앞에서 우리들을 단련시키는 방편과 도구가 된다. 교회, 가정, 일터에서의 일들은 주님께 사용되도록 우리를 훈련시키는 과정이며, 우리의 모자라고 모난 믿음을 한 단계 성숙, 성장시킬 수 있는 방편이다. 무슨 일을 하던 주님의 허락하심으로 알고 주께 대하듯 하면 그곳에 주님이 함께하신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함이 주님의 임재를 연습하는 것이다. 우리 성도님들께서는 매일의 경건훈련과 일상의 일들을 통해 주님 임재를 연습하시길 바란다.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간증은 매사에 주님의 함께 하심을 증언하는 것 아닐까?
<알파벳으로 풀어본 믿음생활> 8월 14일 2022년
Always... 항상 하나님을 생각하라. Busy... 아무리 바뻐도 하나님과의 약속은 지켜라. Check... 늘 믿음 안에 있나 스스로 체크하라. During Love... 하나님의 사랑에 계속 머물라. Enjoy...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즐겨라. First... 항상 하나님을 우선 순위에 두어라. Give...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드려라(헌신). High... 항상 저 높은 곳을 사모하라. Inspire... 그리스도를 닮음으로 사람들을 감동시켜라. Joy... 하나님을 기뻐하라. Kind... 하나님께 마음과 정성을 다하라. Leave... 믿음에서 떠나지 말라. Memory... 받은 은혜를 잊지 말라. No... 유혹에 대해 No라고 말하라. Only... 오직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섬겨라. Plan... 하나님의 계획이 높으심을 깨달아라. Question... 의심을 품지 말라. Remember... 늘 하나님을 기억하라. Show... 네 믿음을 나타내라. Test... 시험에 들지 말라. Use...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가 되라. Vex... 인내를 훈련하라. Will... 미래는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맡겨라. X... 하나님 앞에 불순종을 제거하라. Yesterday... 지나간 과거에 붙잡히지 말라. Zeal... 오직 하나님께 집중하라.
< 예배 십계명 > 8월 7일 2022년
기독교의 위대함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여 응답받음에 있다는 것이다. 예배 십계명을 소개한다. 1. 예배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최고의 축복이다. 예배 시간보다 귀중한 것이 없으므로 피치못할 일이 아니라면 예배에 빠지지 말라. 2. 예배시간 전에 교회에 와서 앞자리부터 의자 안쪽으로 먼저 온 성도 순으로 앉아 예배를 정성된 마음으로 드려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를 드려라. 3. 먼저와서 기도하고 주보를 보고 중요한 부분은 표시하고 성경본문을 찾아 읽고 믿음으로 예배를 기다리라. 4. 성령충만 받기 위해 마음 문 열고 찬양 인도자에 따라 찬송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뜨겁게 불러라. 5. 예배다운 예배가 되기 위하여 믿음 안에서 긴장하고 어떤 경우던 예배가 방해받지 않도록 주변단속, 마음단속을 잘하라. 6. 예배는 영적 전쟁인 동시에 영적 축제이다. 그러므로 졸거나 잡념에 빠지지 말고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 중심으로 정성껏 예배 드리라. 7. 예배는 생명이요 응답이다.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 말씀을 사모하면서 은혜롭게 설교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아멘하라. 8.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도록 영혼을 깨우며 성령께서 충만히 임재하도록 마음을 주님께 온전히 드리라. 9. 불신자와 초신자에게 매력적인 예배가 되게 하여 그들로 예배의 대상이신 주님을 사모하게 하고 예배를 생활화 하도록 하라. 10. 합심기도 시 믿음으로 주님께 부르짖고 간절히 하며, 받은 은혜 감사하여 준비된 예물을 정성껏 드리며, 서로 축복과 승리를 빌어주면서 예배를 장식하라.
목회 칼럼 2022년 7월
7월31일 <산 위의 보물>
<산 위의 보물> 7월31일 2022년 나는 육신의 건강을 위해 특별히 하는 운동이 없다. 걷기를 빼고는 말이다. 헌데 그것도 규칙적으로 걷진 않는다. 게다가 걷기 쉬운 평지를 주로 걷는다. 아, 한군데 드문드문 가는 산길 언덕이 있긴 하다. 동네 야산인데 제법 경사가 있어 평지보다는 걷기에 훨씬 힘이든다. 그래도 그곳에서는 운동이 된다 여기고 다른 곳보다 선호한다. 차를 주차한 곳에서부터 대략 1.2마일 거리의 산비탈을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코스이다. 도합 2.4마일(약 3.8킬로)을 걷는 셈이다. 언젠가 그 동네 야산을 오랜만에 걸었다. 헌데 반환점에 도달했을 때 더 가 보자는 마음이 생겼다. 거기서부터는 경사가 더욱 심해 올라가기에 숨이 차 오른다. 물론 젊은이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그래도 작정하고 올라가니 나도 모르게 올라가지는 것이었다. 어느정도 올랐을 때 한 공원이 나타났고 차들이 제법 주차되어 있었다. 어, 산 위에 공원이라니..풀잎 무성한 산등성이 가운데 터 놓은 산책 길로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곳에 매료되어 나 역시 한시간 정도 산책로를 휘젓고 다녔다. 산 공원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이런 물음이 생겼다. 인근 동네에 살면서도 나는 이 공원의 존재를 왜 지금까지 몰랐을까? 상상력과 시야의 한계 때문이었다. 나는 여지껏 반환지점에서 왜 조금만 더 올라오지 않았을까? 노력과 애씀의 결여에서였다. 인생과 삶의 구석에는 스스로가 생각하고 확신하는 것보다 훨씬 아름답고 신비로운게 참 많다. 하나님 세계에는 우리가 조금만 더 시야를 넓히고 조금만 더 노력의 발품을 팔면 보고 얻을 수 있는 것들, 행복의 요소들이 무척 많다. 이들은 우연히 얻어지거나 노력없이 습득되지 않는다. 상상한 만큼, 믿음으로 행한 만큼 얻게 된다. 높고 우아한 신앙의 경지에 이르려면 이만하면 됐다라는 자기 만족에서 탈피해 조금 더 경건 연습하고 조금 더 인품 훈련에 정진해야 할 것이다. 높음지수는 훈련지수및 열성지수에 비례한다. 그때 만난 그 산 공원은 나의 영혼, 생각, 몸 모두를 깨우친 보물같은 것이었다. 이제 길을 텄으니 이 보물을 좀 더 애용하겠다고 마음 다져 본다.
