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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회 칼 럼


 <하나님의 의를 구하자>                                   2026년 3월 1일 
우리는 성 프란시스를 잘 압니다. 그 사람이 유명하게 된 것은 “평화의 기도” 때문일 것 입니다. 그런데 프란시스가 더욱 더 유명해진 것은 그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은 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소유의 삶을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예수를 만나고 그를 믿은 이후에는 자신의 소유를 버리고 평생을 수도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새와 짐승들과 대화를 할 정도로 맑고 순전한 영혼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의를 덧입고 그리스도 안에서 늘 성결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범사에 주님을 닮은 사람을 입으려고 평생을 영적으로 애쓰고 노력했습니다.

잠언 12:28에 ‘의로운 사람의 길에는 생명이 있지만, 미련한 사람의 길은 죽음으로 이끈다” 말씀한다. 천로역정에는 주인공 기독도가 장망성을 떠나 천성을 향해 가다가 갈보리 언덕에까지 왔을 때 갑자기 등에 지고 있던 무거운 십자가가 떨어져 나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천사가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형제여, 네 죄가 사하여 졌도다."라고.. 이것은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의롭다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절대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또한 자신들의 미약한 힘에 의지하여 의로운 삶을 살려는 그리스도인들은 기쁨이 없는 부담과 실패만을 경험합니다. 어떤 사람이 사막을 여행하다가 마실 물이 동이 났습니다. 물은 찾을 길이 없고 목은 점점 말라왔습니다.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자기가 타고 있는 낙타를 죽여 그 속에 있는 물을 마시기로 했습니다. 그것이 자살 행위와 같다는 것을 알았지만 타는 듯한 목마름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자신의 힘과 지혜를 의지하다가 야기된 목마름과 갈증은 이렇게 처절합니다.

하나님 기준에 맞는 삶을 살 수 있는 힘은 우리가 하나님의 무한한 힘에 연결될 때에만 얻어 집니다. 매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주님께 간구할 때 그런 힘이 주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지식과 명예와 이성을 통해서 인간적 의를 얻으려 하지 말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를 먼저 구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고, 죄와 싸워 이겨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성령의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배부름입니다.


 <마지막 감사의 말>                                  2026년 2월 22일 
최근에 친근했던 지인들이 연이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늘나라로 거처를 옮겼다. 교단은 다르지만 형님처럼 가까왔던 한 목사님이 갑작스러이 혼수상태에 빠진채 병원에서 사투하시다가 주님께 가셨고, 이전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 하시던 한 집사님도 십년간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침대에서만 운신하시디가 이 땅에서의 소풍을 마치시고 주님 나라로 이주하셨다. 그리고 사랑하고 존경했던 김옥순 사모님께서도 90 년의 세상 삶을 끝내고 지난 2월 6일 부터 하늘나라의 생을 시작하셨다. 아니, 이 분들 모두 하나님께서 그렇게 불러 주셨다.
나는 위의 두 분의 장례예배에는 조문객으로 참석했고 김옥순 사모님의 장례예배는 직접 집전했다. 이 분들 모두 믿음 안에서 하늘나라로 올려지셨음을 확신하면서도 아직도 가슴이 먹먹하고 허전하다.
세상을 떠니신 분들의 죽음 앞에서 그 의미를 되뇌어 본다. 죽음은 끝이 아닌 한 생의 완성이다. 하나님께서 각 인에게 이루시고자 하는 목적이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감당하고 이루어감을 사명이라 한다. 죽음은 그 사명을 완성하는 날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여섯 번째 말씀은 ‘다 이루었다’(요 19:30)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다 이루었다는 의미, 즉 완성에의 고백이다. 또한 예수 믿은 자에게 죽음은 삶과 그 이유가 같다. 믿는 이들은 주님을 영접하는 순간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살며, 자신을 위해 죽지 않고 주님을 위해 죽는다. 즉 삶과 죽음의 이유가 동일하다. 롬 14:7,8은 삶과 죽음의 동일성에 대해 말한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김옥순 사모님의 하관예배를 마치고 땅 속에 내려 앉은 관 위에 꽃을 뿌리면서 마음 속에 담겼던 감사의 말을 전해드렸다. “김옥순 사모님, 격변기 생애를 인내하며 사시느라고 수고하셨습니다. 예수님 잘 믿고 사모님으로 주의 일에 헌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교회성도들을 사랑해 주시고 기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재림의 날에 다시 뵈올 소망을 붙잡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품 안에서 안식을 누리세요.사랑합니다.”

 목회 칼럼       (2026년 2월)
​<마지막 감사의 말>                                  2026년 2월 22일 
최근에 친근했던 지인들이 연이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늘나라로 거처를 옮겼다. 교단은 다르지만 형님처럼 가까왔던 한 목사님이 갑작스러이 혼수상태에 빠진채 병원에서 사투하시다가 주님께 가셨고, 이전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 하시던 한 집사님도 십년간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침대에서만 운신하시디가 이 땅에서의 소풍을 마치시고 주님 나라로 이주하셨다. 그리고 사랑하고 존경했던 김옥순 사모님께서도 90 년의 세상 삶을 끝내고 지난 2월 6일 부터 하늘나라의 생을 시작하셨다. 아니, 이 분들 모두 하나님께서 그렇게 불러 주셨다.
나는 위의 두 분의 장례예배에는 조문객으로 참석했고 김옥순 사모님의 장례예배는 직접 집전했다. 이 분들 모두 믿음 안에서 하늘나라로 올려지셨음을 확신하면서도 아직도 가슴이 먹먹하고 허전하다.
세상을 떠니신 분들의 죽음 앞에서 그 의미를 되뇌어 본다. 죽음은 끝이 아닌 한 생의 완성이다. 하나님께서 각 인에게 이루시고자 하는 목적이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감당하고 이루어감을 사명이라 한다. 죽음은 그 사명을 완성하는 날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여섯 번째 말씀은 ‘다 이루었다’(요 19:30)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다 이루었다는 의미, 즉 완성에의 고백이다. 또한 예수 믿은 자에게 죽음은 삶과 그 이유가 같다. 믿는 이들은 주님을 영접하는 순간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살며, 자신을 위해 죽지 않고 주님을 위해 죽는다. 즉 삶과 죽음의 이유가 동일하다. 롬 14:7,8은 삶과 죽음의 동일성에 대해 말한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김옥순 사모님의 하관예배를 마치고 땅 속에 내려 앉은 관 위에 꽃을 뿌리면서 마음 속에 담겼던 감사의 말을 전해드렸다. “김옥순 사모님, 격변기 생애를 인내하며 사시느라고 수고하셨습니다. 예수님 잘 믿고 사모님으로 주의 일에 헌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교회성도들을 사랑해 주시고 기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재림의 날에 다시 뵈올 소망을 붙잡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품 안에서 안식을 누리세요.사랑합니다.”

