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호세동산교회
  • 교회안내
    • 목회일정표
  • 말씀과 예배
  • 교회소식
    • 사진첩
  • 목양실
    • 목회서신 >
      • 테스트 페이지

목회서신

목회 서신 
<정직의 가치> 2021.9.3.
 중국작가 데미가 쓴 소설중에 “꽃이 없는 빈 화분”이란 글이 있다. 오래전 중국에 핑이라는 꽃을 참 좋아하는 소년이 있었다. 당시 그가 사는 나라에자식이 없었던 왕은 자신의 후임을 찾고 있었다. 왕도 꽃을 무척 좋아했기에 생각끝에 모든 젊은이들에게 꽃씨를 주기로 했다. 그리고
가장 아름답게 꽃을 피워 1년 후 궁으로 가져오는 자를 후임 왕으로 삼겠다 공포했다. 다수의 젊은이들이 후계자가 되기 위해 꽃씨를 받아 열심히 가꾸고 꽃을 피웠다. 핑도 최선다해 물주고 가꾸었다. 헌데 다음해 봄이 와도 그의 꽃씨는 싹도 나지 않았다. 그는 매우 실망했다. 그의 부모들은 무엇이던 최선다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위로해 주었다. 핑은 약속된 날에 꽃이 없는 화분을 들고 왕께 나갔다. 그날 많은 젊은이들이 꽃이 만발한 화분을 들고 의기양양하게 왕 앞에 등장했다. 그들은 빈 화분을 갖고 온 핑을 비웃고 조롱했다. 왕은 아름답게 꽃 피어있는 화분들을 심사한 후 핑에게 다가왔다. 왕은 꽃이 없는 화분을 보고 핑에게 “네 용기와 정직에 감탄한다. 너야말로 다음 왕으로 나의 후계자이다” 선포했다. 왕은 참석한 젊은이들에게 “너희에게 주었던 꽃씨는 한번 요리했던 것으로 싺을 낼수 없는 것이다” 고 말했다.
 이 글은 정직한 삶속에는 반드시 귀중한 댓가가 기다리고 있고 아름다운 열매도 맺을 것이지만 거짓과 불의에는 반드시 불행과
좌절이 뒤따르게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정직은 바른 삶을 위해 절대 필요한 인생의 덕목이다. 정직은 성공과 행복에 이르는 요소들인 진실, 공의, 성실, 충성, 신뢰등과 궤적을 같이 한다. 아름답고 고상한 삶의 여정에는 정직이라는 품격이 게재되어 있다. 믿음과 공평, 의로움은 모두 정직에서 근거한다. 한 사람의 인생은 업적, 소유, 위치등을 통해서가 아니라 정직한 믿음과 신실한 삶을 통해서 평가되어진다. 이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추구하는 공공가치는 평화이다. 헌데 평화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정의, 인권, 나눔, 인애등을 위해 헌신하고 노력한다. 이 요소들의 뿌리에는 정직이 있다. 정직하지 않은 정의, 인권, 나눔등은 오히려 불의, 분열, 투쟁들을 양산할 뿐이다.
 하나님은 거짓을 말하시거나 실언하시지 않는 정직의 하나님이시다. 반면에 사단은 정직의 반대개념인 거짓의 아비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고백하는 아멘이란 용어는 ‘신실하다, 그렇다’라는 뜻으로 신뢰, 즉 정직을 의미한다. 기독자들은 하나님을 닮은 정직의 삶을 살아야 한다.
정직이 모든 삶의 기본적 덕목이 되고 과정이 되어야 한다. 언제 어디서나 거룩으로 양식을 삼으며 정직으로 옷을 입어야 한다. 우리들은 하나님과 그분 말씀 앞에서 늘 정직해야 한다.자신의 양심에도 부끄럼 없어야 하며 이웃들에게도 절대 정직함으로 주님닮은 자임을 증거해야 한다.
 성경은 정직한 자에게 돌아갈 열매들을 열거한다. 시 112:4에 “정직한 자들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이로다”했고 사 26:7에서는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시도다”했고 잠 2:7에서는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했고 잠 23:16에 “만일 네 입술이 정직을 말하면 내 속이 유쾌하리라” 했다.