7월24일 <매력자본>
요즘은 70세 노인을 신중년이라 하며 80세 노인을 초로장년이라고 부른다. 헌데 신중년이던 초로장년이던 그에 걸맞은 매력적인 포인트가 있어야 한다. 영국의 정치 경제학 교수였던 캐스린 하킴은 자신의 논문에 <매력자본>이라는 개념을 발표했다. 그녀가 말한 매력은 잘생긴 외모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유머감각과 활력, 세련미, 상대를 편안하게 하는 기술등 다른 사람의 호감을 사는 멋진 태도나 기술을 말한다. 이런 멋진 태도나 기술은 나이가 많다고 쇠퇴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더 좋아질 수도 있다. 그것이 바로 경륜, 즉 나이 듦의 지혜이고 여유이다. 하킴 교수는 다음의 다섯가지를 충실히 실천하면 매력자본을 갖춘 멋진 노년기를 보낼수 있다 말한다. 첫째, 얼굴에서 웃는 모습이 떠나지 않게 하라. 그녀는 어떤 상황에서든 늘 웃으라 권한다. 때로는 일부러라도 그렇게 하라고 말한다. 나이가 들어서 웃는 얼굴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모든 이를 평안케 하는 아주 귀한 매력 포인트이다. 둘째, 항상 마음에 여유를 가져라. "이렇쿵 저렇쿵 따지거나 가르치러 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이들어서 세상사에 불평불만을 달고사는 것은 보기에 흉하다. 웬만한 일들은 양보하며 넉넉한 마음으로 웃으며 넘겨 버리면 매력이 더해진다. 세째, 품격을 지켜라. 하고 싶은 말이 있더라도 매우 긴요하지 않으면 가급적 삼가라 라고 권한다. 음식을 적당히 깔끔하게 들고 대화시 중언부언을 삼가고 사람앞에서 몸가짐을 흐트리지 말아야 한다.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외모에도 신경을 쓰고 옷차림도 제대로 가꿔야 한다. 해서 품격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넷째, 자신의 마음 마당을 항상 사랑으로 가득 채우라. 하킴 교수는 세상을 선한 눈,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삶이 더욱 의미있어진다고 말한다.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그대와 나. 모두가 존귀한 존재임을 깨닫게 되고 표정이 따뜻해지고 언어가 따사로워진다. 다섯째, 오늘 하루를 즐기며 살라. 즉 과거의 일, 특히 "왕년에 내가..."라는 말을 하지 말고 미래도 지나치게 걱정하지 말며 최선을 다해 오늘 하루를 즐겁게 살라는 것이다. 미국의 유일한 4선 대통령인 루즈벨트의 부인 엘레나 여사는 이렇게 말했다. ''아름다운 젊음은 우연한 자연현상이겠지만 아름다운 노년은 어느 누구도 쉽게 빚을 수 없는 예술작품이다." 그렇다. 오늘이라는 현재에 충실하자. 우리 모두, 주 안에서 멋지게 나이들어가며 매력적으로 살아가시길 기원한다.
7월17일 <성경공부 합시다>
학생시절에 공부를 정말 좋아했던 학생들이 얼마나 될까? 몇몇의 공부벌레 모범생을 제외하곤 대부분은 의무적으로 학교생활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매일의 학교생활은 알게 모르게 실력과 인격을 한뼘 한뼘 자라게 했다. 나 역시 공부벌레가 아니었고 머리가 썩 좋은 것도 아니었다. 좋아하는 과목(국사와 지리같은 암기과목)에는 열심내기도 했지만 응용하거나 분석을 요하는 과목(물리, 화학과목)에는 별로 취미가 없었다. 그렇게 중, 고등학교 6년을 보내다보니 탁월한 학생과는 좀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고 학업성적이 뒤쪽으로 가까운 낙제생 급도 아니었다. 그저 서당 3년개 풍월읊는 식처럼 보통수준의 성장과정을 다지고 밟은 정도였다. 공부에 올인하지 아니한채 썩 재미있고 의미있는 학창시절이 아니어서인지 그때는 세월이 빨리 흘러 졸업하는게 작은 바램이었다. 물론 졸업 후에는 공부말고 시대와 생활에 따른 또 다른 의무및 과업들이 기다리고 있음을 예상치 못했지만.. 먼 추억의 시절로 흘러간 학창시절을 요사인 제법 그리워한다. 약간의 후회도 곁들인 채 말이다. 과거에의 그리움은 나이가 들면 자연스러이 생겨내는 감정의 표징이지만 후회란 그 시절 했어야 할 일들에 열성을 내지 못함에 대한 부정적 감정인 것이다. 만약 학생의 신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좀 더 열성낼 터인데... 공부란 정녕 때가 있다. 그것은 머리가 순기능화 할 때이다. 요즘 두꺼운 책을 펼치고 공부하노라면 마음은 원인데 몸과 머리가 예전만치 안 따라준다. 다음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이미 읽었던 글자들이 기억의 건너편으로 사라지곤 한다. 좀 어려운 문장들에 대해선 이해력도 더뎌진 것 같다. 생각하고 해석할 여지가 있는 글들을 마주할 땐 몸도 자세도 흩뜨러진다. 이 또한 세월의 흐름탓이려니 순응하기에는 아직 남아있는 자존심이 반항하기에 버티는 마음으로 책들과 한판 씨름을 하곤 한다. 요즘 우리교회 성경공부를 활성화시켜야겠다는 바람이 부쩍 든다. 주일날 친교 후 식곤증에 피곤지수가 심화된 시간에 실시하는 성경공부이고, 또한 교우들의 연세및 신체여건상 길게 진행하기 힘든 성경공부이기에 혹 불참하더라도 이해가 간다. 그럼에도 더 늦기 전에 성경공부 참여를 권해본다. 세상공부는 때가 있지만 말씀공부는 참여해 앉아 있기만 해도 유익이 된다. 성경공부는 단순 정보습득이 아닌 은혜때문이다. 성경공부할때 은혜도 임한다. 머리, 이해, 암기기능이 퇴화했어도 은혜기능은 여전하다. 이 기능만 가동시켜도 성경공부 참여는 수지맞는 장사이다. 은혜기능마저 퇴행하기 전에 열성적인 성경공부반 학생이 되심이 어떨까?
7월10일 <이런 결단이>
한인수가 제한된 북가주에는 단체들이 많다. 종교모임을 위시해 동창회, 동우회, 친목회, 실업인회, 연합회등 많은 모임들이 있다. 그들중에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도 있고 비영리단체들도 있다. 또 그들중에는 존재해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싶은 외견상 객관성이 좀 떨어지는 단체들도 있고 반드시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단체들도 있다. 헌데 비중이 크던 작던, 남들에게 크게 인식되던 아주 미미하게 인식되던 간에 그 모임들이 나름대로 존재하는 이유는 거기에 충성하는 일꾼들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아름답게 성장해 가는 단체, 공동체에는 남들보다 더 마음쓰고 시간내고 물질바쳐 열일하며 헌신하는 일꾼들이 있다. 이것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이다. 대다수가 여유를 부리고 대충 일하는 것 같지만 노력하고 헌신하는 자들이 있기에 지구가 돌아가고 사회가 가동되는 것이다. 사회학자들은 이런 헌신하는 일꾼이 전체의 20%만 된다면 사회가 원활하게 움직인다고 주장한다. 나머지 80%는 그냥 존재하기만 해도 말이다. 이를 20대 80의 법칙이라 칭한다. 영성공동체인 교회에도 남달리 헌신하는 일꾼이 있다. 어느 교회이건 부름받고 편안하게 신앙생활하는 성도들이 있는반면 열심히 움직이며 수고하는 성도들도 있기 마련이다. 교회가 교회답게 기능, 구실하려면 충성하는 자가 필요하다. 어느날 갑자기 교회가 부흥하고 하늘나라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주님과 몸된 제단을 위해 더욱 많은 땀과 눈물을 흘리고 더욱 수고하는 일꾼들이 있을 때 교회부흥이 발생하고, 그곳에 천국이 다가온다. 오늘 임직예배를 드린다. 오늘 임직하시는 분들은 처음 직분을 받는게 아니라 오랜세월 주님과 몸된 교회를 위해 헌신해 오신 분들이다. 해서 본교회 교우들의 마음을 모아 이분들의 믿음과 헌신을 인정하고 치하하고 추대하는 차원에서 예배를 드린다. 임직하며 추대받는 모든 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축하드린다. 이전처럼 이후에도 감사, 감격의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며 교회를 사랑하며 주의 일에 열성다해 주시길 바란다. 아울러 우리 교우들 모두가 새로운 마음으로 교회를 받들어 주시길 부탁드린다. 우리들 주님 앞에서 이런 고백과 결단을 하면 어떨까? (1) 주님만 보고 믿음 생활하리라. (2) 겸손히 교회를 받들리라. (3) 남들 몰래 주의 일 하리라. (4) 연구하며 지혜롭게 헌신하리라. (5) 매사에 기도하며 성령의 감동케 하심을 따르리라, (6) 어려울때는 더욱 충성하리라. (7) 변치않고 열성 다하리라. (8) 지체들과 화목하며 충성하리라. 주님의 각별하신 은혜와 복이 산호세동산교회에 가득하길 기원한다.