<친절한 자연>                                 2026년 2월 15일 
요즘 완연한 봄 날씨이다. 때로 비가 내리면서도 해가 날 때는 따뜻하고 하늘이 청명하다..
나뭇가지들에 물이 오르고 잎사귀들이 파릇파릇 돋아나기 시작한다. 돌 배나무 및 목련은 이미 꽃을 만개시키고 있다. 참으로 친절한 계절의 섭리이고 자연의 선물이다. 이런 결심을 해본다. 친절한 자연처럼 나도 좀 더 친절한 사람되어야지 라고..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십 수년전 한국을 방문 했을 때 공항에서 이용했던 택시의 기사님이다. 그는 함박 미소와 친절함으로 나를 대해 주었다. 몸에 배어있는 친절함이었다. 그에게 살짝 물었다.“불경기인 요즘 택시운전이 즐겁고 행복하신가요?”, “그럼요, 이 일이 신나고 즐겁습니다 “. 그 말에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2 주후 모국여정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오는 날 다시 그분 택시를 이용했다. 그는 지난번 처럼 또 친절했다. 그에게 물었다. “운전이 여전히 즐거우시죠?” 그가 뜻밖의 대답을 했다. “아니요. 지금은 즐겁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 몇일전 세상을 떠나셨어요” “아니, 그런 상황인데 손님을 여전히 친절하게 대하시는군요” “그야 승객분들은 아버지가 세상 떠나신 것에 하등관계가 없기 때문이죠. 제가 슬프다고 손님들에게 불친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 기사님 이름도 모르고 또 지금까지 운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헌데 무슨 일을 하던 예의 그 친절함으로 하겠지 라는 생각이 든다.
친절은 예수님의 정신이고 성숙함의 척도이다. 주님은 언제 어디서나 모든 이들을 친절히 대해 주셨다. 따라서 만나는 이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은 기독자들의 마땅한 바이다. 우리의 친절지수만큼 주변이 따스해지고 밝아지고 즐거워진다. 주님도 자연도 함께 즐거워 한다. 친절과 온유함으로 매일매일을 유쾌하고 복되게 살아가자.

<참 하나님의 자녀>                                 2026년 2월 8일  
오늘날의 교회및 교인들의 치명적 약점중 하나는 삶이 결여된 것이다. 삶이 결여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 수긍은 하지만 그 말씀을 제대로 실행치 않는다는 말이다. 말씀에의 순종에 주의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은 교회의 치부이며 복음의 영광을 가리우는 요인이며, 세상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는 주된 원인 이다. 아이가 태어날 때 부모가 그 아이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아이일 적에는 부모가 모든 것을 책임진다. 허나 자녀가 자라면서 조금씩 말귀를 알아듣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자녀에게도 요구되는 것이 생긴다. 먼저 부모에게 순종할 것이 요구된다. 만약 부모가 자녀에게 순종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좋은 부모가 아니다. 부모는 순종치 아니하는 자녀를 때로는 호되게 다루기도 한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자녀로 삼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다.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계획하시고 우리를 선택해 주셨고, 예수께서 오셔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으며, 성령이 오셔서 믿도록 마음을 움직여 주심으로 예수를 나의 구세주라고 고백하게 하시고, 나를 거듭나게 하셔서 하나님 앞에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신 것이다.. 이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은 믿음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없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에게는 순종할 것을 반드시 요구하신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삶을 살도록 요구하시는 것이다. 또한 성경이 가르쳐 주는 모든 교훈대로 행하라고 하신다. 순종하라는 말씀, 실천하는 삶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과소평가하며 신앙생활을 자기 마음대로 한다면 그는 영적으로 미성숙한 자이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 앞에 순종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면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지.. 우리는 말씀을 귀로 들은 것만큼 행동으로 순종하려고 하는지.. 우리는 배운 것만큼 살아보려고 몸부림치고 있는지.. 그렇다면 그것이 정상적인 믿음이다. 반면에 듣고 잊어 버린다면 믿음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그 말씀대로 순종이 따라오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어놓은 것과 같아서 나중에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반면에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며, 이런 사람이야 말로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이다.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 7:21) 

<참고 기다리는 삶>                                 2026년 2월 1일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당신의 기준에서 가장 좋고 복된 것을 주시지만 이를 기다리는 훈련을 시킨 후에 주신다. 무엇이던지 참고 기다림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참으로 소중한 것이고 더욱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이다. 반면에 기다림없이 쉽게 얻어지는 것은 외관과는 상관없이 가치가 덜하고 귀함도 덜한 것이다. 기다리며 인내하는 마음이 적으면 감사할 일도 그만큼 적어진다. 
현대는 무엇이든지 빨라야 하고 즉석에서 되어야 한다. 그런 세대이다보니 자라나는 아이들은 참고 기다린다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거의 가질수 없는 환경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먹는 음식만 보더라도 과거에는 곡식을 절구에 잘 찧어서 쌀을 만들고 반찬을 정성스럽게 만들며 여유롭게 기다렸다가 음식을 먹곤 했다. 헌데 요즘 음식들은 즉석에서 요리하고 급하게 먹게 끔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사람들은 가장 기본적인 먹는 문제에 있어서도 기다리는 것을 즐겨하지 않는다. 우리들에게 너무 익숙해진 삶의 편리함 앞에서 가장 귀한 인내하는 마음을 도적질 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참고 기다리는 마음을 잃어버리는 것은 인생의 복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기다림없이 귀한 것을 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신 많은 것들중 어느것 하나라도 기다림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는지..자녀를 얻기 위해 어머니는 열달 동안 기다리면서 마음과 몸의 준비를 정성껏 한다. 
목재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수십년 동안의 세월이 지나야 하고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여러 달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그냥 주실 수 있지만 사람에게 인내의 고귀함을 가르치기 위해 기다림을 통해 열매를 얻도록 하신다.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주님의 것을 얻을 수 있다. 주님은 성령을 받기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셨고 주님의 재림을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기다리라고 하신다. 인생의 구원은 기다림을 포기하느냐 아니면 끝까지 기다리느냐로 판가름나게 될 것이다. 성경에 끝까지 기다리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말씀한다. 야고보 사도는 기다리는 자가 상을 얻고, 인내가 성도를 온전하게 한다고 하셨다.
인생은 여러가지 아름다운 목적을 세워 놓고 때로는 기다리고 때로는 참고 때로는 희생하면서 그 목적을 얻을때 그것이 참으로 아름다운 삶이다. 
주님은 심지 않은 데서 가꾸시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들은 노력없이 얻어지는 부요, 기다림없이 얻어지는 삶이 영혼과 삶을 어둡고 의미없게 만든다는 사실을 직시하면서 매사 참음과 기다림으로 일관해야 할 것이다.​
 목회 칼럼       (2026년 1월)
< 행복자 >                               2026년 1월 25일  
분주하고 바쁜 사람들은 열심히 일해 더 크고 좋은 집, 고가 자동차, 명품등을 소유하고업적, 성취를 쌓으면 삶이 행복해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바라는 것을 얻었을 때 행복을 얻었다고 기뻐합니다. 헌데 그것 오래가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쁨의 강도가 현저히 줄어듭니다. 그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기 때문이죠. 외부 환경이라던가 어떤 조건을 충족시킴으로 얻어지는 것을 이름한다면 그것은 일시적 기분 좋음이지요. 정오에 기분 좋았다가 저녁때 쯤 사라지는 변덕스러운 감정.. 목회하면서 그런 변덕스러운 감정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사역에 조금 열매가 나타나면 기분이 좋았고 그렇지 않으면 그 기분 사라지곤 했습니다. 참 행복은 한시적이 아닙니다. 마르지도 않습니다.
환경, 상황, 감정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행위, 공로에서 기인하지 않습니다. 행복은 주님에게서 연유합니다. 주님이 모든 복의 근원입니다. 그 분이 복의 생산자이시고 수여자이십니다. 행복하려면 주님을 모시고 믿음 안에서 그분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모세는 고별 설교시에 이스라엘을 행복자라 칭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주님의 백성이어서입니다.
누구이던 복의 근원이신 주님과 함께 하면 행복합니다. 좁은 길을 걸어도 행복하고, 심지어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자리해도 행복합니다. 환경 상황이 잡아 흔들어도 주님 자녀인 우리는 여전히 행복자들입니다. 매일 주님과 함께 길을 걸으며 그분으로부터 연유한 행복을 마음껏 향유하세요. 그 행복에 감사드리며 주님께 영광 돌리세요..
​

