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존적 존재>2025년 1월 12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려서는 생각하는 것, 결정하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이 미숙하고 유치하다. 매사에 누군가를 의존하면서 도움을 받는다. 그러면서 나이를 먹어가며 조금씩 철이 들고 조금씩 성숙해져 간다. 말과 행위에 인격이 첨부되며 사람됨이 점차로 품위있어 진다.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미성숙기의의존적 관계에서 점차 홀로 서게 되고 독립적이 되어간다. 물론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성인아이, 역기능의 사람들이 있긴 하다. 헌데 하나님과의 관계는 육체의 나이테가 늘어가고 세상 지식과 경험을 쌓아 점차 독립적 존재가 되는 세상적 이치와는 다르다. 기독자들은 신앙 연륜이 깊어지고 믿음 년수가 길어질수록 하나님을 향해 더욱 의존적이 되어간다. 신앙세계에 입문하기 전에는 자신이 설계, 주도한 능동적 인생이라면 신앙 안에서는 범사에 주님이 계획, 주도하시고 자신은 이를 따르고 순종하는 수동적 인생이 된다. 믿음이 깊어 질수록 더욱 주님께 의존적이 된다. 성숙한 믿음은 주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인정하여 자신을 온전히 내려놓고 그분께 인생범사를 다 맡기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주님께 매순간 여쭤보고 그분 재가를 받으라고 설교하면서도 간혹 특별한 사안에 대해서는 나 스스로가 해결사인양 주도하기도 했었다. 이를 다시 고치기를 마음다진다. 남은 날들은 주님을 삶의 주어로 삼고 나는 단지 목적어가 되어 주님께서 의도하신 삶을 살아야겠다고..그분을 주님이라 고백하는 바대로 말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잠언 3:5,6절)
<새해에는 이런 사람이 되게 하소서> 2025년 1월 5일 -이해인
평범하지만 가슴엔 별을 지닌 따뜻함으로 어려움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신뢰와 용기로써 나아가는 "기도의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정월의 보름달만큼만 환하고 둥근 마음 나날이 새로 지어 먹으며 밝고 맑게 살아가는 "희망의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너무 튀지 않는 빛깔로 누구에게나 친구로 다가서는 이웃 그러면서도 말보다는 행동이 뜨거운 진실로 앞서는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오랜 기다림과 아픔의 열매인 마음의 평화를 소중히 여기며 화해와 용서를 먼저 실천하는 "평화의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그날이 그날 같은 평범한 일상에서도 새롭게 이어지는 고마움이 기도가 되고 작은 것에서도 의미를 찾아 지루함을 모르는 "기쁨의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 예수님이 오심으로 > 2024년 12월29일 이천년 전 맑고 고요한 한 밤중에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천군 천사들의 찬양 중에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육신을 입으신 그분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예수님 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 어둡고 침침했던 영안이 밝아졌습니다. 죄 많은 세상이 보이고 죄를 씻어주는 십자가도 보였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 닫히고 막혔던 귀가 열렸습니다. 아웃의 신음소리가 들리고 상처를 치유하는 세미한 말씀도 들렸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 심약한 영혼이 바산의 황소처럼 튼실해졌습니다. 비둘기 같은 은혜가 잔잔하게 스며들며 헐몬산의 이슬처럼 온 존재를 적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 생명없는 메마른 땅, 볼품없는 광야같은 삶의 자리가 생명이 돌아오고 백합화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 동산이 되었고 탐욕, 교만, 우상숭배로 가득한 멸망의 가증한 길이 은혜의 찬양 소리가 넘실거리는 거룩한 시온의 대로가 되었습니다. 그분의 오심은 레바론의 영광이요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이며 길이와 깊이, 높이와 너비를 측량할 수 없는 은혜 위에 은혜,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주님이 오신 것은 세상을 사랑하심 때문입니다.
목회칼럼 2024년 12월
< 예수님이 오심으로 > 2024년 12월29일 이천년 전 맑고 고요한 한 밤중에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천군 천사들의 찬양 중에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육신을 입으신 그분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예수님 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 어둡고 침침했던 영안이 밝아졌습니다. 죄 많은 세상이 보이고 죄를 씻어주는 십자가도 보였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 닫히고 막혔던 귀가 열렸습니다. 아웃의 신음소리가 들리고 상처를 치유하는 세미한 말씀도 들렸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 심약한 영혼이 바산의 황소처럼 튼실해졌습니다. 비둘기 같은 은혜가 잔잔하게 스며들며 헐몬산의 이슬처럼 온 존재를 적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 생명없는 메마른 땅, 볼품없는 광야같은 삶의 자리가 생명이 돌아오고 백합화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 동산이 되었고 탐욕, 교만, 우상숭배로 가득한 멸망의 가증한 길이 은혜의 찬양 소리가 넘실거리는 거룩한 시온의 대로가 되었습니다. 그분의 오심은 레바론의 영광이요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이며 길이와 깊이, 높이와 너비를 측량할 수 없는 은혜 위에 은혜,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주님이 오신 것은 세상을 사랑하심 때문입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유래> 2024년 12월22일 크리스마스 캐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1818년 오스트리아에서 탄생했다. 1818년 크리스마스 즈음에 오스트리아 오베른도르프 라는 작은 마을에 니콜라스 교회를 지키는 모올 신부가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르간을 고치고 있었다. 그 오르간은 강의 습기로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두고 갑자기 고장이 나 버렸다. 헌데 수리를 위한 기술자의 방문은 이듬해 봄에나 오기로 되어 있었다. 성탄절에 성탄미사를 드리고 연극발표회도 해야 하는데 한 대밖에 없는 오르간이 고장 났으니 참으로 난감했다. 새 오르간을 구입할 형편이 아니었기에 모올 신부는 며칠째 오르간을 뜯어서 이리저리 살펴봤지만 도무지 고칠 수가 없었다. 상심한 그는 일손을 멈추고 간절한 마음으로 한참동안 기도를 올렸다. 이후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니 깊은 밤 어둠 속으로 환한 달빛이 비추는 마을의 풍경이 무척 평화롭고 아름답게 보였다 '참으로 고요한 밤이구나!' 평화로운 마을풍경에 감동을 받고 그는 시 한편을 떠올렸다. 그는 신부가 되기 전 이와 같은 광경을 바라보며 감동이 되어 '고요한 밤(Silent Night)'이란 시를 써놓았던 적이 있었다. 그는 펜을 들어 떠오르는 글들을 새롭게 다시 써내려갔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인 프란츠 그루버를 찾아가 시를 보여주며 작곡을 부탁했다. "오르간이 고장났으니 선생께서 이 시로 작곡을 해서 성탄미사 때 기타로 연주하면 어떻겠습니까?" 그해 성탄절, 교회의 신도들은 기타를 들고 제단에 선 모올 신부와 그루버를 보고 모두들 의아하게 생각했다. 잠시 후 그 작은 교회에서 모올 신부가 쓴 시에 그루버 선생이 곡을 붙인 감미로운 음악이 기타로 연주되었고, 두 사람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으며, 그들 두 사람의 목소리에 교회 성가대가 합세하여 코러스가 되어 울려 퍼졌다. 노래가 끝난 후에 신도들은 한동안 감동으로 침묵을 지키다가 곧 박수를 치며 크게 기뻐했다. 감동적 찬양이 있는 뜻 깊은 크리스마스였다. 다음 해 봄, 드디어 오르간을 고치러 교회로 기술자가 오게 되었다. 그때 그 기술자가 우연히 이 노래의 악보를 보게 되었고 그는 이 노래 악보를 가지고 갔다. 그리고 그가 오르간을 수리하러 독일의 이곳저곳을 오갈 때마다 이 노래도 계속 퍼져나갔다. 처음엔 독일에서, 다음에는 유럽에서, 그리고 지금은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된 것이다
<화평하자>2024년 12월15일 2차 대전 때 불란서에서 영미 연합군과 독일군이 전쟁을 할 때였다. 12월 24일에 연합군 병사 3명이 밤에 길을 잃었다. 춥고 배도 고팠다. 그들은 산길을 헤메다가 한 불빛을 발견했다. 조심해 다가보니 민가였다. 문을 두드렸더니 주인 아주머니가 문을 열었다. 병사들은 먹을 것을 좀 달라고 하였다. 독일군에게 발각되면 큰일 날 일이었다. 아주머니는 병사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따뜻한 방으로 안내했다. 한참 후 다시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독일군 병사 2명이 총을 들고 문밖에 서 있었다. 아주머니는 무서웠지만 담대히 문을 열어주었다. 그들도 너무 추우니 따뜻한 곳에서 몸좀 녹이게 해달라고 했다. 주인은 거실 난로 앞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몸을 녹이다가 잠이 들었다. 12월 25일 새벽에 주인은 어린 딸과 아들과 함께 성탄절 찬송을 불렀다. 그 찬송 소리에 군인들이 모두 깨었다. 독일군과 영미 연합군이 함께 모였다. 5명의 군인과 3명의 집 식구들이 함께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찬송을 불렀다. 그리고 평화의 주님이 오심을 같이 찬양하였다. 성탄절은 평화가 선포되는 절기이다. 눅 2:14에서 천군천사들은 예수님 탄생을 찬양하면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했다. 성탄절에 주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처럼 평강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평화의 왕이 탄생하신 절기이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모든 싸움과 다툼을 그쳐야 한다. 미워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누가 다투고 싸우는가? 시기하고 불평하는 사람이 싸운다. 교만하고 자기 의에 사로잡힌 자가 싸운다. 믿음의 실력이 딸리는 자가 싸운다. 싸우면 평화가 깨지고 지옥같은 곳이 된다. 사탄은 성도들끼리 싸우면서 평화가 깨지는 것을 너무 좋아한다. 싸우는 것은 곧 사탄의 편을 드는 것이다. 우리들은 주님의 정신을 본받아 가정에서 화평하고, 교회에서 화평하고, 일터와 삶의 자리에서 화평해야 한다. 어디서건 은혜 안에서 적극적으로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되시길 기원한다.