7월3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많은 사람 가운데 있는 그저 평범한 또 한 사람이길 원하는가 아니면 필요한 곳에 꼭 있어야 할 소수의 사람이길 원하는가? 취향따라 가며 감정적으로 신앙생활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사명따라 가며 의지적으로 신앙생활하는 사람인가?성공과 출세를 목적삼아 주의 일을 하려고 하는가 아니면 희생과 섬김을 목적삼아 주의 일을 하려고 하는가?좁은 문으로 인내하며 기꺼이 가려고 하는가 아니면 넓은 문으로 쉽게 고통없이 가려고 하는가? 고난을 수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찾으려고 기도하는가 아니면 고난을 불평하고 현실을 원망하며 포기하려 하는가? 보여지는 외형을 보고 감각적으로 판단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내면의 깊이를 보고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인가? 눈물로 주의 길을 가려 하는가 아니면 눈물 없이 주의 길을 가려 하는가? 말씀을 읽고 깊이 묵상하며 주님의 심정으로 교회 일을 하는가 아니면 말씀과 상관없이 자신의 경험과 재주만으로 교회 일을 하는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주님 닮은 신실한 신앙인인가? 아니면 주님의 십자가를 회피하는 주님과는 먼 이름만의 신앙인인가? 나는 누구인가?
목회 칼럼 2022년 6월
6월26일 <무욕의 하늘>
최근 날씨가 무척 무덥다. 물론 곧 평상 기온을 되찾을 것이지만 지금은 기온이 수직상승하면서 본격적인 여름철에 접어든 듯 하다. 게다가 가뭄으로 물 부족 현상이 참 심각하다.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이런 자연세계의 상황을 바라보면서 여지껏 그랬듯이 주님의 손길을 구한다. 헌데 요즘의 하늘을 바라보면 무더위와 가뭄 현상, 그리고 어수선한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다소 위축되었던 가슴이 확 띄이고 무언가 설렘 같은 분위기가 생겨난다. 하얀 구름을 조각조각 걸치고 있는 여름 하늘이 참 드높고 푸르다. 하늘을 물먹이고 있는 코발트 색 물감이 당장이라도 우리 위로 쏟아질 것 같다. 하늘을 향해 두 손을 활짝 펴서 기지개를 해본다. 움추렸던 몸과 마음에 하늘의 에너지를 잔뜩 불어 넣는다. 헌데 하늘은 그 어느 것도 영원히 잡아 두지 않는다. 아름다운 코발트 물감, 정겨운 구름, 사나운 바람, 세찬 비, 투명한 이슬, 희미한 안개등 하늘을 수놓고 채우는 것들을 잠시동안만 붙들고 있을 뿐 이후에는 그것들을 그냥 흘려 보낸다. 나이들어가면서 꼭 필요치 아니한 것들이 제접 보인다. 젊은 시절 내내 필요했다 여겼던 많은 계획, 많은 일, 많은 말, 많은 행위, 많은 소유, 많은 권세들이 살아보니 그만큼 필요치 않았음을 알게 된다. 이후로도 손에 잡아야 할 것들보다는 놓아야 할 것들이 더욱 많을 것임도 깨우친다. 헌데 지금 보고 깨우치게 된 것들을 예전에는 왜 못 보고 잘 몰랐을까? 진즉 알았다면 삶이 좀 더 평안하고 자유롭고 풍성했을 터인데.. 그것은 세월의 경험과 통찰력의 부족때문이며 무엇보다 욕심 탓이리라. 그랬다. 욕심을 내려놓으면 삶이 이리 보이는 것을.. 삶이 애초의 생각보다는 단순하다는 것을.. 하늘은 욕심이 전혀 없다. 하늘은 어떤 것도 자신의 소유로 삼지 않는다. 하늘은 때 되면 비워내고 흘려버리고 쏱아낸다. 무욕의 하늘이 전해주는 교훈에 가슴이 살아 감사한다.
6월19일 <삶이 쉽지 않아도>
지척을 드리우는 자욱한 안개처럼 마음의 눈이 뿌여질 때가 있다. 소소한 바람에 갈피 못잡는 야생화처럼 뜻이 흔들릴 때가 있다. 전신에 마비증세 온 것처럼 매사에 손가락하나 움직이기 싫을 때가 있다. 치루기 싫은 시험처럼 해야 할 일이 지겨울 때가 있다. 흉물스러운 괴물처럼 사람이 싫어져 멀리 하고 싶을 때가 있다. 채무자 다루듯이 하나님께 소리지르며 항변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다가 요나처럼 어디론가 도피해 홀로이 눈물 쏱고 싶을 때가 있다. 사면 팔방이 막힌 듯 답답하고 먹먹하고 힘들고 아프고.. 삶의 모퉁이에서 어둡고 우울한 사연들이 끊임없는 요즈음 우리 모두에게 삶과 사람들, 일과 사명들이 쉽지 않다. 조금 나아지면 후엔 더욱 곤고해진다. 인생의 밀물과 썰물이 격투를 벌인다. 헌데 깊이 헤아려보면 삶이 힘들다는 것은 그것을 느낌만큼 노력했다는 것이며, 아프다는 것은 그만큼 감각이 살아 있다는 것이며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것은 좀 더 나은 앞날을 소원했다는 것이다. 힘든 인생조차 살아 있음의 자국이며 표식이며 주님 손길에의 염원인 셈이다. 주님의 사랑과 관심이 지속되는 한, 내일을 향한 믿음과 소망의 몸부림이 있는 한 여전히 거칠고 불합리한 현실속에서도 우리들은 완전히 넘어지거나 좌절하지 않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자신의 존재됨을 드러내는 여명처럼 우리들은 일어서서 여느 때처럼 또 하루를 살아낼 것이다. 그리고 하루치만큼 더 성숙해질 것이다.
6월12일 <천국으로 보낸 재료>
밴 다이크(van Dike)는 이러한 이야기를 하였다. 로마의 어떤 부자가 천국에 갔는데 한 천사의 안내를 받아서 천국의 이곳저곳을 구경하게 되었다. 천국을 구경하던 중 매우 아름답고 화려한 집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천국에서 다른 집들보다도 더욱 돋보이는 멋있고 근사한 집이었다. 부자는 부러운 말투로 안내하던 천사에게 물었다. ‘도대체 이 아름다운 집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그러자 천사가 말하길 “그집은 당신이 종으로 부렸던 사람의 집이요”라고 하였다. 깜짝 놀란 부자는 당혹해 하며 천사에게 불평하였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우리 집 하인이었던 자가 천국에서 이런 멋진 집을 소유할 수 있습니까?“ 그의 불평에 천사는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천국에서는 실수나 오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곳에서는 작은 착오조차 허용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가 땅에 살면서 보낸 재료로 이집을 지었을 뿐입니다.” 천사의 단호한 대답에 더 이상 우길 수 없었던 부자는 천국의 다른 장소로 가게 되었다. 더 가다보니 이번에는 너무나 맑고 허술한 집 한채가 보였다. 천국동네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집이었다. 부자는 어째 이런 초라한 집이 천국에 있는가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궁금하면 잠시도 기다리지 못한 성미라서 또 물었다. “저 허술한 집은 누구의 집인가요?” 천사는 좀 안됐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 집은 바로 당신 집 입니다” 라고 말했다. 이에 부자는 크게 놀라고 당황해 하면서 “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더럽고 누추한 집이 내 집일 수 있습니까? 혹시 주인을 착각한 것은 아닌지요?” 천사가 말하길, “천국에는 절대 오류가 없습니다. 실수도 없습니다. 착각도 전혀 없습니다. 이 집은 분명 당신 집입니다. 당신이 땅에 살면서 보낸 재료로 지어진 집입니다.” 지금 우리의 소유, 재능, 지식, 건강, 시간등은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어떤 일에 쓰여지고 있는지. 살아가면서 자신이 사용했던 모든 것들은 장차 하늘에서 누릴 상급과 축복의 재료들이다.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딤전6장 18-19절)
6월5일 <성령강림주일>
<성령강림주일> 기독교의 3대 절기는 성탄절, 부활절, 성령강림절입니다. 이처럼 성령강림절은 중요한 절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지 40일째,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시고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지 10일이 지난 후, 오순절 날에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약속을 믿고 간절히 기도하던 사람들에게 성령님께서 불같이 바람같이 강림하셨습니다. 성령강림주일은 성령님이 강림하심으로 최초로 (신약)교회가 세워진 날입니다. 성령강림은 신약교회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신약의 교회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성령께서 강림하신 날을 2,000년 이상 주일(主日)로 지켜왔습니다. 올해의 승천일은 5월 26일(목), 성령강림주일은 6월 5일인데, 이후 11월 27일 ‘대림절’ 전까지를 ‘성령강림절 후 주일’로 부릅니다.