​<말씀을 최우선시 하자 >                              2026년 1월 18일  
요즘 베이지역의 산 아래 도로들을 운전하노라면 몸과 마음이 상쾌해져 옴을 느낀다. 건기동안 휴면상태로 있던 산들이 지난 해 말부터 내린 비로 인해 많이 푸릇푸릇해 졌기 때문이다. 적당한 비는 자연세계에 생명을 회복시켜 준다. 식물들의 싹을 틔우고 망울을 맺게 하고 각종 꽃들을 피우게 한다. 헌데 자연계에 생명과 회복, 새로움을 가져다 주는 비처럼 우리의 영혼을 상큼하게 소생시켜 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비에 비유해 묘사한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토지를 적시어 싹이 나게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내신 일에 형통하리로다”(이사야 55:10-11).
하나님 말씀은 유사진리, 근사진리, 상대진리가 아닌 절대진리이다. 
말씀에는 참 빛이 담겨 있어 온 우주와 인간의 양심을 비춘다. 그 빛이 비추이는 곳에서는 실패 실수 싱행착오가 없고 실족함도 없다. 또 하나님의 말씀은 마귀와 대항할 수 있는 최강의 무기이다. 우리는 말씀으로 마귀의 도전과 유혹을 극복하고 이겨낸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주님 뜻을 온전히 이루는 최선의 도구이며 최선의 의의 병기이다.
현대교회들은 인프라가 제법 풍부하다. 인적, 재정자원이 있고 설비들이 갗추어져 있다. 프로그램들이 세련되었고 사역의 지적, 문화수준도 높다. 물론 이런 것들이 제대로 구성되어있지 못한 미자립교회들도 있다. 헌데 안타깝게도 현대교회들에는 세상을 향한 울림과 감동이 별로 없다. 말씀과 성령의 역사가 예전같이 않기 때문이다. 맥아더목사는 ‘1990년 이후 교회들은 말씀과 성령에 의한 부흥보다는 세상이 좋아하는 인기있는 제도, 조직, 프로그램들을 도입해 교회자체만을 위한 부흥, 축복에 힘쓰고 있다’고 말했다. 교회는 하나님중심, 말씀중심이어야 하는데 인간중심, 세상중심이 되어가고 있다는 말이다. 외적활동량이 많아도 말씀이 모자라면 결국 영적기근에 시달린다. 아모스 8:11에,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말씀한다.
인간은 섬처럼 각 분야에 서로 관련되어 있다. 경제 정치 문화 운동 예술 기술 취미등..교회가 이들을 다 가르치고 이야기할순 없다. 교회와 성도는 말씀을 최우선 으로 다루고 말씀에 철저히 순종해야 한다. 말씀이야말로 개인과 교회, 사회를 살리는 생명자체이며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본질이다. 
말씀이 왕성해질때 영혼에 생기가 넘치고 삶이 풍성해진다. 말씀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

<진주 목걸이>                           2026년 1월 11일   
한 미국인이 프랑스에 관광을 갔다가 어느 골동품 가게에 진열된 낡고 색이 바랜 진주목걸이를 500불에 샀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온 후 진주목걸이를 보석상자에 넣어서 방치해 두었다. 어느날 현찰이 필요해 그것을 집 근처 보석상에 가서 팔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보석상주인은 목걸이를 손 위에 놓고 두꺼운 돋보기를 가지고 한동안 감정을 했다. 이어 상기된 표정으로 뜻밖의 말을 했다. "20,000달러를 주겠으니 저에게 파십시오." 목걸이주인은 깜짝 놀랐다. "아니, 500달러에 샀는데 20,000달러를 주겠다니..” 그는 목걸이를 가지고 일단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그는 꽤 알려진 골동품가게를 찾아갔다. 그 가게 주인도 한동안 감정을 했다. 그러고도 손에서 그것을 놓지 않더니 직원들과 모여서 수근거렸다. 드디어 결정이 끝났는지 가게주인이 말했다. "50,000달러를 드리겠으니 이 진주목걸이를 저희에게 파십시오." 그는 더 놀란 채 가게주인에게 솔직히 물었다. "색이 바랜 목걸이인데 왜 그렇게 값이 많이 나갑니까?" 그러자 골동품 가게주인은 의외라는 듯이 "아니, 아직도 모르십니까?" 하면서 돋보기를 진주목걸이에 들이댔다. 그랬더니 거기에 깨알같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사랑하는 조세핀에게. 황제 나폴레옹으로부터.." 그리고 오른편에는 황제의 친필사인이 들어 있었다. 이어 가게주인이 말했다. "진주목걸이 자체만으로는 불과 몇 십불에 지나지 않지요. 허나 여기 적혀있는 글씨와 친필사인 때문에 그렇게 값이 많이 나가는 것입니다." 보석 값보다는 거기 적힌 글과 사인 값이 훨씬 더 비쌌던 것이다.
성도들은 예수께서 친필로 쓰신 편지이다. 고린도후서 3:3에서 바울은 성도들 가리켜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라고 말한다. 또 성도는 성령님의 사인이다. 에베소서 1:13에서 성도를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자"라고 칭한다. 우리는 흙으로 빚어진 질그릇같이 깨지고 상하기 쉬운 미천한 존재이지만 우리 마음판 안에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의 친필 글씨가 쓰여져 있고 우리 안에 성령님의 사인이 새겨져 있다. 낡고 바랜 진주목걸이에 새겨진 나폴레옹황제의 친필과 사인은 지울 수 있고 종내는 마멸되지만 주님의 친필과 사인은 누구도 지울 수 없고 마모되지도 유기되지도 않는다. 언젠가 마멸될 인간의 글씨와 사인도 때론 어느정도의 가치를 지니지만 영원한 주님친필과 성령사인의 가치는 인간의 것과는 비교자체가 불가능하다. 주님 글씨와 사인을 담고 있기에 우리는 어떤 값으로도 측정할 수 없는 가장 소중하고 가치있는 존재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주님의 생명으로 구속받은 유일한 존재이다. 이렇듯 존귀한 자이기에 우리는 함부로, 아무렇게나, 대충대충 살 수가 없다. 감사 감격속에 성도답게, 구속받은 자답게, 존귀한 자답게 살아야 한다. 천성향한 순례마치는 날까지 예수의 친필과 성령의 사인이 아로새겨진 순결한 진주목걸이로 존재해야 한다.