<대림절에> 2024년 12월8일 우리는 지금 대림절을 지내고 있다. 대림절은 영어로 Advent 이다. 대림절은 현시(現示)를 뜻하는 헬라어 ‘에피파네이아’, 현존(現存)을 일컫는 헬라어 ‘파루시아’, 또한 도착(到着)을 의미하는 라틴어 ‘아드벤투스(adventus)’에서 유래하였다. 최초의 라틴어 성경인 불가타 역에서는 이 말의 의미를 ‘예수 그리스도 께서 사람 가운데 오심’ 이라고 해석하였다. 대림절의 기간은 본래 4주에서 6주 정도로 동방과 서방교회가 서로 달랐다. 헌데 가톨릭과 기독교는 성탄절 전 4주간을 대림절로 같이 지키고 있다. 성탄절을 12월 25일로 정하고 이를 기다리는 대림 절기가 시작된 것은 4세기부터 이다. 이 대림절이 제정된 동기를 제공한 주요 인물이 있는데 그는 4세기에 이단으로 정죄된 아리우스라는 사람이다. 북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 출신인 아리우스는 삼위일체를 거부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였다. 그는 성자 예수는 창조된 피조물이며 태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성자는 성부로부터 창조되었으므로 당연히 성부보다 열등한 존재였다. 이런 아리우스의 주장은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교회는 ‘니케아 신경’을 제정하며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삼위일체 교리를 확고히 하였다. 아리우스가 죽은 후에도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늘어나자 교회는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이들을 재차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이후 교회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교리 수호와 함께 성자 예수의 신성을 강조할 필요성을 느꼈고 자연스럽게 세상의 구세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탄생일을 기념하고 강조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예배적 전통으로 이어지면서 대림절의 전통이 확립되었다. 대림절은 조용한 기다림의 절기이다. 초대교회로부터 대림절은 엄숙하고 숙연한 분위기로 지켜져 왔다. 대림절은 아기 예수로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정신을 마음에 잠잠히 새기면서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절기이다. 즉 대림절은 침묵과 묵상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이며,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며 믿음을 확인하는 절기이다. 대림절에 행동반경이 큰 행사와 모임보다는 예수가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음을 믿으며 조용히 기도와 말씀 묵상과 섬김에 힘쓰시길 기원한다. <예수님을 통한 정의>2024년 12월1일 로마의 첫번째 황제인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B.C. 63 년- A.D. 14 년)는 노예와 무력 정복과 뇌물을 바탕으로 당대의 제국을 건설했지만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법과 질서를 존중하는 통치자로 알려지고 싶어 했다. 그 소원을 이루려고 그는 사법 절차를 새롭게 마련, 시행했고 오늘날의 사법제도에서 정의의 여신으로 불리는 유스티티아를 로마 시민에게 소개했다. 또한 그는 제국의 인구조사를 실시했는데, 그 결과 유대출신인 마리아와 요셉이 베들레헴으로 가게 되었고, 그들을 통해 온 백성들이 오래동안 기다려 온 메시아가 그곳에서 탄생하게 되었다(미가 5:2-4). 이런 아우구스투스의 계획은 자신을 비롯한 세상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것은 그 누구보다 위대한 왕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진정한 정의가 무엇인지를 당신의 삶과 죽으심의 내용을 통해 보여 주신 것이다. 예수님이 오시기 수 세기 전 미가 선지자의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속임수와 폭력과 부정축재의 문화에 젖어 있었다. 하나님이 끔찍이 사랑하셨던 민족인데 불의를 행한채 자신들의 하나님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서로 공의를 행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의 참 뜻을 세상에 보여주기를 간절히 원하셨다. 그리고 이런 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바람이 예수님을 통해 온전히 실현되었다. 예수님은 당시 상처받고 잊혀지고 무력한 자들이 갈망하던 정의가 무엇인지를 세상에 제대로 보여 주셨다. 그 결과 미가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져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사람 사이의 올바른 관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것은 아우구스투스처럼 법과 질서를 강요하는 외적인 힘이 아니라, 섬김의 왕이신 예수님의 자비, 선, 진리에서 우러나온 영적인 힘이다.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8). 주여, 예수님을 힘입어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에 허락하신 모든 이들에게 정의로운 일을 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목회칼럼 2024년 11월
<미즈노의 감사> 2024년 11월24일 일본에 미즈노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인은 아주 심각한 장애인이었습니다. 전신이 해삼처럼 늘어져서 수족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며 게다가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했다. 물론 자신의 의지에 따라 글도 쓸 수 없습니다. 그가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눈을 반짝이는 것뿐이었습니다. 그것도 한번 깜빡이는데 무척 많은 힘을 들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헌신적인 형수가 있었습니다. 미즈노가 발표한 시들은 그의 형수의 헌신적인 도움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미즈노가 시상이 떠오를 때에 그의 형수가 일본어 50자표를 걸어 두고 막대기로 한 자씩 짚어 내려가다가 미즈노가 원하는 글자를 짚으면 미즈노의 눈이 유난히 반짝거립니다. 그러면 형수는 그 글자를 백지에 써 두고, 다음 자를 위해 또 집어 내려가다가 미즈노가 원하는 글자를 백지에 더하면서 이런 식으로 미즈노의 마음에 있는 시를 글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시 한 글, 한 수를 쓰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두 사람의 지속적 인내가 필요했으며 그 결과 미즈노의 시는 일본 문단의 걸작이 되고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이를 NHK가 특집으로 보도한 것입니다. 미즈노의 시집에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12:9)라는 것이 있습니다. 도대체 미즈노 같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다 말할수 있을까요? 다른 이보다 불편한 점이 훨씬 많아 하나님을 원망하고 또 원망해도 부족할 터인데 말입니다. 그럼에도 미즈노는 자신을 향한 주님의 은혜가 넘친다고 감사했습니다. 파스칼은 “사람은 같은 사건에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고 하였습니다. 동일한 조건, 같은 삶의 무대에 거하면서도 어떤 사람은 그 조건에서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어떤 이는 늘 하나님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미즈노가 체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세상의 어떤 환경에서든 주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면서 살아가길 기원합니다.
<천국에서의 불평> 2024년 11월17일 두 사람이 죽어서 하늘나라에 갔다. 한 사람은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은 게으르고 불만불평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세상살이가 어떠했느냐고 물으셨다. 그러자 부지런한 사람은 힘들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면서 감사드렸다. 헌데 불평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세상은 너무 불공평해서 자신은 단 한번도 행복한 순간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는 자신이 거하던 집도 좁고 돈도 마음껏 써 보지 못했고 자식들은 속을 썩이고 부인도 마음에 안 들고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었다며 계속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번에 하나님께서 그 두 사람이 거처할 곳을 안내해 주셨다. 두 사람은 자신 앞에 펼쳐진 광경에 놀라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두 사람에게 주어진 땅은 세상에서 보지 못한 아름다운 신천지였다. 부지런한 사람은 역시 하늘나라는 아름다운 곳이라며 감탄해 마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벌써부터 소매를 걷고 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아름다운 집과 정원을 만들었다. 그런데 불평많은 사람은 집도 차도 없는 이곳이 무슨 하늘나라 라며 계속해서 투덜거렸다. 그럼에도 소용이 없자 그는 하는 수 없이 먹을 것을 구하고 잠잘 집을 대충 만들기 시작했다. 허나 그가 만든 집은 이내 오물과 쓰레기로 가득찼고 벌레들이 기어다녔으며 지붕에서는 비가 새고 벽은 금이 갔다. 그의 불평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차라리 세상이 더 좋았다며 한탄만 거듭했다. 얼마 후에 하나님이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을 판단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난 너희 두 사람에게 똑같은 조건을 주었다. 허나 한 사람은 그 조건으로 천국을 건설했고 또 한 사람은 그 조건을 갖고서도 지옥을 만들었구나.” 그러자 불만 가득한 사람이 하나님께 따져 들었다. ‘천국은 무위도식하는 곳이지 이렇게 힘들게 일하는 곳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에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끝을 맺으셨다. “천국을 오해하지 말아라.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 그리고 심는대로 거둔다는 진리는 땅의 논리가 아니고 애초 천국의 논리였다. 천국의 논리로 살면 감사하는 사람은 지옥에서도 천국을 건설하며 살지만 불평하는 사람은 천국을 거저 주어도 지옥으로 만들 것이다. 너는 그와 같은 자이기에 결코 천국의 땅 한 평이라도 내줄 수 없다. 네가 만든 지옥에서 영원토록 살아라.”
<파스칼의 고백> 11월 10일 2024년 17세기의 수학자, 과학자, 철학자였던 파스칼의 인생은 불같았다. 그는 젊은 시절 거침없는 인생을 살았다. 그는 17세때 프랑스의 학계를 놀라게한 수학의 혁신적 논리를 펴냈다. 그후 몇 년도 안 되어 오늘날 전자계산기의 초창기 모델을 발명했다. 또한 공기의 압축에 관한 탁월한 이론을 펼쳤다. 이러한 천재성으로 인해 그는 20세가 채 되기 전 프랑스 학계와 귀족사회에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그런 연유로 인해 그는 하늘을 찌르는 교만과 물질주의, 이기주의, 성적인 방종에 빠져 마구 살았다. 그러다가 1654년 11월, 그가 31세 되던 해에 하나님을 만났다.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최고봉에 올랐다고 자부했던 파스칼이 자신이 상상도 못했던 지식과 사랑과 능력을 가진 하나님과 일대일로 부딪힌 것이다. 그때의 감격을 그는 ‘팡세’(고백록)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은총의 해 1654년, 11월 23일 월요일 밤 10시 30분, 그 짧은 시간에 나는 하나님을 만났다. 철학자의 하나님도 지식인의 하나님도 아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만났다. 확신 그리고 또 확신..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기쁨과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그리고 나의 하나님..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들은 이제 나의 뒷전으로 사라져 버렸다. 오직 복음을 통해서만 그 하나님이 내게 다가 오셨다. 의로우신 하나님, 세상은 당신을 모르지만 이제 나는 당신을 압니다. 환희..눈물.. 너무나도 달콤하고 완벽한 포기.. 내 인생의 감독이 되신 그리스도께 완전히 항복했다. 이순간 나의 기쁨은 영원하다. 나는 당신의 말씀을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아멘..아멘..아멘..” 그 후 그는 8년밖에 더 살지 못했지만 그 기간 동안 그는 모든 학문 활동을 접고, 당대 최고의 명상집으로 꼽히는 팡세를 저술했다. 파스칼은 팡세 속에서 인생의 처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끝나고 있음을 정리하고 있다. 현대 수학과 과학의 일대 전환점을 가져온 젊은 천재 파스칼은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자신의 인생의 참 지평을 보았다.
<염려마세요!> 11월 3일 2024년 중국 내지의 선교사였던 허드슨 테일러가 믿음으로 중국 내지에 들어갔다. 그러나 사역거리가 점점 많아지면서 도울 일손들과 돈이 필요했는데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테일러 선교사는 무거운 정신적 부담으로 밤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고 마침내는 신경쇠약까지 걸리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을 읽는데 (요 15:1),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는 구절이 마음에 강하게 와 닿았다. 갑자기 태양 빛이 비치는 것처럼 그의 마음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그렇다. 우리 주님은 포도나무이시고 나는 그의 가지인데 내가 걱정할 것이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 수분과 양분을 공급해 주는 것은 나무이므로 가지인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될 터인데 내가 수분과 양분을 공급하려고 애쓰고 있다니 참 어리석었구나.’라는 강한 깨달음이 왔다. 그는 즉시 엎드리어 기도하기를 ‘주님, 내가 심히 어리석었나이다. 이제는 모든 염려와 근심을 주님께 다 맡기겠사오니 책임져 주옵소서.’라고 했다. 그러자 정말 신비롭게도 마음의 평안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후 테일러는 힘들 때마다 더욱 기도했고, 또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을 받으면서 성공적으로 내지 선교를 감당했다. 믿음 생활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삼고 인생사 모든 것을 그분에게 의탁하는 것이다. 기독자들에게 삶의 주어는 자신이 아닌 주님이시다. 우리는 주님이 자신의 인생과 모든 삶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도록 전적으로 맡겨 드려야 한다. 주님께 의탁해야할 것들 중에 염려가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각종 근심, 염려에 빠진다. 내적 근심, 외적 근심이 그치질 않는다. 헌데 염려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거나 경감되지 않는다. 예수님은 이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 할수 있겠느냐.” 염려까지도 기도 중에 주님께 드려야 한다. 하면 주님이 처리해 주시고 마음에 평강을 허락해 주신다. (빌 4:6,7)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평강의 은혜가 우리들 삶의 자리에 가득하길 기원한다.
목회칼럼 2024년 10월
< 마음 안에 말씀을 담고 > 10월 27일 2024년 모든 생각과 언어, 행위는 선하던 악하던, 바르던 그르던 마음으로부터 근원한다. 영적 생명에 이름도 마음으로 인해서이고 죽음에 이름도 마음으로 인해서이다.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삶의 주체는 마음이다. 고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을 살피고 다스리고 지키는 것이다. 생명에 이르도록 마음을 다스리고 지키는 비결은 무엇일까 ? 현대인들은 마음을 다스리고 평온해지기 위해 참선, 고행을 하고 수양을 쌓는다. 자연을 벗삼고 독서를 하고 글을 쓰고 운동과 노동을 하고 단식, 요가, 명상에 잠긴다. 허나 이것들로 마음 안에 내재된 죄의 본성과 두려움이 근절되지 않는다. 성경은 마음 안에 말씀을 두라고 권한다. 우리는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때 마음은 반석같이 굳건해지고 삶은 거룩한 생명으로 약동한다. 반면에 우리 안에 말씀이 없으면 마음이 표류한다. 오늘은 이런 마음, 내일은 저런 마음이 된다. “내가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안에 두었나이다” 라는 시인의 고백처럼 말씀을 안에 둘 때 말씀은 마음의 정원에 기숙하고 있는 죄의 세력을 소멸시킨다. 말씀은 믿음을 잉태시켜 영적으로 새 생명을 얻게 하고 자라게 한다. 그리고 마음의 생각과 뜻을 수시로 살피고 깨닫게 하여 의로운 삶을 유지하게 한다.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담고 말씀대로 행하면서 매일매일이 거룩함과 생명력으로 넘치는 아름다운 날들 되길 기원한다.