보혜사(παράκλητος, 保惠師) 성령은 성경에서 물(생수, 강), 비(소낙비, 장마비, 이른 비와 늦은 비), 불, 바람, 기운, 권능, 숨, 호흡, 기름, 검, 이슬, 비둘기, 인, 술, 열매 등으로 상징됩니다. 영어 성경에서 보혜사는 Helper(조력자, 돕는 분), Comforter(위로자), Advocate(대언자, 옹호자), Counselor(상담자, 조언자), Intercessor(중재자), Strengthener(힘주시는 분), Standby(곁에서 항상 대기하시는 분) Defense(방어자, 피고측 변호인) 등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우리 가까이 계셔서 함께 하시는 보혜사 성령님과 친밀해져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성령님의 도움이 없이는 온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영원한 내주, 유일회적인 성령세례, 계속적인 성령충만으로 살아야 합니다. 성령님의 감동, 감화, 임재, 교통, 인도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매일 매일 성령님을 사모하고 초청하며, 환영하고 모시며 소망 중에 주의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면서 살아가시길 기원합니다.
목회 칼럼 2022년 5월
5월29일 <내겐 은혜인 것을> -오광수-
<내겐 모두 은혜인 것을> 5월29일 2022년 - 오광수 내가 아픔을 몰랐다면 이렇게 간절한 기도를 할 수 있었을까? 새날이 기다려지고 아침과 함께 찾아온 햇살이 저리도 고운 것을 내가 알기나 했을까? 사랑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반갑고 함께할 수 있음에 너무나 감사한데 더하여 또 다른 하루를 선물로 받음이 내겐 큰 은혜인 것을, 아이야! 하얀 보자기를 준비해두렴 보라색 실로 나의 이니셜도 수놓고 그리고 사랑하는 내 아내의 미소랑 처음 두근거렸던 내 심장의 수줍음을 담아 빨간 끈 가지고 열십자로 묶어서 고이 보관해두렴 내가 사는 이 세상은 사랑 때문에 참으로 아름답고 믿음이 있기에 진리를 깨닫고 소망이 있기에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음을, 아! 아름다운 세상 서로 도와 가며 살면 더 좋은 세상 그곳에 내가 살고 있는 것이 내겐 큰 은혜인 것을.
5월22일 <부부 생활에 대한 성경구절 10가지>
<부부 생활에 대한 성경구절 10가지> - 쉐인 프루잇(Shane Pruitt)
➀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2:7),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창2:22) ➁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와의 결혼을 만드셨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 ➂ 예수님은 남자와 여자와의 결혼을 분명히 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 할지니라 하시니"(마19:4-6) ➃ 좋은 배우자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잠18:22) ➄ 남편과 아내는 불필요하게 서로 다투면 안 된다. “다투는여인과함께큰집에서사는것보다움막에서사는것이나으니라”(잠21:9) ➅ 남편과 아내는 서로서로 성적으로 즐거움을 얻어야 한다.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고전7:3-4) ➆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게 충실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히13:4) ➇ 남편과 아내는 서로의 역할을 깊이 존중해야 한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골3:18,19) ➈ 결혼생활은 사랑과 존경이다. "너희도 각각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같이 하고 아내도 남편을 존경하라"(엡5:33) ➉ 결혼생활은 복음을 세상에 보여주는 것이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5:25)
5월15일 <마이너스 예수>
<마이너스 예수>
대다수 사람들은 소유, 자리, 종교, 명예, 문화, 건강, 감각, 기술등을 소원한다. 이런 것들로 성공, 행복의 근거를 삼기도 한다. 예전에는 나도 소유가 많은 부자이고, 위치, 이름도 있고 우울환자가 많은 이 시대에 심신의 평온함까지 누리며 살았으면 하는 바램을 살짝 가졌었다. 또한 연예인 부럽지 않는 외모, 몸매도 가져봤으면 했다. 참 멋진 바람 아닌가? 헌데 그것들을 인생의 절대가치로 여긴 적은 한번도 없었다. 솔직히 나에게 그것들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하나는 그것들 없이도 인생이 크게 흔들리지 않아서이다. 살아오면서 바라는 것들을 대부분 얻지 못했지만 간혹 얻었다 해도 기쁨이 크지 않았고 오래가지도 않았다. 따라서 얻은 것을 상실한다해도 별로 허무하거나 슬프지 않았다. 사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 중에는 없어도 인생이 그다지 요동치지 않는 것들이 대다수이다. 다른 더 큰 이유가 있다. 나에게는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온 생애를 전부 투자할 만큼 가치있고 의미있으신 분이다. 외람된 표현이지만 그분은 나의 힘, 에너지이고 삶이다. 나는 모태로부터 예수를 믿었고 그것은 현재 진행형이다. 앞으로도 주님이 나를 무관심의 골짜기로 유기치 아니하시는 한 그분에게 매달릴 것이다. 결코 겸손하거나 혹은 자기비하를 통해 특별한 호의를 보장받으려고 이런 말을 하는게 아니다. 나에게서 예수님을 빼면 남는게 하나도 없어서이다. 마이너스 예수라면 내 인생은 눈에 보이는 것과는 상관없이 정말 아무 것도 아니다. 나이 들어갈수록 예수님을 더욱 의존하게 된다. 주님 때문에 삶이 즐겁고 생기있고 감동적이며 때로는 주님이 부여하신 십자가 때문에 원망과 불평도 나온다. 나는 목사로서 남들보다 좀 더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분을 설교하고 증거한다. 때론 나 역시 세상시험과 도전에 직면해 믿음이 휘청거리지만 그럼에도 나의 목표는 예수영광을 보이는 것이다. 이해인 수녀가 이런 시를 썼다. “저에게서 주님 당신을 빼면 저는 남는 것이 없는 가난한 여인입니다. 하오나 당신 옷을 덧입히면 저는 남부럽지 않은 궁정의 여인입니다.” 재물을 잃으면 작은 것을 잃어 버리고, 명예를 잃으면 큰 것을 잃어버리고, 건강을 잃으면 전부를 잃지만 마이너스 예수라면 땅의 것만 아니라 영원까지 잃는다. 물질적이던 정신적이던 모든 재화, 사물은 필요할 때 사용되어질 뿐 반드시 소유해야 할 대상은 아니다. 헌데 우리들이 반드시 소유해야 할, 아니 반드시 인생에 모셔야 할 분은 예수님이시다.