​<다시 새해의 기도>                          2026년 1월 4일                 - 박화목 -
곤욕(困辱)과 아픔의 지난 한 해
그 나날들은 이제 다 지나가고
​다시 새해 새날이 밝았다

동창(東窓)에 맑고 환한 저 햇살 함께
열려오는 이 해의 365일
지난밤에 서설(瑞雪) 수북히 내리어
미운 이 땅을 은혜처럼 깨끗이 덮어주듯
하나님, 이 해엘랑 미움이며
남을 업수히 여기는 못된 생각
교만한 마음 따위를 깡그리,
저 게네사렛의 돼지 사귀처럼
벼랑 밑으로 몰아내 떨어지게 하소서.

오직 사랑과 믿음 소망만을 간직하여
고달프나 우리 다시 걸어야할 길을
꿋꿋하게 천성(天城)을 향해 걸어가게 하소서.

이 해에는 정말정말 오직 사랑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난한 마음만이
이 땅에 가득하게 하소서,
하여 서로 외로운 손과 손을 마주 꼭 잡고
이 한 해를 은혜 속에 더불어 굳건히 살아가게 하소서.

​동구 밖 저 둔덕 겨울 미루나무에
언제 날아왔을까, 들까치 한 마리,
깟깟깟… 반가운 소식 전해오려나.
하그리 바라던 겨레의 소원,
이 해에는 정녕 이뤄지려나,
이 아침 밝아오는 맑은 햇살 가슴 뿌듯이 가득 안고
새해에 드리는 우리의 간절한 기도 꼭 이루어 주소서,
하나님, 이루어 주소서​
 목회 칼럼       (2025년 12월)
<끝맺음이 아름다운 인연>                  2025년 12월 28일                 <박현희>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에 수없이 많은 사람과 인연을 맺기도 하고 때로는 잊혀기도 합니다.
시작이 좋은 인연이기보다는 끝맺음이 좋고 아름다운 인연으로 머물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한결같겠지요.
시작보다는 끝맺음이 아름다운 인연으로 간직되길 원한다면 먼저 마음의 문을 열고 다가가는 노력 또한 게을리하지 말아야겠지요.
따스한 사랑의 마음을 지닌 당신이라면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일과 용서하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약간 부족한 듯 모자란 듯해도 조금은 너그럽고 여유 있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당신은 아름다운 사람이며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처럼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이제 한 해를 돌아보며 주어진 일과 맡겨진 사람에 대해 마무리해야 할 마지막 주일 입니다. 우리 각자는 오늘까지 자신의 삶에 대해 얼마나 감사하며 살아 왔는지요. 년초에 품었던 그 마음 가짐으로 살아왔는지요. 얼마나 내려놓고 비우며 살아 왔는지요. 주님이 부탁하신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며, 용서하며, 이해하며 살아 왔는지요. 또한 얼마나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 왔는지요. 아름다운 끝맺음은 꿑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올 한해 동안 여러분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성탄절 이야기>               2025년 12월 21일  
옛날에 한 초라한 소녀를 사랑하는 왕이 있었다. 헌데 왕은 신분의 차이때문에 사랑을 표현하기기 쉽지 않았다. 소녀에게 사랑한다고 주저없이 고백하면 왕으로서의 권세때문에 소녀가 두려움이나 위압감에 못이겨 자신의 사랑에 마지못해 응할 수도 있다고 여긴 왕은 소녀와 같은 평민의 신분으로 소녀앞에 나아가 사랑을고백하갰다 결심했다. 왕은 귀하디 귀한 왕위를 내놓고 왕의 예복을 벗었다. 화려한 궁중을 떠났다. 그리곤 민초들과 같은 수준의 의식주를 누렸다. 왕은 초라한 서민의 외투를 입고 소녀 앞에 섰다. 이것은 한 순간의 변장이 아니라 새로운 삶에의 전환이었다. 왕은 한 소녀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신분, 지위을 모두 포기하고 한없이 낮아져 천한 삶을 시작한 것이다. 사랑을 위한 엄청난 도박이었다 왕은 소녀가 자신을 사랑할지도 아니면 거부할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소녀를 사랑하는 일념으로 천한 삶을 자처했다. 이 이야기는 덴마크의 실존주의철학자 키에르케골의 우화이다. 
성탄절이 다가왔다. 성탄절은 하늘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날이다. 이날 하나님께서는 예수라는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하늘에서 땅에 내려오셨다. 이날 하나님은 하늘보좌, 영광을 버리시고 무한히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셨다. 하나님이 인간, 그것도 천한 종이 되신 이유는 인간과 동일한 신분으로 인간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그 사랑을 안받아 줄수 있음에도 그렇게 자신을 낮추시고 오셨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들어왔던 성탄절 이야기이다.
헌데 오늘날 성탄절이 이런 하나님사랑에 관한 감동적인 이야기보다는 자기 즐거움으로 만족해 하는 절기로 변질되어 가는듯 하다. 성탄절기에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장식, 선물준비, 외식, 세일품목구입, 여행, 가족모임, 행사등을 계획하면서 가슴설레이고 즐거워한다. 사교적이고 물질적이고 쾌락적인 면에 관심을 쏱는 절기로 성탄절을 이해하려 한다. 성탄절기때 가장 각광받는 장소는 식당, 쇼핑센터, 비행장, 오락관등이다. 성탄절 기간은 일년중 소비지수가 가장 높다. 모임 횟수도 가장 많다. 물론 행사및 계획들을 통해 상호간 마음과 물질 선물을 나눈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허나 자기만족, 즐거움, 기분좋음으론만 성탄절기를 채워간다면 이는 분명 자기애(自己愛)이다. 자기사랑은 결코 기독교정신이 아니며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의 철학이 아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버리시고 불쌍한 이웃들을 사랑하시기 위해 오셨다. 성탄절은 인류를 섬기려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모시고 그분에게 사랑을 드리는 절기이다. 성탄절의 주인공은 분명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이 우리모두의 사랑, 관심의 주 대상이시고 기쁨, 즐거움의 주체이시다.
한 소녀를 너무 사랑해서 평민이 된 왕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두 가지 선택이 있다. 낮아져서 우리에게 다가온 그 왕을 영접하고 사랑하던가 아니면 그를 거절하던가.. 선택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평화가 임한 연주회>    
           2025년 12월 14일  
1940년대 초 성탄절 때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중국 북경에 있는 엑스베리 교회의 버튼 청 목사가 중국사람 만으로 구성된 합창단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와 단원들은 크리스마스 연주를 위해 헨델의 메시아를 열심히 연습했다. 그런데 그 중요한 시간에 소프라노 파트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맡은 여성대원 한 사람이 갑작스러운 사정으로 합창단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빠진 대원대신 소프라노를 맡을 사람을 금방 구할 수가 없었다. 청 목사와 단원들 모두 매우 곤란한 입장에 처했다. 그때 다행히 누군가의 도움으로 청 목사는 일본인 선교사 부인중에 소프라노를 매우 잘 하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었다. 당시 북경은 연합군의 점령하에서 계엄령을 선포하고 그 지시대로 따르고 있었으므로 침략자인 일본사람을 중국사람으로 구성된 합창단에 같이 넣는다는 것은 국민 정서상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침략한 일본에 대하여 감정이 절대 좋을리 없던 때인지라 청 목사도 여러가지로 생각을 하며 걱정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헌데 달리 대안이 없었던 청 목사는 깊은 기도 후에 일본인 선교사 부인에게 합창대에 들어와 달라고 정중히 요청했고 그 부인도 이에 긍정적으로 화답했다. 대원들 모두가 열심히 연습을 다하고 성탄축하 음악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일본인 부인은 중국인 합창대에 섞여 헨델의 메시야중 가장 비중이 높고 많은 부분들을 최선다해 불렀다. 자칫 냉냉해질 상황이었지만 일본인 부인은 따스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자신이 맡은 파트를 충실히 잘 해냈다. 노래를 마치고 단원들이 소개될때 많은 청중들은 얼마동안 일본인 부인에 대하여 흥분한채 야유를 퍼부으며 소란 법석을 피웠다. 그러나 일본인 부인은 겸손과 온유함으로 허리를 굽히고 연주회에 참석한 모든 이들에게 정중히 감사인사를 했다. 
그 부인을 향했던 야유가 점차 사라지고 청중들은 아무말도 못한채 일본인 부인의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그리고 청중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하고 느끼게 되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가 일본인 부인을 통하여 온 청중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게 되었다. 예수님은 당시 적대 관계였던 중국인과 일본인을 평안의 매는 줄로 엮으심을 성탄절 노래축제를 통해서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의 마음은 서로 다른 이념, 사상, 주의등을 극복케 한다. 평화는 모든 인류를 주 안에서 하나 되게 엮어 준다. 예수님이 탄생하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 우리들 마음과 삶의 자리에도 주님이 가져 오시는 평강이 임했으면 좋겠다. 평강의 주님을 환영하고 뜨겁게 영접하길 바란다.