< 비워내야할 것들 > 10월 20일 2024년 어느 샘터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어요. “나를 맘껏 마셔주세요. 그래야 새 물이 솟아납니다”라는.. 샘물은 퍼내고 퍼내도 다시 샘 솟습니다. 아니, 비워져야만 채워집니다. 어디 샘물 뿐일까요? 우리네 마음의 밭에도 비워질 때 비로소 채워지는 것들이 참 많답니다. 공상을 비워보세요 하면 꿈이 들어오지요. 집착을 비우면 간절함이 들어오고 비판을 비우면 관용이 들어오며 지나침을 비우면 적당함이 들어온답니다. 자기애를 비워보세요 형제애가 들어옵니다. 자기 의를 비우면 진리가 들어오고 자기 확신을 비우면 믿음이 들어오며 자신을 비우면 그때 비로소 주님이 들어 오십니다. 이토록 마음의 정원은 비울 때 더 아름답고 숭고한 것으로 펑펑 채워지는 풍요함을 경험하지요. 오늘 우리들이 비워내야할 삶의 목록들은 무엇인지요? 그것들을 떠올리면서 주님의 손길을 구하시지요.
<주님과의 교제> 10월 13일 2024년 성경에는 예수님이 특별 사랑하시는 가정이 나오는데 베다니의 나사로 가정이다. 나사로에게는 두 누이가 있는데 마리아와 마르다이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들르실 일이 있으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사로 가정에 유하곤 하셨다. 어느날 예수님께서 다시 이 가정을 방문하셨다. 그때 마르다는 음식으로 접대하길 원했고 마리아는 예수님 발아래서 말씀듣기를 원했다. 헌데 마르다는 음식을 준비하면서 염려, 걱정이 생겼다. 그 이유를 주님께서는 많은 일 때문이라 하시면서 이에 대한 처방책으로 많은 일들보다는 정말 중요한 한 가지에 몰두하라 하셨다. 자신의 필요이상으로 많은 일을 하려 하기 보다는 정말로 중요하고 의미있고 필요하다 여기는 한 가지 일을 선택해 집중하라는 말씀이셨다. 규모있는 삶을 위해 우리들이 마음에 새겨야 할 단어들중 하나는 ‘선택과 집중’이다. 기독자가 무엇보다 집중해야 할 일은 마리아가 했던 일, 즉 조용히 주님말씀을 경청하면서 그분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일이다. 주님은 이런 마리아에게 좋은 편을 택했다 칭찬하셨다. 주님과의 교제는 봉사보다, 어떤 행위보다 더 가치있고 소중하다. 마음이 들떠서 안정되지 않은 상태의 섬김보다 차분하고 진지한 마음으로 말씀을 들고 주님과 교제하는 것이 아름다운 믿음이다. 주님과의 참된 교제없이는 어떤 신앙행위도, 선행도, 봉사도, 심지어는 예배행위도 형식이고 허례이다. 영적 성숙은 직분, 신앙기간이 아닌 주님과의 교제를 통해 형성된다. <헨리 나우웬이 어떤 모임에서 교회에서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지금은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한 여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매가 불평하는 모든 일들은 정말로 중요한 것들이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자매와의 관계입니다. 자매님은 예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계신가요? 만약 아니라면 얼마동안 매일 5분씩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기도하면서 주님의 임재를 간구해 보세요. 주님과 교제후에는 일들에 대한 불평이 사라질 것입니다”> 날이 갈수록 주님과의 사이에 더욱 깊은 친밀감이 형성되길 기원한다.
< 이 몸의 소망 무엔가> 10월 6일 2024년 영국에 에드워드 모트라는 소년이 있었다. 부모는 있었지만 집안이 가난해서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어린 나이에 그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학교갔다 와서는 저녁에 가구 공장에 가서 일을 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이었다. 그날은 공장이 문을 닫고 일을 하지 않았다. 매일 저녁 가구공장에서만 일하던 이 소년이 공장이 문을 닫으니까 갈 곳이 없었다. 해서 런던거리를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는데 한 건물에서 찬송소리가 들렸다. 열린 문으로 예배드리는 모습이 보여 구경하러 들어갔다. 사람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예배를 드리는데 아주 신기했다. 찬송을 부르고, 목사님 설교도 들었는데 그 설교시 이 소년이 은혜를 받았다. 성령 받고 감동을 받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고백을 했다. “이제껏 나는 가난과 고통, 절망 속에 힘들게 살았는데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고, 예수께서 나를 도와주신다면 이제부터 예수 잘 믿고 살겠습니다. 주님을 의지하겠습니다. 그분은 나의 소망이십니다.” 그때부터 그는 예수님으로 자신의 소망을 삼고, 열심히 교회에 나갔다. 공부하고 일하는 것보다도 더 열심히 교회에 나갔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생각하면서, 어려움과 절망을 극복하고 열심히 살았다. 그러다 그는 가구공장의 직공으로 시작해서 사원이 되고, 나중에는 큰 가구 공장의 사장이 되었고 그 지역의 모든 이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어느날 그는 자신의 과거, 어린 시절과는 너무 달라져 있는 현재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런 감사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지켜 주셨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종이를 꺼내어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적었다. 그것이 바로 찬송가 488장이다.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부모보다도, 선생님보다도, 친구보다, 그 어느 무엇, 누구보다도 예수님은 자신의 소망이요, 자신의 반석이요, 자신의 축복이었다고 에드워드 모토가 글을 쓴 덕택에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이 그 찬송을 부르고 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인생의 소망이 되신다. 아니, 모든 것이 되신다. 예수님은 형통함 중에는 물론 곤고함 중에도 소망이 되신다. 심지어는 죄중에서도 새 삶의 소망이 되신다. 정함이 없는 세상 것에 소망을 두지 말고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두시길 기원한다.
목회칼럼 2024년 9월
<인디언 기도문> 9월 29일 2024년 바람 속에 당신의 목소리가 있고 당신의 숨결이 세상 만물에게 생명을 줍니다. 나는 당신의 많은 자식들 가운데 작고 힘없는 아이입니다. 내게 당신의 힘과 지혜를 주소서.
나로 하여금 아름다움 안에서 걷게 하시고 내 두 눈이 오래도록 석양을 바라볼 수 있게 하소 서. 당신이 만든 물건들을 내 손이 존중하게 하시고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내 귀를 예민하게 하소서.
당신이 내 부족 사람들에게 가르쳐 준 것들을 나 또한 알게 하시고 당신이 모든 나뭇잎, 모든 돌 틈에 감춰 둔 교훈들을 나 또한 배우게 하소서.
내 형제들보다 더 위대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장 큰 적인 내 자신과 싸울 수 있도록 내게 힘을 주소서. 나로 하여금 깨끗한 손, 똑바른 눈으로 언제라도 당신에게 갈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소서.
그래서 저 노을이 지듯이 내 목숨이 사라질 때 내 혼이 부끄럼 없이 당신에게 갈 수 있게 하소서.
<혼자가 아니다> 9월 22일 2024년 1969년 7월 20일, 닐 암스트롱과 버즈 올드린은 달 착륙선에서 나와 인류 최초로 달 표면을 걸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내 유명해졌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탐사 팀의 세번째 사람인 콜린스를 곧잘 잊어버린다. 콜린스는 그때 아폴로 호 탐사선을 조종하고 있었다. 자신의 팀원들이 달의 표면을 탐사하기 위해 착륙선 계단을 내려갈 때, 콜린스는 달의 반대편에서 혼자서 기다렸다. 게다가 그는 그 시간에 지구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완전히 연락이 단절되어 있었다. 미국 항공 우주국의 관제 센터는 이렇게 논평했다. “아담 이후로 그 어느 누구도 마이클 콜린스와 같은 외로움을 맛본 사람은 없었다.” 지구를 멀리 떠난 곳에서 그는 누구와도 연락할 수 없이 철저히 홀로 된 상태였다. 성경에는 어떤 환경 하에서 뼈에 사무치게 외로움을 느꼈을 한 청년을 보여준다 그는 야곱의 사랑받는 아들 요셉이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다른 형제들보다 더 큰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이를 시기한 형들의 손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 가게 되었다. 그때 나이 17살이었다. 알지못하던 미지의 환경에 강제 처했을 때 요셉의 마음은 어떠했겠는가? 그런데다 요셉은 무고하게 감옥에 갇혀 더욱 고립되었다. 하면 요셉은 어떻게 가족이 가까이에 없는 외국의 감옥상황에서 살아 남았을까?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이다. 창세기 39장 21절에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기록한다. 창세기 39장은 이런 위로의 말씀을 독자들에게 네 번이나 상기시켜 준다. 같이 있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결코 외롭지 않다. 인생의 소외감은 사람의 부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재에서 발행한다. 즉 외로움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 문제이다. 자신에게 하나님이 안 계시면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도 쓸쓸하고 외롭게 그지없다. 감사하게도 감격스럽게도 주님께서 먼저 우리들에게 약속하셨다.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주님이 약속하신 이 말씀을 굳게 붙들고 때로의 거친 세파를 헤쳐 가시라.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있는 한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뮬러의 습관적 성경읽기> 9월 15일 2024년 하나님께서는 오직 기도와 사랑의 섬김으로 고아들을 먹이겠다는 결단으로 고아원 사역을 시작한 조지 뮬러를 크게 사용하셨다. 뮬러는 영국에서 3천명이 넘은 고아들을 돌보는 사역으로 사람들로부터 ‘고아원의 아버지’ 라는 칭호를 받았다. 어느날 한 신문기자가 그를 찾아와서 ‘어떻게 그런 엄청난 일을 할수 있습니까?” 물었다. 이에 뮬러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평생에 성경을 100번 통독했습니다. 그러나 한번도 성경 읽는 일에 싫증이 난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성경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새로와졌고 희망도 새롭게 솟아났습니다. 이것은 나의 54년 동안의 경험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주로 믿은 처음 3년 동안은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았습니다. 그때 나는 신자로서의 기쁨과 사명을 느끼지 못한 죽은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당시의 3년은 나에게 잃어버린 시간이었습니다. 영적 생활의 활력은 성경을 읽고 묵상하느냐 읽지 않고 묵상하지 아니하느냐는 문제와 정비례해 올라가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합니다. 성경읽기를 습관적 일과로 할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은혜입니다.” 뮬러는 시간과 장소를 정해놓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지는 못했다. 교회를 목회하고 3천명이나 되는 고아들을 돌보고 행정적 일도 진행해야 하는 상황에서 정해놓은 시간에 말씀을 읽고 연구함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나 그는 하루도 빼지 않고 수시로 반복해서 성경을 읽었다. 기도와 말씀은 뮬러의 영혼을 위한 절대적 호흡이며 양식이었다. 그는 교회의 목양과 고아원의 운영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뮬러는 이런 확신을 쉬임없는 기도와 깊은 말씀묵상 을 통해 다져가면서 주님이 맡겨주신 사역에 임했고 풍성한 열매를 거두었다. 기독자들에게 성경말씀은 구원에 이르는 안내서이고 인생과 삶의 절대적인 규범이다. 이번 주간(9.16-21일) 은 금년도 두번째 성경읽기 주간이다. 범위는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이다. 매일 3장의 성경읽기에 더해 이 책들을 꼭 읽으시길 바란다. 하나님 말씀이 우리의 영을 살린다.