5월8일 <가장 아름다운 존재>
<가장 아름다운 존재> 꽃들은 모두 신비롭고 아름답다. 사람 눈에 낯익고 이름있는 꽃들은 물론 낯설고 이름없는 들꽃 들도 아름답다. 그들이 아름다운 것은 각각에게 주어진 계절, 공간 안에서 저만의 고유한 자태, 모양, 색깔, 향기, 패션, 그리고 풍경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꽃들이 아름답고 향기롭기에 벌과 나비가 날아들고 새들이 모여들고 벌레들도 기웃거린다. 꽃들의 아름다움을 보려고 사람들도 찾아온다. 사람들은 꽃의 아름다움을 시로 짓고 노래로 흥얼거린다. 그림으로 그리고 글로 표현한다. 꽃으로 장식품을 만들기도 한다. 꽃들을 화환으로 엮어 축하하기도 하고 조화로 만들어 슬픔에 동참하기도 한다. 헌데 아름다운 꽃보다 더 아름다운 존재가 있다. ‘꽃보다 사람이 아름다워’ 라는 어느 노래 가사 말처럼 사람이 더욱 아름답다. 그것은 온 우주에 이름이 아름다우신 주님께서 지으셨기 때문이다. 선하고 아름다우신 분이 지으셨다면 지으심을 받은 것 또한 아름답지 아니한가 ? 게다가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당신의 형상을 덧입히시고 영화와 존귀의 관을 씌우셨다. 죄성, 연약성, 한계성으로 인해 주님형상이 상당부분 파손되었지만 그럼에도 사람은 여전히, 충분히 아름답다. 사람들 중에서도 특히 아름다운 존재가 인생의 산전수전 모두 경험한 우리 부모님들이다. 육신의 눈으로 보면 그들은 왜소해 보이고 초라해 보인다. 헌데 정신적 영적 눈으로 보면 현저히 탄력을 잃은 그분들의 피부가 아름답다. 세파에 패이고 주름진 얼굴이 아름답다. 자녀 위해 내내 일하시느라 굵어진 손마디가 아름답다. 쉬어진 목소리가 아름답다. 초점과 시력이 약해진 눈동자가 아름답다. 자식들을 위해 평생 흘린 피, 눈물, 땀이 아름답다. 구비구비 역사의 격변기를 안고 살아온 그분들의 온 삶이 아름답고 숭고하기 그지없다. 부모님들의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풍경이다. 자녀들을 향한 온갖 사랑의 사연들이 모아진 맑은 샘이다. 그 샘은 깊이를 가늠 할수 없다. 또 희생의 향기가 처처에서 피어나는 초록 산이다. 그 산의 높이는 가히 헤아릴 수 없다. 부모님이 존재하시는 모든 순간은 어느 것과도 견줄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며, 그분들이 돌아가신 후에도 눈물 솟도록 기억될 아름다운 마음의 풍경이다. 아름다운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떨린다. 영혼이 울리고 절절한 그리움이 생겨난다. 꽃향기 퍼지는 가정의 계절에 부모님들을 기억하고 더욱 사랑하자. 모든 부모님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전하며 주님의 평강과 은혜를 구한다.
5월1일 <하나님을 닮은 거룩함>
<하나님을 닮은 거룩함>
러시아 페테르 부르크에 관청 하급공무원인 아까키 예비치라는 자가 있었다. 그에게 한가지 소원이 있었다. 페테르 부르크의 혹독한 겨울을 나는데 필요한 비싸고 고급진 외투를 갖는 것이었다. 그는 소원을 이루기 위해 검소하게 지내며 열심히 일했고 드디어 92 루블을 저축해 외투를 구입했다. 그날은 그에게 소망을 이룬 성공의 날이기에 청사 사람들은 이를 축하하며 연회를 열었다. 헌데 연회를 끝내고 기분좋게 집으로 돌아가던 중 그만 외투를 강도당했다. 그는 매우 절망했다. 단순히 고급 외투만 강탈당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성공과 행복까지도 강탈당했기 때문이다. 그는 깊이 속상해 하면서 좌절의 늪에 빠진채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다. 후에 그는 유령으로 페테르 부르크의 골목에 나타나 외투를 걸친 사람들에게 다가가 빼앗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중요 인사의 외투를 빼앗고 어둠 속으로 영원히 사라졌다. 이는 니콜라이 고골이 1842년 발표한 단편 소설「외투」라는 소설의 이야기이다. 세상에는 아까키 예비치처럼 한시적이고 허망한 것, 즉 고급 옷감을 위시 호화 주택, 비싼 승용차, 높고 우아한 자리, 충분한 은행잔고등 소유및 세상적 가치에 목표를 두고 이의 성취를 통해 성공과 행복을 즐기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소유가 절대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함에도 많은 이들이 그것을 추구하며 속고 살아 간다. 에릭 프롬은 “소유에는 행복이 없다. 행복은 존재에 있다”고 말했다. 기독자들에게 주어진 공통적 삶의 목표가 있는데 그것은 거룩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닮아 거룩해 지는 것이다. 거룩은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에릭 프롬이 말하는 존재의 개념이다. 거룩은 인간스스로의 노력의 산물이 아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이다. 성령님은 우리가 말씀과 기도에 전념할 때, 진리를 따라 행할 때, 죄를 철저히 회개할 때, 주님말씀에 순종하고 따를 때 거룩케 하신다. 인생 목표인 거룩함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의 생각과 언어, 행위는 순결하고 아름답다. 거룩한 자의 얼굴에는 하나님의 광채가 서려 있다. 그의 삶에는 행복과 기쁨의 강이 흐른다. 주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 즉 거룩한 자가 복이 있다 하셨다.
목회 칼럼 2022년 4월
2022년 4월24일 <조지 휫필드 목사의 고백>.
<조지 휫필드 목사의 고백> 조지 휫필드 목사(1714년∼1770년)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존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의 모태인 홀리 클럽 운동에 참여하였다. 성공회 사제가 된 그는 1736년 자신이 세례를 받은 글로스터 교회에서 3년간 사목을 하였고, 복음주의적 감리교 운동과 함께 1739년부터 옥외 설교를 시작했하여, 감성적인 설교로 많은 젊은이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였다. 그는 미국에서도 활동하였는데 교단과 관계 없이 복음 전도에 힘을 썼다. 1740년 2차 미국 방문 시 조지아에 보육원을 설립하고, 순회 설교로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하였다. 특히 그의 노스햄프턴 교회 설교는 미국 개신교 부흥운동중 하나인 1차 대각성 운동에 영향을 줄 정도로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존 웨슬리를 '앞으로 죽어서 하나님 나라에 가면 주님 곁에 가까이 있을 사람'이라고 부를 정도로 존경하였다.헌데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은 서로 달랐다. 존 웨슬리는 노예해방 문제에, 조지 휫필드는 아동복지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존 웨슬리는 신자인 윌리엄 윌버포스의 노예해방 운동을 격려 하 였고, 조지 휫필드는 미국에서의 순회설교 시 보육원 기금 마련을 위한 설교를 하였다. 조지 휫필드는 30년 동안 매 주일 설교를 평균 50시간을 했다. 하루 7시간씩 설교한 셈이다. 하루에 7시간씩 30년을 쉬지 않고 설교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며 사람의 한계와 능력을 초월하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헌데 그가 설교 할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고,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은혜를 받고 새 사람이 되었다. 그의 설교에는 성령의 감화력이 있었다. 그가 훗날 몸이 쇠약해 졌을 때 주변 사람들이 그를 염려하면서 ‘좀 쉬어가면서 하세요.’라고 권했지만 그는 주의 일에의 열심을 잠시동안도 그치질 않았다. 휫필드 목사는 자신을 위해 걱정해 주는 사람들에게 도리어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녹슬어서 없어지는 사람이 되지 않고, 닳아서 없어지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휫필드 목사는 이 고백대로 평생을 주님을 위해 헌신 충성하다가 56세때 하늘나라로 갔다. 그는 후대들에게 충성하는 삶이 어떤 것 인가를 자신의 삶을 통해 여실히 보여 주었다.