​ <입술의 파수꾼>           2025년 12월 7일  
나는 소시적에 참 숫기가 없었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를 두려워했고 민망해했다. 어쩌다 사람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도 말을 거의 안했다. 아니, 못했다. 그 덕분인지 말에 얽힌 화(설화)가 별로 없었다. 헌데 목사안수를 받은 이래로 입을 열어야하는 상황이 됐다. 사역 요소들이 설교, 기도, 심방, 교육, 전도, 상담, 훈련, 회의등의 주류 통로가 말이기 때문이다. 말을 하다보니 그에 따른 실수가 생겼다. 간혹 지혜롭지 못한 말, 부주의한 말, 시의적절치 못한 말을 함으로 듣는 이에게 오해 소지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음에도 부족하고 어색한 표현력으로 인해 설교 시에 시험거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항상 느끼는 것인데 말을 잘하기는 그런대로 쉬워도 잘 말하기는 참 어려운듯 하다.
요즈음 내가 대하는 목사님들 대부분이 후배들이다. 그만큼 살아온 세월의 길이가 길어졌다. 후배 사역자들을 대할 때마다 더욱 마음에 새기는 결심이 있다. ‘말할 때 좀 더 생각하고 절제하고 삼가해서 말해야겠다’는 결심 말이다. 정말 언젠가는 목사님들 모임시 아무 말 안하고 듣기만 한 적도 있었다. 그래도 목사에게는 말이 사역의 필수 수단이니만큼 말을 하되 누구 앞에서나 할 말을 가려서 말하려 한다. 목사는 하나님의 대언자, 즉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을 전하는 말씀 전달자이다. 따라서 목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을 말해야 하고 자신의 말은 줄이고 또 줄여야 한다. 아무리 유려해도 자기 말이 너무 동원되면 종내는 말의 효과가 경감되고 공동체 내 갈등의 요인이 되기도 한다.
사람의 말에는 한계가 있다. 말이 초기에는 떨어지는 물처럼 맑고 명쾌하게 들리고 꿀송이처럼 달콤하게 들려 듣는 이의 머리와 감성을 움직여도 그의 영혼과 마음 심연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 그런데 주님 말씀은 다르다. 
주님 말씀에는 생기와 생명력, 능력과 지혜가 있어 영혼까지 살리고 감동시킨다. 설교자가 자신의 언어가 아닌 주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말할 때 말씀에 영적생명이 약동하고 영적향기가 퍼져 나온다. 우리들은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지 않았다면 그것을 주시기까지 침묵해야 한다. 
때때로 침묵 속에서 크고 위대한 주님 말씀이 들려지기도 한다.
이 한주간도 자신의 말을 많이 하기 보다는 하나님 말씀이 기름처럼 공급되어 그 말씀에 몰입했으면 좋겠다. 우리 입술에 성령의 파수꾼이 굳건히 세워지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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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의 기다림>    2025년 11월 30일  
이번 주일(11월30일)부터 대림절(Advent)이 시작되었다. 대림절은 현시(現示)라는 뜻의 헬라어인 ‘에피파네이아’, 또는 현존(現存)을 일컫는 말인 ‘파루시아’의 번역이며, 도착(到着)을 의미하는 라틴어인 ‘아드벤투스’에서 유래하였다. 최초의 라틴어 성경인 불가타(vulgata)역에서는 대림절의 의미를 ‘그리스도께서 사람 가운데 오시는 절기’라고 해석하였다. 
본래 대림절의 기간은 4주에서 6주 정도로 동방과 서방교회가 서로 달랐는데 현재 개신교와 가톨릭에서는 성탄절 전 4주간을 대림절로 지키고 있다.  기독교 교회력에서 대림절은 한 해를 시작하는 절기이다. 성탄절을 12월25일 로 정하고 이를 기다리는 대림절기가 시작된 것은 4세기부터였다. 그런데 성탄절이 제정된 가장 중요한 동기는 4세기에 이단으로 정죄된 아리우스파의 출현에 있었다. 북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 출신인 아리우스는 삼위일체 교리를 거부한채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였다. 
아리우스에 따르면 성자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창조된 피조물로 태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성자는 성부로부터 지어졌으므로 당연히 성부보다 열등한 존재였다. 이런 학설을 주장하던 아리우스와 그를 추종하는 무리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교회는 ‘니케아 신경’을 제정하며 삼위일체의 교리를 확고히 하였다. 아리우스가 죽은 후에도 그를 추중하는 제자들이 늘어나자 교회는 다시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를 개최하고 이들을 재차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당시 교회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의 교리 수호와 함께 성자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할 필요성을 느꼈고, 이에 자연스럽게 세상의 구세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탄생일을 기념하고 강조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예배적 전통으로 이어지면서 대림절의 전통이 확립 되었다.
대림절은 메시야의 탄생과 다시 오심을 경건하게 기다리는 기간이다. 대림절은 초대교회 때부터 엄숙하고 숙연한 분위기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지켜졌다. 성도들은 아기 예수로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의미를 마음에 깊이 새기면서 기도하고 성경을 묵상하며 그분을 기다렸다. 그런데 오늘날의 대림절에는 초대교회같은 기다림의 자세가 없다. 오히려 각종 행사들과 모임, 축제들과 선물, 여행과 만남등으로 소란스럽기기까지 하다. 이번 대림절은 예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메시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심을 확실히 믿고 그분을 앙망하면서 기도와 말씀묵상, 섬김에 더욱 몰입하시길 부탁드린다.​
 목회 칼럼       (2025년 11월)
​<대림절의 기다림>    2025년 11월 30일  
이번 주일(11월30일)부터 대림절(Advent)이 시작되었다. 대림절은 현시(現示)라는 뜻의 헬라어인 ‘에피파네이아’, 또는 현존(現存)을 일컫는 말인 ‘파루시아’의 번역이며, 도착(到着)을 의미하는 라틴어인 ‘아드벤투스’에서 유래하였다. 최초의 라틴어 성경인 불가타(vulgata)역에서는 대림절의 의미를 ‘그리스도께서 사람 가운데 오시는 절기’라고 해석하였다. 
본래 대림절의 기간은 4주에서 6주 정도로 동방과 서방교회가 서로 달랐는데 현재 개신교와 가톨릭에서는 성탄절 전 4주간을 대림절로 지키고 있다.  기독교 교회력에서 대림절은 한 해를 시작하는 절기이다. 성탄절을 12월25일 로 정하고 이를 기다리는 대림절기가 시작된 것은 4세기부터였다. 그런데 성탄절이 제정된 가장 중요한 동기는 4세기에 이단으로 정죄된 아리우스파의 출현에 있었다. 북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 출신인 아리우스는 삼위일체 교리를 거부한채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였다. 
아리우스에 따르면 성자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창조된 피조물로 태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성자는 성부로부터 지어졌으므로 당연히 성부보다 열등한 존재였다. 이런 학설을 주장하던 아리우스와 그를 추종하는 무리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교회는 ‘니케아 신경’을 제정하며 삼위일체의 교리를 확고히 하였다. 아리우스가 죽은 후에도 그를 추중하는 제자들이 늘어나자 교회는 다시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를 개최하고 이들을 재차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당시 교회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의 교리 수호와 함께 성자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할 필요성을 느꼈고, 이에 자연스럽게 세상의 구세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탄생일을 기념하고 강조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예배적 전통으로 이어지면서 대림절의 전통이 확립 되었다.
대림절은 메시야의 탄생과 다시 오심을 경건하게 기다리는 기간이다. 대림절은 초대교회 때부터 엄숙하고 숙연한 분위기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지켜졌다. 성도들은 아기 예수로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의미를 마음에 깊이 새기면서 기도하고 성경을 묵상하며 그분을 기다렸다. 그런데 오늘날의 대림절에는 초대교회같은 기다림의 자세가 없다. 오히려 각종 행사들과 모임, 축제들과 선물, 여행과 만남등으로 소란스럽기기까지 하다. 이번 대림절은 예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메시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심을 확실히 믿고 그분을 앙망하면서 기도와 말씀묵상, 섬김에 더욱 몰입하시길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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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기의 차이>                    2025년 11월 23일
1620년 9월 6일, 영국의 청교도들이 “메이 플라워 호”를 타고 미국 동부를 향하여 출발했다. 그런데 거의 비슷한 시기에 '매스터호'라는 배를 타고 남미로 간 청교도들도 있었다. 북미로 간 자들이나 남미로 간 자들 모두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던 신앙인들이었고 또한 신앙의 자유가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허나 북미로 가던 “메이 플라워호”와 남미로 떠나가던 “매스터 호”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동기의 차이였다. 물론 남미로 간 사람들에게도 신앙적인 동기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지닌 더욱 큰 동기는 남미 대륙에 매장되어 있던 황금을 찾는 것이었다.. 당시 남미에서 엄청난 양의 금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그들은 새로운 대륙에 가서 새로운 기회를 잡아 부자가 되겠다는 동기 때문에 “매스터 호”를 탔던 것이다. 반면에 북미로 갔던 사람들은 금과 같은 물질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마음껏 섬기기 위해서 정든 고향과 삶의 터전을 떠났다. 그들은 영국 국교도들의 핍박으로 인해 마음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자, 자유롭게 찬양을 부르고 자유롭게 기도를 하고 자유롭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는 진정한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메이 플라워 호”를 탔던 것이다.
이렇듯 동일하게 신앙생활을 하던 두 그룹이 각기 다른 동기로 각기 다른 지역을 향해 떠나갔던 것이다. 북미 대륙을 향해 떠난 청교도들은 하나님 한 분만을 찾아 그곳에 와서 땀과 눈물과 피를 흘리며 예배당 부터 먼저 지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집을 지음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정착 초기에 믿음의 동료들이 하나, 둘 죽어감에도 좌절치 않고 기어코 예배당을 완공했으며, 1년 동안 농사를 하고 추수한 농작물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추수감사주일을 지켰다. 신앙적인 동기 때문에 북미로 간 사람들은 신앙의 르네상스를 경험하였을 뿐 아니라 이후 물질의 풍성함도 누렸다. 그들이 뿌린 감사와 희생의 씨로 인해 그들의 후손은 오늘의 미국을 이루는 축복을 받았다. 반면에 황금을 좇아 남미로 간 사람들은 신앙을 잊어버리고 그들이 그렇게 원했던 돈도 벌지 못했다. 현재 남미 국가들은 대부분 인플레이션과 반목되는 경제 불안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언젠가 남미의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미국의 대통령을 만나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조상들은 하나님(God)을 찾아서 신대륙으로 건너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도 찾고 하나님의 축복 속에 황금(Gold)도 선물로 얻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황금을 찾아서 이 땅으로 건너와서 황금도 찾지 못하고 하나님도 잃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신앙의 조상들을 둔 당신들이 한없이 부럽습니다." 하나님과 재물, 하나님과 세상, 하나님과 인기, 하나님과 명예들 중에서 먼저 무엇을 택해야 하는지..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선택해야만 한다.