<가을엔 따뜻한 가슴을 지니게 하소서> 9월 8일 2024년 가을엔 마음의 등불 하나 켜 두게 하소서 하루의 아픔에 눈물짓고 이틀의 외로움에 가슴 쓰린 가난해서 힘겨운 나의 이웃이여! 그 가녀린 빛이 무관심의 벽을 넘어 우리라는 이름의 따뜻한 위로가 되게 하소서
가을엔 뜨거운 눈물의 의미를 깨닫게 하소서 나무가 열매를 맺기까지 참아낸 긴 시간들이 알알이 익어갈 때 우리 살아가는 인법도 이와 같아 인내와 믿음과 기다림의 눈물 없이 어떻게 사랑을 말할 수 있으리오
가을엔 따뜻한 가슴으로 기도하게 하소서 같은 비바람을 거치고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와 나무를 떠나 흙으로 돌아가는 낙엽을 위하여 희망을 잃고 방황하는 누구를 위하여 건강을 잃고 신음하는 그 누구를 위하여
가을엔 비움의 지혜를 깨닫게 하소서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기보다 지는 낙엽의 겸허함을 바라보게 하소서 욕망의 늪은 그 깊이를 모르고 욕심의 끝은 한이 없나니 하늘을, 세상을 원망하기보다 오늘 살아 있음에 감사하게 하소서
<옛 사람의 죽음 > 9월 1일 2024년 배추의 일생은 죽음의 연속이다. 땅에서 충분히 자란 순간 뽑혀서 죽는다. 칼에 의해 배가 갈라지며 죽는다. 소금에 절여지며 또 죽는다. 양념들에 무쳐지며 다시 죽는다. 그리고 먹는 이들의 입안에서 씹히고 완전히 죽는다. 이처럼 배추는 죽고 죽어야 존재의미를 갖는다. 우리들 삶에는 믿음과 소망, 사랑과 감사같은 생명적 요소들이 절대 필요하지만 죽이고 근절시켜야 할 요소들도 많다. 우리는 나이 들어가면서 생명과 대척점에 있는 요소들이 자연스러이 사라지고 소멸될 줄로 기대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그놈들은 참 끈질기다. 순간순간 살아 세력을 떨친다. 그놈들은 옛 사람 안에 내재된 각종 악독들, 육신적 자아, 탐심, 교만, 혈기, 고집, 시기, 외식, 기만, 질투등이다. 성경은 옛 사람, 옛 지체, 땅에 있는 지체들을 죽이고 버리라고 명한다. 그것들은 주 안에 거하는 새 사람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아직도 남아 있는 우리의 옛 사람은 정말 죽어야 한다. 그것이 살아날 때마다 죽어야 한다. 배추보다 더 자주 더 철저히 죽어야 한다. 회생의 여지가 희박해질 때까지 날마다 죽어야 한다. 우리에게 이런 기도가 절실하다. “주여! 십자가 위에서 옛 사람을 죽이시고 주님 생명으로 새 사람을 강건케 하옵소서”
목회칼럼 2024년 8월
< 성령의 사람으로 > 8월 25일 2024년 한 여인이 빈통에 쓰레기를 주어 담으니 쓰레기 통이 되었습니다. 쓰레기를 비우고 채소를 담으니 반찬거리 바구니가 되었지요. 채소를 비우고 쌀을 담으니 쌀통이 되었고 쌀을 비우고 꽃들을 담으니 꽃병이 되었습니다. 동일한 통이었지만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통의 이름이 달라졌고 가치가 달라졌습니다.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시지만 삶의 주관자는 생각, 언어, 행위를 관리 감독하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담아내는 그릇이고요. 마음에 담긴 내용물들이 삶의 질과 가치 아름다움을 가름합니다. 우리 마음에 무엇을 담고 무엇을 비워야 할까요? 성경은 삶을 깨끗하고 우아하고 풍성케 하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등을 담을 것을 권합니다. 반면에 삶을 더럽히고 무질서하고 빈궁하게 만드는 음란, 정욕,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부정부패, 속임수, 방탕, 교만, 비열한 눈빛, 중상모략, 미련함등을 비울 것을 명하지요. 삶을 청결케 하는 요소들을 마음에 담고 살아가면 성령에 속한 사람이라 불리우지만 부패케 하는 육체의 소욕을 마음에 담고 살아가면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 불리웁니다. 이 주간을 성령의 사람으로 아름답게 살아가시길 기원합니다. <기도> 8월 18일 2024년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는 매일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믿음의 행동이며 주님의 복을 구하는 행위이다. 기도는 주님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절대 비결이다. 기도시 우리는 이전보다 더욱 깊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 불화하게 되었는데 이런 하나님과의 관계를 사랑으로 회복시켜 주는 방편이 기도이다. 기도는 신을 움직일 수 있도록 ‘주문’을 읊조리는 것이 아니며 황홀경에 빠져들듯이 중얼거리는 것도 아니다. 기도는 자신과 하나님의 인격적인 소통이며 교제이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이며, 감사의 노래이다. 기도하면 할수록 하나님과의 친밀도가 더욱 강해진다. 기도할수록 주님을 더욱 잘 알게 된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우리의 실상을 소상히 아신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계획을 아시고 꿈과 소원을 아신다. 또 우리의 슬픔과 아픔, 불행과 고통도 낱낱이 아신다. 주님은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아는 것보다 우리들에 대해 더욱 세밀히 속속들이 아신다. 마 6:8에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기도를 명하신 것은 기도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위해 필수적 과제이며 또한 그것이 자신의 믿음에 대한 고백이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자신의 믿음지수는 기도지수만큼이다. 믿음이 크고 강하면 기도가 강해지고 믿음이 작고 약할수록 기도도 약해진다. 또한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기도를 더 열심히 하면 믿음의 열성도 더해진다 라고.. 우리가 기도하는 만큼 주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깊어지고 그분과의 관계도 깊어진다.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만 기도하는게 아니라 주님과 더 친밀해지고 그를 더 사랑하기 위해서 기도한다. 주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시길 원하시고 우리의 기도하는 음성을 듣길 원하신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우리의 필요한 것을 채우시고 공급하실 것이다. 이번 토(24일)요일은 교회에 찾아나와 한 시간 기도하는 날이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기도에 참여하시길 부탁드린다.
<일상에 깃든 은혜> 8월 11일 2024년 간혹 일상이 중단될 때가 있습니다, 전쟁, 전염병, 천재지변, 가족사, 육신의 질고로 인해 매일 만나던 사람을 못 만나고 매일 가던 곳이 멈춰지고 매일 하던 일이 모두 중단될 때가 있습니다. 매일 만난다고 귀하지 않은 사람은 아니었는데, 매일 가는 곳이라고 귀하지 않은 곳은 아니었는데, 매 일 하는 일이라고 귀하지 않은 일이 아니었는데 매일 대할 때는 잘 몰랐습니다. 그들의 귀함과 아름다움을요. 살아가면서 특별한 사연이 아니어도 일상이 귀함을 깨닫습니다. 늘 서 있는 지금 이 자리, 늘 같이 있는 이 사람, 늘 하고 있는 이 일이 참 귀합니다. 매일 서 있는 자리인데 발 디딤이 가볍고 자리가 새롭습니다. 매일 하는 일인데 매순간이 벅차고 새롭습니다. 매일 만나는 사람인데 매순간이 반갑고 좋습니다. 일상의 자리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리이고, 일상에서 만나는 이들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람들이고, 일상의 일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입니다. 현실에서의 일상이 가장 귀합니다. 일상이 즐거움이요, 감사요, 은혜입니다.
<무명 글 - 뉴욕 맨하탄의 한 흑인 노숙자가 쓴 글> 8월 3일 2024년 내가 배가 고플 때, 당신은 인도주의 단체를 만들어 내 배고픔에 대해 토론해 주었지요. 정말 고맙습니다.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 당신은 조용히 교회 안으로 들어가 내 석방을 위해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정말 잘한 일입니다. 내가 몸에 걸칠 옷 하나 없을 때, 당신은 마음 속으로 내 모습에 대해 도덕적인 논쟁을 벌였지요. 그런데 당신의 기도와 논쟁이 있다해서 내 옷차림이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내가 병들었을 때, 당신은 무릎 꿇고 앉아 신에게 당신과 당신 가족의 건강을 기원했지요. 하지만 난 당신이 필요했습니다. 내가 집이 없을 때, 당신은 사랑으로 가득한 신의 집에 머물라고 내게 충고를 했습니다. 그때 난 당신이 날 당신의 집에서 하룻밤 재워 주길 원했습니다 내가 외로웠을 때 당신은 날 위해 기도하려고 내 곁을 났지요. 왜 내 곁을 떠났나요? 왜 내 곁에 있어 주지 않았나요? 그래도 당신은 매우 경건하고 신과도 가까운 사이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난 아직도 배가 고프고, 외롭고, 춥고, 아직도 고통받고 있습니다. 당신은 정말 그걸 알고 있나요?
목회칼럼 2024년 7월
<하늘을 보자> 7월 28일 2024년 인생에는 좋고 화려한 날만 있는게 아니다. 살다보면 예기치 못한 일들이 발생해 삶이 어둡고 침울해질 때가 있다. 지침과 힘듬이 임계치에 도달하면 일손을 놓고 그냥 주저 앉아만 싶어진다. 동정내지 비난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을 피해 어디론가 숨어 버리고 싶어진다. 사면팔방이 막혀 버린 담 인듯, 풀 한 포기도 없는 사막 인듯 삭막한 현실 앞에서 깊은 한숨이 토해진다. 많은 사람들에게 요즘의 세상살이가 그런듯 하다.그런데 모든 것이 닫혀 버린 듯한 상황에서도 열려 있는 곳이 한 곳 있다. 하늘이다. 그렇다. 하늘은 예나 지금이나 한번도 닫힌 적이 없이 항상 열려 있다. 어리석은 이는 막힌 곳을 보며 답답해 하고 억울해 하지만 지혜로운 이는 열린 곳을 보면서 희망을 찾는다. 우리들이 척박한 현실로만 향하던 시선을 달리해 억지로라도 하늘을 볼때 응어리진 마음이 풀어지고 긴장된 영혼의 근육들이 이완된다. 세상사로 인한 염려와 근심, 얽매임이 물러가고 안도와 평안, 자유함이 스며든다. 하늘 그곳에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그윽한 눈길로 우리를 바라보신다. 그리고 삶의 애환에 대한 치유책을 제시하고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신다. 성경은 하늘을 보고 위를 보자 라고 권한다. 인생의 문제는 시선의 문제, 즉 어디를 보느냐의 문제이다. 닫힌 곳을 보면 인생도 닫혀지만 열린 곳을 보면 인생도 열린다. 인생의 무거움이 가중될수록 하늘을 보면서 그 무게를 덜어내고, 삶의 짐들을 가벼이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주님의 인자하심에 깊이 감사했으면 좋겠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7월 21일 2024년- 킴벌리 커버거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 금방 학교를 졸업하고 머지않아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아니, 그런 것들은 잊어버렸으리라.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았으리라.그 대신 내가 가진 생명력과 단단한 피부를 더 가치있게 여겼으리라. 더 많이 놀고, 덜 초조해 했으리라.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데 있음을 기억했으리라. 부모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고 또한 그들이 내게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사랑에 더 열중하고 그 결말에 대해선 덜 걱정했으리라. 설령 그것이 실패로 끝난다 해도 더 좋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아, 나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리라. 더 많은 용기를 가졌으리라. 모든 사람에게서 좋은 면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그들과 함께 나눴으리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분명코 춤추는 법을 배웠으리라. 내 육체를 있는 그대로 좋아했으리라. 내가 만나는 사람을 신뢰하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었으리라. 입맞춤을 즐겼으리라. 정말로 자주 입을 맞췄으리라. 분명코 더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해했으리라.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사람다움이란 > 7월 14일 2024년 고등학교시절 학급 교훈이 있었는데 그것은 ‘사람다운 사람으로 자라가자”였다. 철없던 시절에 다분히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교훈을 조회시간 때마다 학우들과 함께 복창하곤 했었다. 사람답게 사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상식을 갖고 사는 것이다. 상식은 지극히 당연한 것인데 요즘 시대에 상식이 많이 실종되었다. 그것을 되찾는 것이 사람다운 것이다. 또한 사람답다는 것은 휴머니티를 지니는 것이다. 즉 인격적이며 책임감이 있으며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겸손하고 너그럽고 주어진 일에 성실한 것이다. 휴머니티를 지닌 사람은 누구에게도 비굴하게 굴복하지 않으며, 자신의 힘으로 약한 자를 도와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상식선에 따라 휴머니티를 갖고 살아가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과 많이 통한다는 것이다. 사람답게 사는 사람을 구약성경은 의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의인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삶을 회복한 사람을 말한다. 신약성경에서는 이것을 빛의 열매,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로 말한다. 또한 이 모습을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의 삶, 성령의 열매로 말한다. 더 나아가 사람답게 사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람은 사랑할 때 가장 사람다와진다. 사랑 안에서 인간성이 최고도로 발휘되며 인간의 가치가 가장 아름답게 드러난다. 주님은 ‘너희 빛을 세상에 비추라’ 말씀하셨는데 그 빛은 착한 행실이라고 설명하셨다. 착한 행실, 즉 사랑이 사람답게 사는 상식의 삶이다 라는뜻이다. 반면에 사람다움을 잃어버린 모습은 짐승과 같다. 짐승같은 사람을 보면 우리는 견딜 수 없어 한다. 그 사람 안에서 몰상식을 보기 때문이다. 또 인간다움, 인간으로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를 저버렸음을 보기 때문이다. 사람답지 못할때 비인격적이고 무책임하며, 나대며, 불친절하고, 게으르고 교만하며, 타인을 억누르고, 약한 자를 짓밟게 된다. 또한 탐욕과 거짓으로 행하게 된다. 이게 바로 짐승성(brutality)이다. 이런 사람을 구약성경은 악인이라 말한다. 이런 사람을 신약성경은 타락한 옛 본성대로 사는 사람, 이성없는 짐승같은 사람이라 말한다. 결국 사람답지 못한 자는 하나님을 떠나 마귀의 종노릇을 하며 자기 중심적으로 사는 사람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좋은 믿음은 결국 상식을 지키며 사는 것, 즉 사람답게 사는 것이다.