2022년 4월 17일 <예수 부활의 날에>
2022년 4월 17일 <예수 부활의 날에> 오늘은 부활주일이다. 부활은 십자가와 함께 기독교 핵심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 윤리, 정직, 정의는 타종교에도 있지만 부활에 대해선 오직 기독교에게만 있다. 예수님부활은 신화, 전설, 허구,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일어났던 역사적 진실이다. 예수 부활에 대한 증거들이 참 많다. 성경이 그것을 증거한다. 성경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 측근들에게 10차례이상 나타나심을 기록한다. 특히 500명의 제자들에게 일시에 나타나셨다. 우리 믿음도 예수부활을 증거한다. 우리가 믿는 분은 죽으신 과거의 주님이 아니라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생명의 주님이시다. 삶의 변화도 부활을 증거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 가치관, 삶의 내용, 철학, 목표, 운명등이 바뀌었다. 예수 부활에는 효능들이 있다. 인생에 기쁨을 가져다 준다. 슬픔, 불행의 기저에는 죽음이 있다. 헌데 부활은 생명을 가져와 절망과 비애를 사라지게 하며 기쁨이 충만케 한다. 주님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던 마리아, 방안에서 떨던 제자들,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기쁨으로 넘쳤다. 또 우리를 담대하게 만든다. 인생 불안은 예수님 부재시 발생한다. 믿고 따를 절대자가 없다면 누구던 인생과 삶이 고독하고 두렵다. 헌데 주님은 부활하시어 인간들의 공포와 두려움을 잠재우시고 우리들 생을 담대하고 강건케 해주셨다. 그리고 부활은 사명의식을 회복케 해준다. 죽음은 모든 것을 망각하게 하고 헛되게 만들지만 부활의 생명은 우리로 할 일을 찾게 하고 그 일이 왜 필요한지를 깨닫게 한다. 부활주일은 단 하루이다. 허나 십자가로 시작된 구원은혜는 일평생이다. 우리들은 매일 매일을 십자가의 빛 안에서, 부활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이에 감사함으로 살아가야겠다. 그리고 바울의 권면처럼 ‘믿음에 더욱 견고히 서서 주의 일에도 최선다해야’ 겠다. 요한 웨슬레는 ‘흙으로 돌아가기 전에 주님 위해 기꺼이 무언가를 하고 싶다’ 했다. 날마다 십자가를 붙들고 부활의 생명으로 살아가시길 바란다.
2022년 4월 10일<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50가지 이유>
존 파이퍼 목사의 ‘The Passion of Jesus Christ’라는 책이 있다. 부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50가지 이유’이다. 그들중 30가지를 여기에 열거한다. (1) 하나님의 진노를 한 몸에 받으시기 위해, (2) 하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3) 순종을 배워 온전케 되시기 위해, (4) 몸소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기 위해, (5) 죄인들을 향한 주님 사랑과 은혜의 풍성함을 보이시기 위해, (6) 많은 사람을 위한 속죄제물이 되시기 위해, (7)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해, (8) 우리가 정죄받지 않게 하기 위해, (9) 할례와 의식법을 폐지 하시기 위해, (10) 우리를 거룩하고 책망받을 것 없는 온전한 백성으로 만드시기 위해, (11) 우리에게 선한 모든 것을 확보해 주시기 위해, (12) 우리의 도덕적 신체적 질병을 고쳐주시기 위해, (13) 우리를 악한 세대에서 건져 주시기 위해, (14)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기 위해, (15) 우리를 그리스도의 소유로 삼으시기 위해, (16) 우리가 지성소에 담대하게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 (17) 인간의 연약함을 동정하고 도울 수 있는 제사장이 되시기 위해, (18) 우리를 조상의 망령된 행실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19)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살도록 하기 위해, (20)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도록 하시기 위해, (21) 십자가가 우리의 자랑이 되도록 하시기 위해, (22) 선한 일에 열심인 백성을 세우시기 위해, (23)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제자들을 세우시기 위해, (24) 우리가 죽을 때 즉시 주님과 함께 있도록 하시기 위해, (25)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도록 하기 위해, (26) 사탄의 세력을 무장해제시키기 위해, (27)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28) 우리를 최후 심판에서 구하시기 위해, (29)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시기 위해, (30) 아무리 악한 상황도 선으로 바꿔 놓으신다는 것을 입증하시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다.
2022년 4월 3일 <인생을 해하는 법>
<인생을 해하는 법> 2022년 4월 3일 아름다운 꽃이 많이 있는 화단을 망쳐버리는 방법을 아세요? 그것은 그 꽃밭에 불을 지르고 물을 많이 부어 버리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수고하지 않아도 쉽게 망칠 수 있는 비결은 그 화단을 그냥 내버려 두면 됩니다. 그러면 나중에 잡초가 무성해지고 저절로 망쳐집니다. 어떻게 하면 친구 간의 우정을 망쳐 버릴수 있을까요? 돌아다니면서 마구 헐뜯고 비방을 하면 그 친구의 우정을 크게 배반하게 되어 우정은 금이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수고할 필요가 있나요? 그 친구가 내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냥 버려두면 우정은 사라지게 되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내 인생을 망칠 수가 있을까요? 방탕하고 법을 어기고, 타락해 버리고 건강을 마구 상하게 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수고하지 않아도 세상이 악하게 돌아가는 대로 그냥 나를 방치해 두고 그냥 편하게 두면 나는 저절로 망쳐 버릴 수가 있읍니다. 또한 내 영혼을 어떻게 하면 망쳐 버릴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의 진리를 철저하게 반대하고 나서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수고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삶속에서 하나님이 안계신 것처럼, 내 영혼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방관해 버리면 나의 영혼을 망칠 수가 있습니다. 아무런 관심도 갖지말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말고, 어떠한 행동도 하지말고 그냥 자신을 방관함으로 내버려 두십시요. 그러면 나의 인생, 나의 영혼은 철저하게 그리고 무참하게 망쳐서 멸망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 그러고 싶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절대로 방관할수 없는 것이 바로 우리들 자신의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우리들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잃은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영혼의 내적 고결함과 고귀함을 잊어버리고 물질적인 삶의 가치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영혼의 가치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은 이 고귀한 영혼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합니다. 지금이 바로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그 무언가를 해야할 바로 그때 입니다. 우리영혼이 하나님을 바랄 때 거기에 천하보다 더 귀한 고귀함이 있습니다.
목회 칼럼 2022년 3월
2022년 3월 27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2022년 3월 27일 지금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 부르던 시절에 촌에 살고 있는 한 어린 소년이 국민학교에 입학하여 처음으로 학교를 가게 되었다. 당시 일이 몹시 바쁜 어머니는 아들에게 도시락을 챙겨주며 다리를 건너서 곧바로 가면 학교가 나오니 잘 찾아 가라고 일러주었다. 헌데 다리 위에 이른 소년은 아래 물 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예쁜 물고기를 발견하고는 도시락을 팽개쳐두고 물가로 달려 내려갔다. 그리곤 물고기를 잡으려고 첨벙대다가 이번에는 아름다운 나비를 보고는 그것을 잡으려고 따라 다녔다.이러저리 뛰는 사이에 소년은 다리에서 점점 말어졌고 나비잡기를 포기했을 때에는 이미 길을 잃어버린 후였다. 당황한 소년은 기도하기로 마음 먹었다. 헌데 소년이 알고 있는 기도는 단 두가지 뿐이었다. 하나는 ‘하나님 이제는 잠잘 시간입니다”로 시작되는 기도였다. 그 기도는 소년의 생각에도 지금은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또 다른 기도는 주기도문이었는데 그것이 훨씬 어울릴 것 같았다. 소년은 무릎을 꿇고 앉아 소리내어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늘에 계신”까지 말한 소년이 흐르는 눈물을 닦고 나서 북받치는 설움으로 “우리 아버지” 라고 말할 때였다. 누군가 등뒤에서 소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년의 아버지였다. 아들이 처음으로 학교가는 날이라 걱정되어 뒤쫓아 온 것이었다. 그후 소년은 목사가 되었고 삶과 사역중 힘들고 어렵고 어찌할 바를 모를 때는그때 일을 회상하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외쳐 부르며 기도하곤 했다. 하나님은 늘 우리 가까이 계신 분이시다. 우리 식탁과 침대에 함께 계시고 학교, 일터, 사업터, 여행지, 기도처소, 예배장소등에 함께 계신다. 난민촌에 난민들과 함께 계시고 전쟁터에 군인들과도 함께 계신다. 코로나 19로 병원에 입원중인 환자들과도 함께 계신다. 주님은 지치고 상처받은 영혼들과 함께 하셔서 그들을 도우시고 힘주시고 일으켜 주시고 회복시켜 주신다. 우리들이 아버지를 찾고 부르는 순간 주님은 어디선가 짠하고 나타나신다. 예레미야 는 “여호와께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했다. 오늘의 시대는 이전보다 더욱 악하고 고통스런 시대 이다. 이 시대에 우리가 힘써 할 일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여’ 라고 외치며 부르짖는 것이다.