 
<불평말고 감사하자>                    2025년 11월 16일
여름철 한 낮의 태양이 너무 뜨거워 그 태양을 향해 원망을 잔뜩하고 있던 풀잎에게 스산한 바람과 함께 비가 내렸다. 풀잎은 자신을 시원케 해주는 비를 바라보며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그러자 비가 손을 내저으며 겸연쩍게 말했다. "내가 멋대로 내려온 게 아냐 세찬 바람 때문에 밀려 내려 왔으니까 인사를 하려거든 바람한테나 하게나" 비가 하는 말이 옳다고 여겨져 풀잎은 이번에는 바람에게도 고맙다고 했다. 그런데 바람도 손을 내저었다. "내가 마음대로 불어 젖힌 게 아닐세 구름이 수분을 실어다 주었기에 그 덕분에 비가 온거지, 그러니 고맙다는 말을 하려거든 구름한테 하게나" 풀잎이 생각해보니 바람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구름에게도 정중히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러자 구름이 "내가 어디 내 마음대로 수분을 운반할수 있겠는가 하늘중심에 있는 태양이 계속해서 내리쬐는 덕분에 수분을 흡수할 수 있었지, 그래서 우리가 비를 만든 거야 정말 인사하고 싶거든 태양에게 하게나” 그런데 구름의 말을 듣던 풀잎은 그만 풀이 죽고 말았다. 자신이 원망하던 태양에게 고마움을 표해야 하다니..그런데 자신에게 향했던 모두의 말들이 전부 옳았기에 풀잎은 용기를 내어 태양에게도 고맙다고 말했다. 그러자 태양이 이렇게 말했다 .
"나도 내 마음대로 빛과 열을 내리 쪼이게 했던 것이 아닐세. 우주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의 힘으로 세상만사가 다 그렇게 돌아가는 법이니 감사를 올리려거든 하나님께 올리게나"
우리들은 때때로 위의 풀잎처럼 불평, 원망을 토로하곤 한다. 특히 어려운 상황이나 곤란한 사람을 대할 때는 자신도 모르게 불평이 나온다. 불평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직접적인 위반이며 반항이다. 불평은 자신의 삶에 해를 끼칠 뿐 아니라 하나님의 가치기준과 계획,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방해하기도 한다. 또 불평은 하나님의 사랑하심, 공급하심, 보호하심을 의심하게 만든다. 불평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불평 대상자와의 관계를 불화하게끔 만든다. 불평은 믿음 없는 가운데 행해지는 일로서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의 잠재적 능력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불평은 하나님께서 어떠한 환경이라도 다스리실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게끔 만든다. 불평을 극복하는 비결은 감사하는 것이다. 자신이 가고 있는 험하고 캄캄한 길에 조그마한 빛이 비추어도 그것을 하나님의 주시는 자비로우신 빛이라 여기면서 감사함으로 진행하면 주님이 허락하시는 행복과 기쁨이 몰려온다. 얼굴을 찡그리며 불평하는 습관을 버리고 얼굴을 피며 매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자. 항상 우리를 지키시며 하늘은혜와 사랑과 복을 넘치도록 주시는 하나님께 존귀영광과 감사를 드리자.