<기도한 대로는 아니지만> 7월 7일 2024년 -정용철 내가 기도한 대로는 아니지만 지금의 내 모습에 만족합니다. 정말 멋있고 예쁜 모습의 나 이기를 바랐지만 만약 그렇게 되었으면 나는 지금보다 더 교만하고 외모에 치중하여 겸손과 소박함의 아름다운 삶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내 모습에 감사할 뿐입니다. 내가 기도한 대로는 아니지만 지금 우리 집의 모든 것에 만족합니다. 더 잘 살고 여유 있는 가족이기를 바랐지만 만약 그렇게 되었으면 지금 우리 가족은 화목과 사랑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우리 가족 이대로 감사할 뿐입니다. 내가 기도한 대로는 아니지만 지금 나의 직장생활에 만족합니다. 환경이 더 좋고 보수가 높은 직장이기를 바랐지만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나는 노동의 가치와 삶의 의미를 모른 채 안일에 젖어 나태해져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직장생활에 감사할 뿐입니다. 내가 기도한 대로는 아니지만 지금 내가 걸어가고 있는 길에 만족합니다. 더 쉽고 빠른 길로 가게 되기를 바랐지만 만약 그렇게 되었으면 지금의 소중한 것을 보지 못한 채 외롭고 지친 몸으로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걷고 있는 나의 길에 대하여 감사할 뿐입니다. 내가 기도한 대로는 아니지만 지금 내가 소유한 물질에 만족합니다. 더 많은 물질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랐지만 만약에 그렇게 되었다면 나는 마음의 아름다움보다 물질의 풍요가 더 귀한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만큼의 내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목회칼럼 2024년 6월
<부흥의 불길> 6월 30일 2024년 영적 부흥은 천국의 나날들이 이 땅에 임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 땅이 주님의 영으로 충만해지는 것을 뜻한다. 즉 부흥은 성령이 찾아오셔서 그분의 존재로 가득 채우시는 것을 뜻한다. 18세기의 위대하고 경건한 설교자인 조나단 에드워즈는 1735년에 매사추세츠 주 노샘프턴의 작은 도시에 성령께서 찾아 오신 일을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성령의 역사는 곧 그 마을을 영광스럽게 바꿔 놓았다. 그래서 연이어 찾아온 봄과 여름에 그 마을은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했다. 미국 기독교 역사상 그때처럼 마을 주민 모두에게 사랑과 기쁨으로 충만하면서도 영적 고뇌로 충만했던 적은 없었다. 거의 모든 집에 하나님이 계시는 표시가. 각 가정마다 자신들에게 주신 구원으로 인해 기쁨이 넘치고 평안과 자유함이 넘쳤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영적으로 새로 태어난 것을 기뻐하고 남편은 아내가, 아내는 남편이 새로 태어난 것을 기뻐했다. 당시의 공공 집회는 무척 아름다웠다. 예배 시에 생명과 활기가 넘쳤다. 모든 청중은 목회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열심히 받아 먹었다. 어떤 이들은 말씀을 들을 때 그대로 살지 못한 슬픔과 고뇌로 울었고, 다른 이들은 말씀에 담겨 있는 기쁨과 사랑으로 울었으며, 또 다른 이들은 이웃에 대한 염려와 연민으로 울었다.” 부흥이란 하나님이 그 백성을 찾아오시는 일이다. 하나님의 생명을 만나 그것을 자신의 마음에 품는 일이다. 천국의 나날들이 이 땅 위에 가득 임하는 일이고, 생기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한없이 넘쳐나는 일이다. 헌데 부흥은 스스로의 결의와 결단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부흥은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과정으로 이끄시고 완성시키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되살아났을 때 부흥으로 인도하신다. 말씀없이는 부흥도 없다. 즉 부흥은 말씀의 부흥이다. 초대교회에는 말씀이 늘 왕성했다. 그 결과 교회가 굳게 서 갔다. 또 부흥은 우리들이 기도에 전념할 때 발생한다. 기도는 주님마음을 움직이는 강력한 도구이다. 기도에 매달리는 개인, 교회, 국가를 주님은 중흥시키신다. 또 부흥은 성도들간 지난 날의 죄와 허물을 통회 자복하고 회개했을 때 일어난다. 죄를 깨우치고 자복할때 주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모든 불의에서 우리 죄를 깨끗케 하시고 성령의 임재로 채워주신다. 또한 부흥은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 그분 마음으로 자신의 심령을 채우는 것이다. 주님 마음으로 채워질 때 영육간에 풍성해지고 인생과 삶이 자유로와진다. 오늘 일일 부흥회 날이다.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간구하는 중에 주님 생명으로, 주님 마음으로, 주의 영(성령)으로 가득 채워지길 기원한다. 주여, 개인영성과 우리 교회에 부흥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게 하소서 ! <소수의 사람만이라도> 6월 23일 2024년 아무 것도 없는 텅빈 진흙 마당에 나루 한 구루가 심겨졌다. 몇 해가 지나면서 그 나무의 잎사귀가 무성해지고 꽃이 피었다. 그 나무로 인해 황량하던 마당 풍경이 풍요스럽게 바뀌었다. 무거운 가구들로 어둡게 보였던 방 안에 흰 백합화 화분 하나가 들어왔다. 그 화분으로 인해 집 안이 밝고 화사해졌다. 무미건조한 사람들 사이에 한 쾌활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로 인해 그곳 분위기가 활기차고 명랑해졌다. 무늬만 있는 기독인들 사이에 기도 열심히 하는 성도 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로 인해 그 공동체 내에 신앙의 에너지가 발생하였다. 세상과 삶의 변화는 많은 무리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소수의 창조자들에 의해서 일어난다. 의식이 있고 가치관이 뚜렷한 한 두사람의 등장으로 삶의 풍경이 바뀌고 생활의 내용이 일신될 수 있다. 신앙세계와 교회의 변화는 시계추 마냥 때 되어 교회 출석하는 다수 교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마음과 정성다해 주님의 꿈을 꾸고 맡겨진 주님의 일에 혼신 다하는 소수의 성도들에 의해서 발생한다. 그 소수의 무리들이 상처받은 교회를 회복시키며 무기력해진 영성공동체를 활성화시킨다. 많은 사람들 아니어도 소수의 사람만이라도 제 구실하고 제 기능 다하면 그곳에 생명의 역사가 다시 일어난다. 회복의 꽃이 다시 피어난다.
<은혜로 변화됩니다> 6월 16일 2024년 ‘우리는 하나님은혜로 구원얻는다’ 는것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인 동시에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이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죄인이라는 딱지를 떼어내고 거룩하다는 뜻의 성도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헌데 구원받았다고 해서 우리의 생활이 즉시 성도의 생활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구원받음은 일생에 단 한번 일어나는 유일회적 변화이지만, 성숙한 성도로 살아가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지속적인 과정이기 때문이다. 구원받았다고 죄에서 완벽하게 떠난 것은 아니다., 죄로부터의 온전한 떠남은 죄를 범하는 일에서 떠나는 연습을 지속적으로 행함으로서 가능해진다. 즉 우리가 죄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날마다 경건에 이르는 훈련을 해야 한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성도로 살아가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주의 은혜로 성도가 된 자들은 이제 죄의 길에서 떠나 의의 길로 돌아서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 로마서 6장 1절과 2절에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했다. 죄는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것을 방해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죄와 함께 있을 수 없다.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은 "성도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일컬음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이 선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맞다. 물과 기름이 섞일 수 없는 것처럼, 성도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기 원한다면 죄 가운데 머물러서는 안된다. 우리가 거듭났을 때,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로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죄로부터 자유해지려면 부단한 경건훈련이 필요하고 무엇보다도 주님 은혜가 절대적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성도다운 성도로 변화시켜 가고 있다. 우리 모두 이 사실을 기억하며 은혜 안에 머물면서 죄에 대하여 죽은 자답게 살아가시길 기원한다.
< 은혜를 힘입어> 6월 9일 2024년 한 사람이 돌이켜 천국 아버지 앞으로 돌아오는 것보다 더 귀하고 기쁜 일은 없다.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지만 허물과 죄로 죽었던 영혼이 주님께 돌아왔을 때, 잃었던 자식을 되찾은 부모의 심정과 같은 이 기쁨을 어디에 비교할 수 있을까? 눅 15장 탕자의 비유에서처럼 아버지의 집을 떠났던 작은 아들이 과거를 청산하고 아버지께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의 집에는 이미 그를 위해 "제일 좋은 옷"과 "손 가락지"와 그 발에 맞는 "신"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온 것을 기뻐하며, 큰 잔치를 베풀었다. 탕자의 아버지는 언젠가 아들이 돌아올 것을 기대했다. 그래서 그 좋은 것들을 미리 준비해 둔 것이다. 헌데 세상 윤리적으로 따지자면 이 아들은 아버지의 제일 좋은 옷과 손가락지와 신을 신을 자격이 없다. 아들은 아버지의 환영을 받을 자격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위해 좋은 것들을 예비해 두었다가, 그가 돌아왔을 때, 아들에게 모두 주었다. 이것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베푼 무조건적인 사랑이고, 은혜이다. 헌데 만일 아들이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면, 아버지가 마련한 좋은 것들은 결코 아들의 것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해 두셨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다만 예수의 십자가 공로로 죄에서 돌이키는 회개와 믿음만을 요구하신다. 우리는 어떤 노력으로도 하늘에 약속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고 예수를 구주로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받게 되는데 이는 전적으로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은혜로운 계획이고 선물이다. 디도서 3장 5절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사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했다.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날마다 감사하며 살아가는 우리모두 이길 기원한다.