.2022년 3월 13일 <모든 소중한 날들>
<모든 소중한 날들> 2022년 3월 13일 인생 여정에는 오랫동안 지속되길 바라는 행복의 시간들이 있고, 어서 기억의 건너편으로 지나가길 바라는 시련의 시간들도 있다. 헌데 세월이 흐른 후 구비구비 인생길 돌아보면 행복의 시간들과 시련의 시간들 모두가 소중하고 그리운 시간들임을 느끼게 된다. 행복하면 행복한대로 힘들면 힘든대로, 건강하면 건강한대로 연약하면 연약한대로 매순간 의미가 있고 아름다움과 배움도 있다. 모든 삶 안에는 살아내며 존재해야 할 뚜렷한 뜻과 당위가 있다. 행복의 시간들은 평생 곱씹고 음미하며 힘을 얻는 복된 추억으로 남겨지며, 고통의 시간들은 성숙함에 이르는 영적 깨달음과 연단의 교훈으로 남겨진다. 무엇보다도 모든 형통과 고난, 행복과 불행의 시간들 안에는 내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 주님은 우리가 기뻐할 때 어린애마냥 같이 기뻐하시고, 우리가 고통 중에 울 때 같이 우신다. 주님은 당신의 병에 우리의 눈물들을 정성껏 주어 담으신다. 생애동안 아름다운 추억과 영혼의 연단이 쌓여가고 주님의 함께 하심이 있기에 우리들은 지금까지의 날들이 참 애뜻하고 소중했음을 헤아리며 배우게 된다. 우리가 살며 지나온 날들은 현실적 성취, 열매와 상관없이 매 순간이 소중한 날들이고 가슴벅찬 시간들, 단 하루도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한 날이 아닌 주님의 약속이 있는 희망의 날들이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열악한 상황, 소요스러운 환경에 휘둘린채 휘청거리거나, 인생이 잘 나가고 있을 때 손에 잡히는 열매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모든 날들 묵묵히 주님과 동행하면서 성실히 세월의 강을 건너시라. 하면 훗날 강 건너 편에서 지나온 삶을 떠올릴 때 평안과 위로, 따뜻함의 미소가 영혼과 얼굴, 온 몸에 번지게 되리라.
2022년 3월 6일 <사순절의 감사>
<사순절의 감사> 2022년 3월 6일 잠시, 뛰던 발걸음을 멈추고 기도 드립니다. 아프고 피곤할 때 소망을 주셨으며 가족을 지켜 큰 사고 없게 하시고 때로 고통 속에 헤엄 치면서도 아주 빠지지 않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머리 둘 곳 없었던 주님에 비하면 방이 두, 세 개 있는 집이 있고, 외롭고 배신당한 주님에 비하면 못 참을 만한 악인도 없었고, 비난 속에 사신 주님에 비하면 가끔 칭찬도 받은 것을 감사합니다. 내 인생에 폭풍이 있었기에 주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며, 가끔 십자가를 지게 해 주셨기에 주님의 마음을 배울 수 있었음을 감사드립니다. 나를 사랑해 준 사람에게 감사하고 나를 공격해 준 사람에게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나를 더 너그러운 인간으로 만드셨습니다. 때때로 가시를 주셔서 잠든 영혼을 깨워 주셨고, 한숨과 눈물도 주셨지만 그것 때문에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도 배웠습니다. 실수와 실패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겸손을 배웠습니다. 날마다 평범한 생활 속에서 감사를 발견하는 지혜를 주소서. 무엇이 생겨서가 아니라, 무엇이 나에게 발생하지 않음을 감사하게 하소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귀와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과, 편리한 세월에 태어난 것과, 세어도 세어도 끝이 없는 그 많은 감사를 알게 하소서. 남과 비교하며 살지 말게 하시고, 질투의 화산 속에 들어가지 말게 하시고, 돈을 목적 삼게 하지 마시고, 으뜸을 자랑으로 여기지 않게 하소서. 사랑의 속삭임을 입술에 주시고 감사의 노래를 내 심장에 주소서.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 자랑하게 하옵소서
목회 칼럼 2022년 2월
2022년 2월 27일 <벽돌 두 장>
어떤 큰 교회가 새로운 건물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교인 모두의 의견이 일치되었으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어떤 모양으로 지을것이냐의 문제를 놓고 회의를 열기만 하면 사람마다 의견이 분분하여 좀처럼 일이 진척되질 않았다. 이에 조금은 지친 목사는 어느 날 저녁시간을 정해서 교회건축 문제를 놓고 온 교인이 함께 기도하기로 선포하였다. 헌데 막상 기도회에 참석한 인원은 극소수였다. 그 중 한 여인은 아이를 맡아 줄 사람이 없어 여섯살 딸을 데리고 왔다. 기도회가 시작되었으며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그 꼬마 소녀도 이 기도모임이 교회 건축을 위한 기도회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아이는 그것에 대해 어머니에게 꼬치꼬치 캐물었다. 다음날 아침, 그 소녀아이가 슬그머니 집을 나왔다. 나중에 이를 알고 깜짝 놀란 어머니는 딸을 찾아 나셨는데 얼마 후 교회사택 마당에서 목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아이를 발견하였다. 목사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고 옆에는 벽돌 두 장이 실려 있는 아이의 장난감 손수레가 놓여 있었다. 그 두 장의 벽돌은 교회 건축을 시작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아이가 목사에게 가져온 것이었다. 그 다음 주일 아침 예배시간에 목사는 이 일에 대해 교인들에게 이야기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교인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그리하여 소녀아이가 바친 두 장의 벽돌은 크고 아름다운 교회를 새로이 건축하고 주님영광 드러내는데 큰 원동력이 되었다. 지성인들이 모여 회의를 하다보면 배운 만큼 좋고 바람직한 아이디어들이 많이 생산될 것이다. 헌데 어떤 때는 회의 결과가 반드시 좋은 결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모임 횟수 만큼 분열과 갈등이 야기되기도 한다. 각 포지션 별로 최고의 선수들로 구성된 농구팀이 종종 경기에서 패배하곤 한다. 모든 선수들이 스스로 능력있다 여기어 크고 화려한 풀레이만에 지중해서이다. 크고 신비롭고 아름다운 일은 기도와 행동이 담긴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드넓은 강이 아주 작은 시냇물로 인해 형성되는 것처럼 말이다. 아니, 주의 일에는 작은 일이 없다. 주님을 영광되게 하는 일은 어떤 것이던 크고 위대한 일이다. 기도하며 드린 소녀아이의 벽돌 두장이 아름다운 교회건축의 초석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들의 작은 섬김, 작은 헌신, 작은 행동들이 모여 교회다운 교회를 건설하고 주님 역사를 영광스럽게 써 나갈 것이다.