​ <예배의 바다>                   2025년 11월 9일
지금도 그런지 잘 모르겠지만 예전에 여름철 무더울 때 바닷가에는 피서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어느 여름 날에는 부산 해운대 바다에 백만 인파가 모여들어 피서를 즐겼다는 방송이 있었다. 여의도 복음집회 때에 백만성도들이 참석해 열심히 찬송부르고 말씀을 들었다는 소식은 여러번 들었는데 바닷가에도 그토록 큰 규모의 사람들이 모였들었다는 보도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리곤 그 많은 사람들 틈에서 제대로 피서 휴식이 가능했을까 하는 의구심도 살짝 들었다. 그런데 바닷가에 간 사람들 중에는 실제 바닷물에 들어간 사람도 있으려니와 그렇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 중에는 그냥 모래밭 밖에서 관망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고, 모래 밭에서 즐기는 사람들, 또 바닷 물에 발목만 담그는 사람들, 무릎까지 담그는 사람들, 더 들어가 허리까지 담그는 사람들, 목까지 담그는 사람들, 그리고 머리까지 
물 속에 담그고 헤엄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바다에 즐기려 와서도 모두가 다 바닷물에 몸을 담그는게 아니라 아예 바닷물을 멀리하는 사람도 분명있다. 사실 나역시 바다에 가면 발목과 허리 정도까지만 물에 담그곤 한다.
우리 신앙도 그런 모습이다. 믿음생활과 교회생활을 즐기려면 머리까지 완전히 담가야 한다. 그래야만 제대로된 신앙생활이 가능하다. 성도들은 주일날에 공적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에 나온다. 헌데 예배드리는 모습들은 실로 다양하다. 예배에 쏱는 마음의 정성지수가 다양하고 예배드리는 모습도 다양하다. 물론 하나님 이버지께서는 우리가 어떤 모습과 형태로 예배드리던 교회 뜰을 밟은 것만으로도 우리를 받아주신다. 헌데 하나님은 우리가 온 몸을 바닷물에 다 담그듯이 그렇게 당신께 예배드리는 것을 바라신다. 우리가 정성과 마음을 예배 속에 온전히 빠져들 때 은혜와 복이 더욱 풍성히 임한다. 예배시간을 엄수하며 예배 중 흔들림없이 한 자리를 지키며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자를 보시면서 주님은 크게 기뻐하신다. 우리가 입을 크게 열고 찬송을 힘있게 부르며 기도에 목소리를 다하며, 말씀듣는 것에 마음을 집중할 때, 또 축복이 임하길 소망하며 축도를 받을 때 그 예배에 신령한 복이 임하는 역사가 일어난다.
성공하는 자는 하는 일에 초 집중하는 자이다. 바다를 제대로 즐기려면 바닷물에 온 몸을 담그고 즐겨야 한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려면 하나님께 자신을 온통 담가야 한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즐기려면 무엇보다 예배에 영혼과 마음을 전부 담가야 한다. 오늘 거룩한 주일, 예배의 날이다. 우리 모두 예배의 바다에 빠져 예배를 제대로 드리시며 제대로 즐기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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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기도>                  2025년 11월 2일                     하이네 / 시인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쓸쓸함으로 그려내는 가을이 아닌
아름다움으로 그려내는
한 폭의 수채화이게 하소서
이 가을이 종일토록
내 마음 눈 시린 하늘 저 멀리
가벼운 새털구름 한 자락 고이 걸어두는 
아름다운 가을이게 하소서
바람에 살랑이는 코스모스 향기 따라 
가을을 실어옴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의 흐느낌 속에서도
이 가을이 내게 쓸쓸함이지 않게 하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가을 하늘 뭉게구름 피어오르며
청명한 물길 따라 흐를 때
나 혼자 저 높고 푸른 하늘을 올려다봄에
이 가을이 더 이상 외로움을 그려내는 
가을이지 않게 하소서
단풍나무 불붙어 몸살나는 그리움으로
세월이 흐를수록 마음도 깊어지는
내 고운님을 향한 나만의 곱고 고운 
그리움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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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칼럼       (2025년 10월)
 <여분의 사람>                 2025년 10월 26일
내가 가진 것을 전부 써 버리지 않고, 여분의 것을 마지막까지 남겨둘 줄 아는 사람.
말을 남겨두고 그리움을 남겨두고 사랑을 남겨두고 정을 남겨두고 물질을 남겨두고 건강을 남겨두면서 내일을 바라보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말을 다 해버리면 다음에는 공허함이 찾아 오고 마음을 한번에 다 주어 버리면 이어 허탈감이 밀려옵니다.
사랑을 한번에 다해버리면 다음에는 아픔이 생겨 상처받게 되고 가진 것을 다 써버리면 불안해지고 그리움이 너무 깊으면 가슴앓이가 생기고 젊음과 건강을 유혹 속에 다 써 버리면 나중에 많이 후회하게 됩니다.
누군가는 불타는 사랑이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조금씩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고 오래 참고 인내하면서 매일매일 더욱 사랑해 가는 모습이 더 아름답습니다.
마음의 여분도 또 다른 이를 위하여 남겨두는 것이 좋고 기쁨도 슬픔도 전부 드러내지 말고 누군가를 위해 얼마라도 속에 간직해 두면 더 아름다울 것입니다.
기다림으로 만나는 사람이 진정 반가운 사람이고 오래 가는 사랑이 귀하고 깊은 사랑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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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입니다!>                2025년 10월 19일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유일한 주님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종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소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로마서 1:1), 또는 ‘하나님의 종’(디도서 1:1)이라 말했다. 일반적으로 종이란 노비나 천한 신분을 가리키는 말로 주인을 위하여 모든 일을 하는 사람이다. 예전시대에 종은 자유인이 아니었다. 종에게는 자신의 소유및 권리가 없었다. 목숨마저 주인 소유였다. 종은 자유및 창의적 삶도 없었다. 종의 모든 것은 주인에게 속했다. 그런데 바울을 위시 모든 기독자들이 예수님의 종이라 말할 때, 그것은 종에게 삶의 권리가 절대 없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종이 된다는 것은 그에게 인생 권리가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 자신의 권리를 자유롭게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권리가 있음에도 예수님을 위해 또한 이웃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내려 놓았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종은 누군가의 강요때문이 아닌, 또는 어쩔수 없는 강압적 환경때문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때문에 자신을 내려놓고 포기한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면 그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은 종과 같은 존재가 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모든 권리를 자발적으로 포기 하셨다. 예수님께서 소유하셨던 권리를 생각해 보시라.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 세상의 창조주셨다. 빌립보서 2:6에 그분을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 요한복음 1:2에,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하신 분’으로 기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하늘 영광과 보좌를 포기하시고 미천한 마구간에서 태어나는 길을 택하셨다. 또한 자신의 생애를 왕으로 군림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버림받은 자들과 함께 하는 일에 바치셨다. 주님은 자신의 권리로 왕의 특권을 누릴 수 있었지만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다.”(빌립보서 2:7-8).
예수님은 모든 기독자들이 당신의 가르침을 본받길 바라신다. 마가복음 9:35에,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했다. 집, 일터, 사무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고 남을 먼저 섬겨야할 책무가 우리 모두에게 있다. 우리는 주님의 종이며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의 종이기도 하다. 다른 이의 섬김을 기다리는 대신, 예수님이 우리를 섬기셨던 것처럼 자신이 먼저 종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에 감사하여 남을 따뜻하게 섬기시길 바란다.