<아름다운 생> 6월 2일 2024년 가장 소중한 사람이 있다는 건 "행복" 입니다. 나의 빈자리가 당신으로 채워지고 기도하는 것은 "풍요함" 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즐거움" 입니다. 라일락의 향기와 같은 당신의 향을 찾는 것은 "그리움" 입니다. 마음 속에 깊이 당신을 그리는 것은 "간절함" 입니다. 바라볼수록 당신이 더 생각나는 것은 "설레임" 입니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보다 말하지 않아 더 빛나는 것이 "믿음" 입니다. 아무런 말하지 않아도 당신과 함께 있고 싶은 것이 "편안함" 입니다. 자신 보다 당신을 더 이해하고 싶은 것이 "배려" 입니다. 차가운 겨울이 와도 춥지 않은 것은 당신의 "따뜻함" 입니다. 카나리아 같은 목소리로 당신 이름을 부르고 싶은 것은 "보고 싶은 마음" 입니다. 타인이 아닌 내가 당신 곁에 자리하고 싶은 것은 "바램" 입니다. 파아란 하늘과 구름처럼 당신과 하나가 되고 싶음은 "존중" 입니다. 그리고 하얀 종이 위에 쓰고 싶은 말은 "사랑" 입니다.
목회칼럼 2024년 5월
<권리 포기의 삶> 5월 26일 2024년 종교의 자유를 찾아 1620년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온 102명의 청교들은 보스턴 남쪽에 상륙해 삶의 터전을 형성했는데 그곳이 뉴잉글랜드의 기원이었다. 당시 뉴잉글랜드는 모든 삶의 분야에 있어 철저한 청교도 원리를 적용하였다. 그들이 거주하는 청교도 마을에 한 처녀가 임신을 했다. 동네 어른들은 처녀를 불러다 그 아기의 아빠가 누구인지 추궁을 했다. 임신한 처녀가 입을 열었다. “아기의 아빠는 늘 검은 옷을 입고 마을의 궂은 일을 도와주는 수도사입니다.” 처녀가 지목한 수도사는 마을에 어렵고 궂은 일이 발생할 때마다 찾아와 도와주는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파렴치한 죄인이라니.. 그 수도사는 곧바로 체포되었다. 잡혀온 수도사가 입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마을 사람들은 그런 그를 가차없이 발로 차고 때린 뒤 추운 겨울 감옥에 가두었다. 수도사는 결국 감옥에서 죽었다. 죗 값으로 죽은 것이다. 그래도 인정많은 일단의 사람들이 그의 장례를 치뤄 주었다. 그러다가 그 수도사가 여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신이 범죄치 않았음에도 수도사는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는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다. 그 처녀를 살리기 위해 죄를 대신 뒤집어썼다. 이것이 바로 권리 포기의 모습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한 존귀와 영광을 누리지 않고 사람으로, 그것도 종의 형체로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이는 하나님의 권리포기 사건이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영광의 보좌를 스스로 포기하신 이야기이다. 믿음이란 자신의 권리를 부인하고 주님을 신뢰하고 따르는 것이다. 성도의 삶은 가정, 교회, 그리고 사회에서 권리 포기의 삶을 사는 것이다. 권리 포기의 삶이 주님을 닮은 삶이다. 헌데 은혜가 되는 것은 우리들이 권리 포기의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더욱 가치있고 아름다운 것으로 우리를 높여 주시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 5월 19일 2024년 교회라는 말이 복음서에서는 마태복음 16장에서 처음으로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함께 나타난다. 그 고백의 장소는 가이사랴 빌립보이다. 갈릴리에서 북쪽으로 45분정도 차로 올라가면 헐몬산 기슭의 바니아스 라는 곳에 이른다. 헐몬산 자락에서 나오는 물은 시내를 이뤄 갈릴리 호수로 흘러 들어간다. 거기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가이사랴 빌립보에 이르게 된다. 본래 그곳 주민들은 풍요와 다산의 신인 바알신을, 헬라계 거주민들은 산림과 야수의 신인 판신을 섬겼다. 당시 헤롯왕은 로마 정권에 아부하기 위해 이곳에 황제 숭배신당을 세웠다. 이는 이곳이 당시 우상의 땅이었음을 시사한다. 왜 예수님은 제자들을 우상의 땅인 이곳까지 오게 했을까? 3년간의 제자훈련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에서 주님은 제자들을 이런 의미있는 장소로 데리고 오셔서 졸업 종합고사를 치루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그때 출제하신 문제 중 하나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것이었다. 이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복이 있다”는 칭찬과 더불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알게 하신 것”이라 말씀하셨다. 그리고 주님은 이 신앙고백 위에 자신의 교회를 세울 것임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던 것이다.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는 바알신과 판신, 그리고 로마황제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존귀한 주님의 영적공동체이다. 교회는 악의 세력을 정복하고 승리하신 주님의 승리를 경축하는 공동체요, 천국을 열고 닫는 열쇠꾸러미가 맡겨진 공동체인 것이다. 또한 주님의 교회는 음부의 권세를 이기고 묶여있는 영혼들을 풀어내어 자유케 하는 교회, 즉 주님의 사역을 재현하는 교회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이끌고 오셔서 시험을 치르신 장소, 그리고 장차 세우시고자 하시는 교회에 대한 설계도를 발표하신 장소가 바로 가이샤라 빌립보 였다. 오늘의 교회는 종종 그 자리로 나아가야 하며, 주님께서 발표하신 교회에 대한 그 음성을 다시 들어야 한다. 그리고 설계도를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들 교회가 바로 그 주님의 교회인지를 말이다.
< 가장 아름다운 이들 > 5월 12일 2024년 아름다움을 논할때 언급되는 것은 단연 꽃이다. 인간 눈에 낯익고 이름있는 꽃들은 물론 낯설고 이름없는 꽃들도 아름답다. 그들이 아름다운 것은 각각에게 주어진 계절, 공간 안에서 저만의 고유한 자태, 모양, 색깔, 향기, 패션, 풍경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꽃들이 아름답기에 나비가 날아들고 새들이 모여든다. 그들의 아름다움을 보려고 사람도 찾아온다. 사람들은 꽃들의 아름다움을 시로 짓고 노래로 흥얼거린다. 그림으로 그리고 글로 표현한다. 헌데 꽃이 이토록 아름다워도 더 아름다운 존재가 있다. ‘꽃보다 사람이 아름다워’ 라는 한 노래 가사말 처럼 사람이 더욱 아름답다. 위대한 설계사 주님이 지으셨고 게다가 그분의 형상이 부어졌기 때문이다. 죄성으로 주님형상이 많이 파손되었지만 그럼에도 사람은 여전히 아름답다.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이들은 부모님들이다. 그분들의 탄력잃은 피부가 아름답다. 주름진 얼굴이 아름답다. 굵어진 손마디가 아름답다. 쉬워진 목소리가 아름답다. 초점을 잃어가는 눈이 아름답다. 그분들의 온 삶이 아름답다. 그분들의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풍경이다. 자녀들을 위한 온갖 사랑의 사연들이 쌓인 맑은 샘이다. 희생의 향기가 풀풀 나는 초록 산이다. 부모님들은 살아계실제, 아니 그 이후에도 눈물솟도록 아름다운 마음의 풍경이다. 아름다운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떨린다. 영혼이 울리고 절절한 그리움이 생겨난다. 5월 꽃 향기 진하게 퍼지는 계절에 사람을 더욱 사랑하자. 존재 그대로 아름다우신 모든 부모님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전하며 크신 주님의 평강과 은혜를 구한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 5월 5일 2024년 -정용철- 나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습니다. 나는 우리 가족을 언제라도 만날수 있습니다. 이 하나가 나에게 얼마나 큰 기쁨인줄 이제야 알았습니다. 나에게는 가장 사랑하는 가족이 있습니다. 나는 우리 가족과 언제라도 전화를 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가 얼마나 큰 즐거움인 줄 이제야 알았습니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습니다. 내가 우리 가족 중 한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면 곧 답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하나가 나에게 얼마나 큰 위로인 줄 이제야 알았습니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습니다. 나는 우리 가족에게 언제라도 선물을 보낼 수 있습니다. 이 하나만으로도 내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 줄 이제야 알았습니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습니다. 나는 우리 가족과 언제라도 같이 식사를 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만으로도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 줄 이제야 알았습니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습니다. 나는 우리 가족에게 나의 아픔을 낱낱이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만으로도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 줄 이제야 알았습니다.
목회칼럼 2024년 4월
<하나님의 씨> 4월 28일 2024년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이유로초대교회 성도들은 원치 않는 고난을 받았다.믿음과 인격이 유린당하고육체, 사회, 경제적으로 제재당하고삶이 처절하게 매장당했다.대적자들은 성도들을 이렇게 매장하면예수의 복음이 곧 근절되리라 여겼다.헌데 그들이 참으로 모르는 것이 있었다.자신들이 매장한 성도들이바로 하나님의 씨앗이었다는 것을..깊이 매장당한 곳에서 그 씨는 발아하고싹을 내고잎사귀를 돋우며 꽃을 피워냈다.그리고 누구도 측량치 못할 풍성한 열매들을 맺었다.기독자 됨의 표증은 단지 종교적인 의식참여, 교리연구,입술의 고백, 열정적인 사역활동 등이 아니다.그리스도인 된다는 것은 영혼 깊은 곳에주님의 씨가 심겨져 뿌리내리고그것이 삶의 자리에서 복음에 합당한 열매,즉 의와 진리의 거룩함의 열매,사랑의 열매를 맺어가는 것이다.바람직하고 평안한 환경에서는 물론이거니와불합리하고 척박하게 보이는 환경에서도 말이다.“하나님에게서 나서 생명에 들어간 사람들은..하나님의 씨가 그들 깊은 곳에 자리합니다”(요일3:9)
<마귀의 계략> 4월 21일 2024년 귀신들이 모여서 인류를 파멸시킬 방법들을 의논하고 있었다. 한 귀신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없다고 말해 주자” 라고 했다. 다른 귀신은 “사람들에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말해 주자” 했고 또 다른 귀신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말해 주자” 라고 말하는둥 여러가지 방법들이 동원되었다. 헌데 이 의견들중 어느 것도 모든 귀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 한 귀신이 새로운 의견을 냈다. “우리 모두 세상에 가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하자. 또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원자라고 말해 주자. 그리고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자라고 말해 주자. 그러나 구원받을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말해 주자”. 이 의견을 듣고 난후 모든 귀신들이 이구동성으로 옳거니 하면서 이 주장을 채택했다. 오래 전 동부 뉴욕을 떠나 서부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항해하던 증기선 센트럴 아메리카 호에 물이 새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다행히 근처를 지나던 배가 구조 신호를 받고 달려왔다. 그런데 센트럴 아메리카 호의 선장은 구조선 선장에게 물이 새고 있지만 내일 아침까지는 괜찮을 것 같으니 날이 샐 때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간청을 했다. 밤중에 승객들을 구조선으로 옮겨 실을 때의 혼잡을 염두에 둔 결정이었다. 이에 구조선 선장은 한시가 급하니 승객을 빨리 옮겨 태워야 한다고 재차 요구했으나 아메리카 호 선장은 “날이 밝을 때까지 좀더 기다려 보겠습니다”라는 말만 되풀이 하였다. 그러다 결국 센트럴 아메리카 호는 내일을 보지 못했다. 한 시간 후에 갑자기 불빛이 사라짐과 동시에 물속으로 침몰하여 승객 모두는 배와 함께 수장되고 말았다. 구조받기를 뒤로 미룬 비극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뒤로 미루는 습관이 있다. 지금 할 일을 이후로 미룬다. 시간과 기회가 늘 있는줄 착각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확실한 미래, 절대적인 내일은 없다. 지금이 자신의 시간이다. 뒤로 미루는 것은 마귀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는 것이다. 마귀는 우리를 넘어뜨리고 파멸시키는 자이다. 그 놈은 우리로 마땅히 할 일을 여러 이유들을 내세워 미루게 하여 종내는 우리를 무너뜨린다. 오늘 할 일은 오늘 반드시 해야 한다. 오늘 주님 만나고 오늘 말씀대로 살고 오늘 주님께 영광 돌리야겠다. 오늘이 바로 기회이다. 오늘 충성하는 자에게 주님은 내일을 보장해 주신다.