2022년 2월 20일 <말씀의 행함>
대부분 신앙인들은 종종 꾸준한 성경읽기를 계획하곤 한다. ‘이번에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적어도 일독은 해여겠다’ 다짐한다. 어떤 목사님이 금년에 성경을 백번 통독하길 결심했다고 얘기했다. 요즘에는 성경읽기만이 아니라 성경통사, 즉 성경을 전부 베끼어 옮겨 적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노안으로 눈이 침침해져 성경읽기가 어려워진 이들중에는 스마트폰 앱을 이용해 성경듣기에 주력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성경말씀을 가까이 해 말씀을 묵상하는 일에 열성다해야 한다. 또한 베뢰아 성도들처럼 말씀을 면밀히 연구도 해야한다. 헌데 그렇게들 성경을 듣고 읽고 쓰고 암송하고 배우려는 이유나 목적이 무엇일까? 이는 말씀을 제대로 알고 꺠달아 삶에 적용함으로 하나님께서 바라시고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일게다. 30여 년 전에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All I Really Need To Know I Learned In Kindergarten)>라는 책이 나왔다. 미국 뉴욕타임즈에서 34주간 베스트셀러로 꼽혔던 책으로 전 세계에 1700만권이 팔렸던 인기있는 책이었다. 이 책의 저자는 로버터 풀검인데 그는 “의미 있는 삶을 사는 데 꼭 필요한 옳고 그름,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의 문제를 내가 이미 알고 있다. 그게 그리 복잡하지 않다. 그러나 아는 것과 아는 대로 사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어떻게 살 것인지,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에 대해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나는 유치원에서 이미 배웠다.”고 했다. 성숙한 기독자들은 이미 유치원에서 배울만큼 이상의 성경지식을 지니고 있다. 많은 성경 속의 위인들의 믿음의 삶을 통해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지를 이미 또렷이 알고 있다. 어떤 평신도는 목사님보다 성경을 더 많이 더 잘 알고 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한 율법교사가 그랬다. 그런데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하시고 나서 그 율법교사에게 “가서 너도 사마리아인처럼 하라.”고 하셨다. 율법에 통달한들 무슨 의미가 있냐는 말씀이다. 아는 대로 행하며 살라는 말씀이다. 살아가면서 성경을 듣고 통독하고 쓰는 일은 참으로 귀하고 가치 있다. 허나 성경을 붙들기만 한채 그것이 삶과 생활속에 녹아지고 반영되고 투영되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무슨 소용이 있으랴. 지금부터라도 어릴 때부터 이미 알고 있는 말씀들을 작은 것부터 하나씩 매일매일 실천하는 계획을 세워봄이 지혜롭고 바람직한 믿음 생활일게다. 성경을 헤질 정도로 수 없이 읽고 베껴 쓴다 해도 성경말씀을 적용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말씀이 부여하는 축복을 찾지도 누리지도 못할 것이다.
2022년 2월 13일 <번개 불과 반딧 불>
상태로 판단해 볼때 순결은 불결함이 전혀 없는 상태이고, 진리는 비진리적 요소, 즉 악의 요소가 전혀 없는 상태이다. 거의 없는 상태가 아니라 전혀 없는 상태.. 전혀 없는 상태와 거의 없는 상태의 차이는 19세기 미국 소설가이자 기독교인인 마크 튜웨인의 비유에 의하면 번갯불과 반딧불의 차이이다. 그는 “올바른 단어와 거의 올바른 단어의 차이는 번갯불과 반딧불 차이이다” 했다. 명 작가다운 해석이다. 다른 사람에 비해 품성이 월등히 순결, 깨끗하고 완전 기준인 100%에 가장 근접한 99% 순결하다 해도 그에게 단 1%의 불결함이 있다면 그것은 온전한 순결이 아니다. 그래도 남들보다 순결지수가 높기에 억지로 순결 자를 붙인다 해도 그것은 희미하게 비추이다 곧 사라질 반딧불 순결에 속한다. 상품에 비유하면 진품과 매우 닮은 유사품이며 수학에 비유하면 절대치에 가까운 근사치이다. 유사품은 어떤 설명을 갖다 붙여도 진품이 될 수 없다. 요한 웨슬레는 기독자를 온전한 기독자(Perfect Christian)와 거의 온전한 기독자 (Almost Christian)로 분류한다. 거의 온전함이란 수치상으론 99% 정도이다. 이 수치의 기독자는 대단해 보이지만 마크 튜웨인의 비유에 따르면 그도 종내는 꺼질 반딧불 신앙인에 그친다. 성장이 멈춘 듯 보이지만 나날이 조금씩 자라가는 고목처럼 우리는 거의 온전한 믿음의 상태(99%)에 만족해서도 안주해서도 안되며 온전한 상태(100%)를 목표로 매일 자라가야 한다. 예수를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된 온전한 기독자되어 예수님의 완전하신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이는 참 힘드는 과업이지만 신앙생활의 최종 목적이다.
2022년 2월 6일 <인내의 덕>
미국에서 목회하다가 한국으로 사역지를 옮긴 후배목사가 전화로 경험했던 바를 얘기했다. 교회부임해서 청년들과 첫인사 나누는데 그들이 아래를 보더라는 것이다. 귀로는 목사의 말을 듣고 눈으로는 무릎에 놓인 스마트 폰을 보고 있던 것이다. 요즈음 스마트 폰의 찬송가 앱을 사용해 예배드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스마트 폰을 잘 다루면 생활이 참 편리하다. 스마트 폰은 알고 싶은 정보를 검색해 주고 생활과 활동에 필요한 것도 척척 알아서 해준다. 그래서인지 많은 이들이 스마트 폰에 빠져 산다. 그것과 함께 하는 시간이 사람들과 대면하는 시간보다 더 길다. 헌데 기계가 아무리 성능이 탁월해도 사람과 직접 대면할 때 느끼는 친밀감, 희노애락의 감정, 표정변화, 다정다감함, 비장한 결심, 고백, 감화력같은 것이 없다. 스마트 폰에는 인격과 사랑, 소망이 없다. 신앙생활을 하나님을 직접 대면해서 하지 않고 스마트 폰에서 정보 얻듯이 누군가를 통해서 한다면 어찌 될까? 광야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지 않고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지시를 받았다. 모세가 진 밖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동안 그들은 멀리서 지켜 보았다. 모세를 통하니까 편리하긴 했다. 헌데 자신들이 직접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보다 감동과 기쁨, 결단이 훨씬 부족했다. 믿음생활은 스스로 예수님과 대면하여 친구대하듯 그분과 대화하면서 영적우정을 쌓는 것이다. 감사하게도 우리들은 직접 믿음의 수혜자들이다. 우리는 언제든지 말씀을 통해 주님의 음성을 직접 들을 수 있고 기도를 통해 주님께 자신의 말을 직접 아뢸 수 있다. 목사 설교도 소중하고 누군가의 중보기도도 귀하지만 말씀 묵상중에, 기도중에 자신이 주님을 직접 대면하는 것이 더 귀중하다. 주님을 대면하는 횟수가 늘수록 더욱 주님을 닮아간다. 주님을 닮은 자가 참 기독자이다. 1c에 주로 이방인들로 구성된 안디옥교회는 불신자들로부터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을 들었다. 그들에게 예수닮은 흔적이 너무 뚜렷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셔서 생명주시고 지금 하늘보좌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 하시는 주님과 직접 대면하여 매일 삶의 방향과 계획을 여쭙고 인도함을 받으시라. 상황은 힘겨워도 매일매일이 아름답고 의미있고 풍성한 날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