 <사막을 건너는 방법들>               2025년 10월 12일
스티브 도나휴(Steve Donahue)가 쓴 ‘사막을 건너는 여섯 가지 방법’(원제: Shifting Sands)이란 책이 있다. 스티브는 순탄치 않은 생을 살아오면서 경험한 것을 토대로 사막과 같은 인생 여정을 슬기롭게 건널 방법을 제시한다. 그는 “사막과 인생은 닮은 꼴이다. 끝은 가물가물 보이지 않고, 길을 잃기도 하며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가 신기루를 좇기도 한다. 사막을 건너는 동안 언제 건너편에 다다를지 알 수가 없다.”라 말한다. 그가 제시하는 방법은 이렇다.
첫째, 지도를 따라가지 말고 나침반을 따라가라. 사막지형은 거센 모래바람으로 인해서 어제와 오늘의 지형이 변하기에 표면의 지도보다는 ‘마음 속의 나침반’을 따라야 한다.
둘째, 오아시스를 만날 때마다 쉬어가라. 많은 이들이 오아시스를 만나도 쉬지않고 정상을 향해 달려간다..인생의 오아시스를 만났어도 쉬지 않으면 결국 기진하여 쓰러지고 만다.
셋째, 모래 속에 갇히면 타이어에서 바람을 빼라. 차가 모래에 빠지면 바람을 빼고 밀면 움직일 가능성이 있다 허나 가속페달을 밟고 급하게 빠져나오려 한다면 더 깊이 빠지게 된다. 삶에서 곤경에 처했을 때 겸허하게 한 발 뒤로 물러나 바람을 빼는 여유가 필요하다.
넷째, 더불어 여행하라. 사막에서 혼자 여행하는 것은 항시 위험하다. 누구에게나 인생여정에는 동행이 필요하다. 그래야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다.
다섯째, 캠프파이어에서 한걸음 멀리하라. 따스하고 배부른 안전지대에 머무는 한 절대 성장이 없다. 사막의 깜깜한 어둠 속으로 진행해야 생의 의미를 알게 되고 그만큼 성장해 간다.
여섯째, 허상의 국경에서 멈추지 말라. 현재의 세계에서 눈을 돌려 또 다른 세계를 발견하는 것이다. 세상은 넓고 넓다. 신비한 세상 속을 걸어가면서 그 진행을 방해하고 가로막는 두려움과 불안감을 극복해야 한다.
우리의 신앙에도 이런 여섯 가지의 원리가 적용된다. 이 세상은 사막같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신앙의 나침반, 즉 말씀이 있어야 한다. 영적 재충전을 위해서 때로 쉼이 필요하다. 자신의 무능을 바라보면서 겸손으로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믿음의 지체들과 함께 함도 필요하다. 또한 안전지대에만 머물지 말고 신앙의 모험을 시도해야 한다. 그리고 주님을 의지하여 두려움을 떨치고 담대하게 전진해야 한다. 사막같은 인생이기에 주님의 손길이 더욱 우리를 안위하실 것이다.

<영혼이 건강한 사람>            2025년 10월 5일
영혼이 건강한 사람은 하나님과 절정의 순간을 항상 맛보는 사람이 아니라 
  
때로는 홀로 고독한 시간을 보내며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완벽한 것처럼 보여지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며 다른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갈수 있는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자신의 삶에 고통이 없어야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고통이 통과해야 할 길임을 알고 그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지체들간에 갈등이 있음을 갈등하는 사람이 아니라 
  
잠잠히 기다리며 두려움없이 하나님의 손길에 갈등을 맡기는 사람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완전한 기쁨을 맛보며, 완전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실망을 분노로 표현하지 않고 그날이 오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신음하며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절대로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때로 남보다 더 강한 유혹을 느끼며 그 유혹에 빠지기도 하지만 마음 속 깊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주님께 돌아올줄 아는 사람입니다.
영혼이 건강한 사람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관계를 소중히 여기며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활짝 마음의 문을 열고 날마다 새로워지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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