<자비에 대해서> 4월 14일 2024년 자비는 하나님의 마음의 성품으로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따라 유순하고 온유하여 타인을 넓게 이해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구체적으로 자비는 (1)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일컫는다. 하나님에게는 절대적인 성품과 도덕적인 성품이 있다. 절대적인 성품은 하나님께서 영이시라는 것과 완전무결, 절대불변, 영원하시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하나님의 도덕적인 성품은 하나님께서 사랑이시고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시고 공의로우시고 의로우시고 좋으신 분이란 사실을 말한다. 하나님은 인자하심이 풍성하신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의 증거인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 구원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게 된다. (2) 자비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택하신 거룩한 자에게 자비로 옷을 입으라고 말씀하신다(골 3:12).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자비를 본받지 아니하면 벌을 받는다고 기록한다.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롬 11:22). 여기서 ‘인자’는 신약성경 원어인 헬라어 ‘크레스토테스’ 곧, 자비를 뜻한다. 주의 일꾼은 자비로 무장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선한 사람이다. (3) 자비는 성령의 열매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는 자비는 참된 자비라고 말할 수 없다. 성령의 열매는 영원한 것이기에 일시적인 인간의 자선행위를 자비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 성령께서 주신 자비만이 참된 자비이다. 온전하신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에게 임할 때 인간의 자비는 참된 자비가 될 수 있다. 성령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드리고 의지할 때 하나님의 자비가 자신에게 임하게 된다. 자비는 말이나 이론이 아닌 실천행위이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비로 무장하여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마음과 손의 봉사> 4월 7일 2024년 우리들이 일상생활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들중 하나는 `Service'라는 말이 아닌가 싶다. 이 단어는 한국 말로 ‘봉사' 또는 `섬김'이라는 뜻이 있고 또한 교회적으로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뜻도 품고 있다. 이 단어는 여러 의미로 사용되는 참으로 좋은 말이다. 그런데 아무리 좋고 우아한 말이라도 다른 단어와 함께 시용된다면 원래의 의미가 크게 퇴색될뿐 아니라 더 나아가 완전히 이상한 말이 되어버리고 만다. 가령 ‘service’ 앞에 ‘lip'이라는 말을 붙여서 `lip-service’(립 서비스) 라는 말을 만든다면 그 의미는 ‘말 뿐인 호의’ 또는 ‘공치사’라는 뜻이 되고, 이를 신앙적으로 풀이하면 ‘말 뿐인 신앙'이 되고 만다. 또한 ‘service’ 앞에 ‘eye’라는 말을 합성하여 ‘eye-service’(아이 서비스) 라는 말을 만든다면 이는 ’남들이 볼 때만 일하는 체하는 것’이란 뜻이 된다. 이 말을 믿음에 비유하면 ‘성경을 보기만 하고 실천이 없는 믿음’을 뜻한다. 그리고 ‘service’라는 언어에 귀 라는 ‘ear'를 붙여서 ‘ear-service’(이어 서비스)라는 말을 만든다면 그 의미는 ‘윗사람이나 권세자의 명령을 그저 들어 준다는 것’이라는 뜻이 된다. 이를 신앙적으로 풀이하면 ‘신자가 설교자의 설교를 결단없이 그저 들어 주는 것’이다. 믿음생활의 주된 과정은 설교를 단지 들어 주는게 아니라 그 말씀대로 실천하고 그 교훈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의미있고 가치있는 말씀을 듣고 느끼기는 해도 그것을 삶에서 적용하고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완전한 신앙생활이 아니다. 아니, 참 믿음과는 무관한 삶을 사는 것이다. 요한 웨슬리 목사가 이런 말을 했다. "천국에는 목사의 입과 신자들의 귀만 와 있더라" 라고..이 말은 목사가 립 서비스'에 치우쳤다는 뜻이며, 신자들은 `이어 서비스'에 치우쳤다는 뜻이다. 참으로 우리들을 각성시키는 말이다. 영적 지도자들이 ‘립 서비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교인들이 ‘이어 서비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개인 지체들과 영성 공동체의 앞날은 어찌 되겠는가? 우리들은 주님과 교회, 주변 세상을 위한 봉사와 섬김(Service) 에 치중하되 말과 눈과 귀의 봉사자 차원을 넘어 ‘마음과 손의 봉사자’(heart-hand-service)가 되어야겠다.
목회칼럼 2024년 3월
<부활절 후의 기도> 3월 31일 2024년 예수 부활생명이 하늘과 땅, 산과 바다, 자연과 봄꽃들, 그리고 영혼에 깊이 스며든 날, 마음의 옷깃을 여미며 이리 기도드린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에 대해 단호하게 고쳐 앉고 돌아 서게 하소서. 스스로는 무용 무능 무지함을 깨닫고 납작 엎드리고 겸손하게 하소서. 범사에 주님을 인정하고 그분 손길을 더욱 의지하게 하소서. 주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성령의 도움을 받아 믿음으로 헌신하게 하소서. 주님이 맡기신 사람들을 친절과 온유, 정직과 성실로 대하며 주님사랑을 나타내게 하소서. 조국과 교회, 세계평화와 복음전도를 위해 기도를 쉬지 말게 하소서. 일상이 신비로운 은혜이며 축복임을 알고 매일매일을 감사와 기쁨으로 지내게 하소서. 이후의 날들 주님을 앙망하며 소망과 기대, 설렘으로 지내게 하소서. 이 기도들이 꽃처럼 아름답게 열매맺게 하소서.
<당신이 왕이라면> 3월 24일 2024년 - 이해인 - "구해야 할 자들이 하도 많아 혼자서 처절히 피 흘려 죽은 당신이 진정 왕이십니까. 온통 귀먹고 병든 세상에산천이 울리도록 큰 대답 주십시오 당신이 왕이라면, 살아온 당신을 향해 또다시 밤마다 칼을 가는 자들이 유다와 함께 횃불 들고 달려오는데 당신을 모르노라 고개 흔드는 베드로와 나도 시시로 악수를 나누는데 그래도 당신이 왕이십니까. 빛보다 어둠 짙은 세상에 안겨 바보처럼 숨어서 울지도 못하는 약자의 설움을 가엾이 여겨주십시오.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 당신의 집은 보이지 않습니다. 날마다 조금씩 내가 죽지를 못해 내 안에 그대로 죽어 계신 분이여 어떻게 당신을 살려내야 합니까. 제발 큰 소리로 대답해 주십시오 당신이 왕이라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3월 17일 2024년 사순절의 후반부에 접어든 지금, 우리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욱 깊이 묵상하며 자기 십자가 질 것을 다시금 결단해야 한다. 우리는 십자가를 단지 믿음의 상징내지 기독교의 표현으로만 바라보거나 자신들 머릿 속에 지식으로만 남겨두어서는 안된다. 십자가의 정신과 그 실체가 우리의 일상 삶이 되고 믿음이 되어야 한다. 십자가는 다른 사람에게 필요하다고 여기어 그에게 그것을 짊어지도록 알려주거나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도 자신이 먼저 기꺼운 마음으로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자기 십자가는 오롯이 자신만의 몫이다. 자기 십자가는 주님을 위해 자신이 희생하고 헌신하는 사랑의 실천을 뜻한다. 십자가 앞에서는 어떤 핑계나 구실, 책임전가가 통하지 않는다. 주님 영광이 드러나고 자신의 영혼이 구원얻기 위해 스스로가 짊어져야 하는 것이 십자가이다. 예수님은 아무 잘못도 없이 기꺼이 십자가 위에 달리셨지만, 그 누구를 원망하거나 정죄하지 않으셨다. 그렇다면 죄인인 우리들은 죄 값으로 십자가에 달려도 아무 할 말이 없는 사람들이다. 헌데 우리들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데 불평이 참 많다. 우리들은 조금만 억울한 소리를 들어도, 아주 작은 손해를 입게 되어도 그에 대해 원망하고 못견뎌 하곤 한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진다 하면서도 크고 작은 일에 불평하고 불편해 하는 사람과 동행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히, 묵묵히, 잠잠히 자기 십자가를 지고자 하는 자들에게 가까이 다가 오셔서 십자가 길을 인도해 주시고 도와 주신다. 그리고 십자가 지기에 필요한 능력과 지혜를 주신다. 우리가 낮아지고 또 낮아진 마음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때 하나님은 우리를 끌어올려서 영화롭고 아름답고 행복한 자리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 주님을 만나서 영화롭게 되는 날까지 십자가의 길을 지치지 않고 걸어가는 우리 모두이길 기원한다. <인생의 사계절> 3월 10일 2024년 자연과 사계절은 서로 대립구도를 이루지 않습니다. 서로를 억누르거나 이기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정겹고 아름답게 공존합니다. 자연은 때에 따라 계절들의 옷을 덧입으며 그들의 향취를 빛냅니다. 자연은 한 계절을 보낼 때마다 그리움을 품고 해후를 기다립니다. 자연과 계절사이에는 이런 조화로움, 교감, 친밀감이 있습니다. 인생에도 사계절이 있습니다. 인생의 계절들은 평생 한번씩만 경험합니다. 인생과 각 계절들도 서로 각을 이루거나 배척하는게 아니라 친구되어 깊은 교류를 누리다가 영혼의 기억 속에 안치됩니다. 우리는 봄날에 생의 청사진을 설계하고 꿈을 꾸며 씨를 뿌립니다. 여름날에 노력하고 정진하며 최선다합니다. 가을날에 감사함으로 수고의 열매를 먹습니다. 겨울날에 모든 것을 비우고 내려놓고 하늘나라를 기다립니다. 자연과 계절은 은총이며 축복입니다. 인생도 축복입니다. 유년기, 청소년기, 장년기, 노년기등 매순간들이 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토록 다함없는 주의 은혜를 누리고 살아갑니다. <아름다움의 실체> 3월 3일 2024년 언젠가 집사람과 함께 동네 야산을 거닐던중 이름모를 예쁜 들꽃을 발견하고 꺾어 와서 꽃 병에 담았다. 한동안 좋은 볼거리이며 집안이 좀 환할것 같았다. 헌데 꽃 병에 들어간 그 꽃은 산에 있을 때만큼 예쁘지 않았다. 이유를 알았다. 배경들을 두고 꽃만 가져왔기 때문이다. 꽃이 예쁜 것은 꽃자체의 아름다움에 산에 있는 흙, 돌과 바위, 주변 나무와 풀들, 햇빛, 이슬, 바람, 안개, 새, 다람쥐, 작은 짐승들이 더해져서이다. 참 아름다움은 홀로 생성되지 않는다. 배경과 함께 할때라야 비로소 아름다와진다. 별들이 밝고 아름다운 것은 칠흑같이 어두운 하늘이라는 배경과 더불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만 아는 사람, 홀로인 사람은 아름다움이 반감된다. 지혜 지식 외모 힘 재능 기술이 남보다 뛰어나도 주변과 더불어 하지 않는다면 배경이 없는 들꽃과 같고 하늘없는 별과 같다. 사람은 주님과 함께 하고 가족 동료 자연과 진솔하게 어울릴때 우아하고 활력있는 인생을 살게 된다. 그리고 믿음과 소망, 사랑을 품고 살아갈 때 거룩하고 성결하고 격조있는 삶이 된다.
목회칼럼 2024년 2월
<회개의 단계> 2월 25일 2024년 신앙여정에서 가장 많이 듣고 실행해야할 요소중 하나는 회개이다. 신앙인들은 믿기 이전에도 회개해야 하고 믿은 후에도 회개해야 한다. 끊임없이 발생하는 죄로 인해서이다. 회개는 예수님의 공생애 첫 설교주제 였다. 예수님은 천국복음과 회개를 전하셨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던 세례 요한도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 1907년에 한국 평양에서 성령 대부흥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중심에는 온 교회와 성도들의 회개가 있었다. 회개에는 여러단계들이 있다. (1)회개의 첫 단계는 인간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서는 것이다.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설 때라야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게되고 해서 통회 자복하고 예수님을 삶의 구주로 믿게 된다. 주님 중심으로 삶의 방향을 전환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받아 주시고 구원해 주시고 당신 자녀로 삼아 주신다. (2)회개의 둘째 단계는 세속적 삶으로부터 성결, 거룩해 지는 것이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다고 해서 말과 행위들이 즉시 성결해지고 우아해지는 것는 아니다. 성결에 도달함은 평생에 걸친 과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지은 죄가 생각 날 때마다 즉시 그 죄를 자백하고 용서받아 성결함을 이루어가야 한다. (3)회개의 셋째 단계는 마음의 생각의 변화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우리는 육신의 생각을 사로잡아 영의 생각으로 새롭게 해야 한다. 또한 영의 생각으로 새로와지려면 성결의 영이신 성령과 늘 교통해야 한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기 위해 우리 곁에 와 계신다. 성령과 동행함으로 생각의 변화를 받아 새 피조물로 살아가길 바란다. 크고 작은 죄들을 회개함으로 주 안에서 항상 새로운 존재이길 기원한다.
<사순절 묵상구절들> 2월 18일 2024년 ➊ 요엘 2장 12~13절: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➋ 마태복음 4장 1~5절: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➌ 이사야 58장 6~7절: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난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➍ 창세기 3장 19절: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➎ 이사야 43장 25절: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➏ 고린도후서 6장 2절: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➐ 에스겔 18장 21절: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➑ 요한일서 1장 1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➒ 고린도전서 10장 23절: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사순절> 2월 11일 2024년 기독교 절기 중에는 사순절이 있다. 사순절은 날짜 선정에 있어서 부활절과 관련이있다. 부활절은 유월절 계산법을 따르는데, 춘분(春分) 다음에 오는 첫 음력 15일(보름)이 지난 첫 주일이 부활절이다. 첫 음력 보름이 주일이면, 그 다음 주일이 부활절이 된다. 그 부활절로부터 주일을 제외하고, 40일을 거슬러 올라가면 수요일인데 그날이 사순절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다. 올해 재의 수요일은 이번 2월 14일이다.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에 시작하여 부활절 바로 전 주간인 고난주간의 끝날인 토요일에 마치게 된다. 사순절 기간 안에는 주일이 여섯번 있는데 이 주일들은 “사순절에 속한 주일(Sunday of Lent)”이 아니라 “사순절 기간에 있는 주일(Sundays in Lent)”이다. 사순절 기간의 주일들은 사순절의 엄숙함이 조금은 완화된채 부활의 소망을 품은 “작은 부활절”처럼 지켜진다. 사순절(Lent)은 “길이(length)”를 의미하는 앵글로색슨어 “lencten”에서 유래한 말로, 봄의 기간을 나타낸다. 사십 일은 성경에 나타난대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와 시험과 유혹을 이겨내고, 하나님께서 맡겨신 공생애 사역을 준비하신 기간이다. 사순절은 다가올 부활절을 대비하여, 죄와 허물을 회개하고, 금식하며, 성령 안에서 준비하는 시간이다. 또 자신의 신앙을 검토하고 헤아리는 시간이기도 하다. 원래 초대교회의 사순절은 새 신자의 세례를 위해 금식하고 준비하는 기간의 출발점 이었는데 지금은 점차 모든 그리스도인이 참회하는 기간으로 확대되었다. 우리들은 이 사순절기에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더욱 집중하고, 세속적인 일을 삼가하고 절제하고, 이웃들을 섬기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영성훈련에 최선다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처한 상황에도> 2월 4일 2024년 물고기는 물과 다투지 않습니다. 물이 조금 차가우면 차가운 대로, 물이 조금 따뜻하면 따뜻한 대로, 물살이 조금 빠르면 빠른 대로 물과 같이 어울려 살아갑니다. 물고기는 자신이 물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고맙기 때문입니다. 산에 있는 나무는 산과 다투지 않습니다. 자신의 자리가 좁으면 좁은 대로, 자신의 주위가 시끄러우면 시끄러운 대로, 큰 나무들이 있으면 있는 대로, 햇볕이 덜 들면 덜 드는 대로 처지에 맞추며 살아갑니다. 나무는 자신이 산에서 어울려 사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고맙기 때문입니다. 햇님은 구름과 다투지 않습니다. 구름이 자신의 얼굴을 가리면서 잘난 척을 해도 조용히 참고 기다렸다가 찡그렸던 하늘을 더 파랗고 맑게 해줍니다. 구름이 비를 몰고 와서 모두를 적셔 버려도 바람과 함께 불평하지 않고 말려 줍니다. 햇님은 자신의 할 일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고맙기 때문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자신과 환경을 불평하거나 다투지 않습니다. 처해 있는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힘 다해 현재에 충실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목회칼럼 2024년 1월
<주여 제 믿음을 지켜 주소서> 1월 28일 2024년-언더우드 선교사 오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를 옮겨 앉히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서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 한 이곳,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사람뿐 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찌하나 걱정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니…”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洋鬼子)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만이 가득한 곳지만 이 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지켜주소서. <행복자> 1월 21일 2024년 분주하고 바쁘게 사는 사람들은 열심히 일해 좀 더 크고 좋은 집, 고가 자동차, 명품등을 소유하고 업적, 성취를 쌓으면 삶이 행복해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바라고 원하는 것을 얻고 성취했을 때 생의 목표를 달성 했다고 기뻐합니다. 헌데 그기쁨과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쁨의 지수가 현저히 줄어들게 됩니다. 그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외부 환경을 통해서 또는 어떤 조건을 충족시킴으로 얻어지는 것을 이름한다면 그것은 일시적 기분좋음입니다. 정오에 기분 좋았다가 저녁 쯤에 사라지는 변덕스러운 감정같은.. 나는 목회하면서 그런 변덕스러운 감정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어쩌다 사역에 조금 열매가 나타나면 기분이 좋았고 노력해도 사역에 열매가 미미할 때는 그 기분이 이내 사라지곤 했습니다. 참 행복은 한시적이 아닙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마르지 않습니다. 행복은 요건, 상황, 감정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행복과 기쁨은 스스로의 행위, 공로에서 기인하지 않습니다. 행복은 주님에게서 연유합니다. 주님이 모든 복의 근원입니다. 주님이 각양 좋은 선물과 은사의 생산자이십니다. 주님은 당신에게서 연유한 복을 인간세상에 하염없이 내려주십니다. 삶의 여건및 외부 상황에 관계없이 행복하려면 주님을 모시고 믿음 안에서 그분의 자녀,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보내 들이기에 앞서서 행한 고별설교에서 이스라엘을 ‘행복자’라 칭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주님의 백성’이어서 입니다. 우리도 복의 근원이신 주님과 함께 하면 언제 어디서든 행복합니다. 인생의 좁은 길을 걸어도 행복하고, 심지어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행복합니다. 열악하고 못된 환경, 상황이 잡아 흔들어도 우리는 행복자 자리에 서 있습니다. 우리들은 지난 날들을 주님과 동행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후에도 매일 주님과 함께 길을 걸으며 그분으로부터 근원한 행복을 마음껏 향유해야겠습니다. 이 주간도 주님이 허락하신 행복에 감사드리며 주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폴 포츠의 꿈>1월 14일 2024년 어떤 일이든 대충대충 이루어지거나 순식간에 쉽게 달성되는 법은 별로 없다. 크고 위대한 일일수록 많은 시간이 걸리고 열정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간혹 요행수로 예상치 못한 업적을 짧은 시간내에 쌓기도 하지만 이는 생애동안 극소수에 해당된다. 제품 수명 주기를 보더라도 주기가 S자 곡선으로 되어 있어 초기엔 더디게 성장하거나 거의 정체상태에 있다가 어느 시점을 지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이런 발전의 배후에는 물론 노력과 수고가 있다. 크고 작은 세상 일 모두가 마찬가지이다. 성장엔 일정한 시간이 걸리고 그만큼의 애씀과 수고도 있어야 한다. 10 여년 전 한 유명한 사건이 영국에서 일어났다. 평범한 사람들이 출연하는 영국 TV 노래경연 대회 ''브리튼즈 갓 탤런트‘ 에 당시 36세의 휴대폰 세일즈맨인 폴포츠가 출연해 큰 화제가 된 사건이었다. 그는 허름한 정장에 불룩하게 튀어나온 배, 부러진 앞니, 그다지 잘생기지 못한 얼굴에 자신감 마저 없어 보이는 표정을 지닌 사내였다. 그런 그가 오페라를 부르겠다고 경연대회 무대에 모습을 나타났을 때 관중들은 좀 김새하면서 그의 노래를 진지하게 들으려 하지 않았다. 관객들은 그가 어떤 노래를 부르던 큰 관심을 쏟지 않았다. 심지어는 심사위원들 조차 폴 포츠에게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노래를 시작하자 장내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노래가 진행되면서 모두의 입에서 탄성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배와 목에서 엄청난 오페라가 흘러나온 것이다. 사람들은 큰 감동을 받앗고 무명인이었던 폴 포츠는 그 시점부터 많은 이들이 알아보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물론 세상에는 폴 포츠보다 노래를 잘하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 헌데 사람들은 왜 그에게 김격해하며 열광했을까? 그것은 못생긴 외모로 인한 왕따, 교통사고, 종양 수술, 오페라 회사들의 문전 박대 등 수많은 좌절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았던 자신의 ‘꿈’에 대한 열정과 노력 때문이었다. 준비하는 자에겐 꿈은 미래이지만, 준비하지 않는 자에겐 꿈은 몽상일 뿐이다. 하지만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오더라도 비상할 날개가 없다면 하늘을 날 수가 없다. 언젠가 이룰 꿈을 위해 항상 준비하고 노력하는 자세야말로 꿈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비결이다. 우리들도 나이 탓, 환경 탓, 소유 탓 하지 말고 꿈을 이루기 위해 일어나 움직이며 무엇인가를 실행해야겠다.
<새 날 기쁨> 1월 7일 2024년 새 날 여명의 빛이 가슴에 와 닿으면 나는 거울 앞에 선 누이를 본듯 잔잔한 희열에 젖어든다. 또 하나의 새 날이 기뻐 오는 것은 이 날, 시간과 공간 안에서 체험할 수 있는 평범한 은총들로 인해서이다. 살짝 열린 블라인드 사이로 방 안에 침투한 투명한 햇살을 쬐일 수 있고, 창문에 부딪혀 되돌아가는 수 백개의 상쾌한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고, 잎사귀 모두 떨군채 추위에도 당당히 서 있는 나목을 볼수 있고, 높고 푸른 창공을 자유롭게 노니는 작은 새들의 귀여운 날개 짓을 감상할 수 있고, 진한 향 피어나는 커피와 어두운 색 초코렛을 음미할 수 있고, 반복되는 일상과 맡겨진 일에 새 정성 기울일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따스한 말과 환한 미소를 마음에 저장할 수 있고, 말씀 묵상과 기도의 경건연습 중에 영혼에 아름답게 금박이 된 주님 은혜와 평강을 더욱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새 날이 열릴 때 안개 스며듯이 촉촉히 찾아온 일상의 기쁨을 심장에 담고 감사하게 겸허하게 매일 하루를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