 정직은 인격과 삶의 덕목들을 담는 그릇일뿐더러 신앙생활의 모든 요소들을 수용하는 최고 가치이기도 하다. 주여, 우리 안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목회 서신 
<파스칼의 고백> 2021.8.27.
 17세기 프랑스의 수학자, 과학자, 철학자였던 파스칼은 창조적 인생을 살았다. 그는  17세의 나이에 당시 프랑스학계를 뒤집어 놓은 수학의 혁신적 논리를 펴냈다. 이어  오늘날 전자계산기의 초창기 모델을 발명했고, 공기의 압축에 관한 탁월한 이론을 창출했다. 그는 이런 천재성으로 20세 전에 프랑스 학계에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런 까닭에 그는 하늘을 찌르는 교만과 물질주의및 이기주의, 성적인 방종과 쾌락에 젖어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31세 되던 해에 하나님을 만났다. 인간 최고봉에 올랐다고 자부했던 파스칼이 자신이 상상도 못했던 지식과 사랑과 능력을 지닌 존재인 하나님과 일대일로 부딪쳤던 순간이었다. 그때의 감격을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은총의 해 1654년, 11월 23일 월요일 밤 10시30분, 그 짧은 시간에 나는 하나님을 만났다. 철학자의 하나님, 지식인의 하나님도 아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만났다. 확신 또 확신,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기쁨과 평화! 예수 그리스도이신 창조주 하나님, 또한 나의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 외의 모든 것들은 이제 내 인생 뒷전으로 사라져 버렸다. 복음을 통해서 그분이 내게 다가오셨다. 세상은 그분을 모르지만 이제 나는 하나님을 안다. 나는 내 인생의 감독이 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완전히 항복한다. 나의 기쁨은 영원하다. 내가 당신의 말씀을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아멘. 아멘. 아멘.."  파스칼은 그후 8년 밖에 더 살지 못했지만 그 기간 동안 모든 학문활동을 접고, 기독교사 걸작품으로 꼽히는 명상집, 팡세를 저술했다. 그는 깊은 묵상의 결정체인 팡세 속에서 인생의 처음이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끝나고 있음을 고백했다. 현대수학과 과학의 일대 전환점을 가져온 파스칼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자기 인생의 새롭고도 진실한 지평을 보았다.
 하나님께서 만나 주신 이가 어디 파스칼 뿐이랴.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시며, 파스칼의 하나님이시며 또한 우리 모두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모두를 만나 주신다. 누구던지 그분을 만나면 신분, 위치, 업적, 성향, 실력에 상관없이 인생이 송두리채 바뀐다. 단지 표면적 변화만 일어나는게 아니라 심연의 변화, 내면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가치관과 세상관이 바뀌며 삶의 내용과 철학이 변하며 살아가는 방식도 변한다. 그리고 목표와 운명까지 바뀐다. 주님을 만나면 모두 새 사람, 새 영이 된다. 주님에 의해 다시 빚어지는 새 피조물이 된다.
 더 나아가 주님을 만난 이들은 주위 사람들에게 크고 신비로운 감화력, 영적 영향력을 끼친다. 예수님을 만난 12제자들은 배우지 못한 어부들이었다. 헌데 그들은 주님을 만나 변화받고 능력받아 세상을 뒤집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사회적 위치가 미천했고 또한 믿음의 이유로 핍박, 박해까지 받았지만 예수복음의 능력으로 세상을 요동치게 했다. 남성편력이 심히 문란했던 사마리아 수가 성의 한 여인은 물길러 나왔다가 예수님을 만난 후 인생이 획기적으로 바뀌었고 그 지역인들에게 주님을 전하는 전도부인이 되었다.
 현실세계를 살아감에 필요한 물질을 많이 벌고 고급진 문화를 향유하고 지식과 권력을 누리며 남들보다 더욱 안락하고 돋보이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사람들은 성공이라 말한다. 헌데 성공보다 더욱 가치있고 복된 삶은 주님을 만나고 구원받고 새로운 영적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믿음의 삶이다. 주님 없이는 땅의 삶만을 살지만 주님을 만나면 땅에서도 하늘의 삶을 살게 된다. 우리의 최고 기쁨과 행복은 지금 이 자리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목회 서신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 2021.8.20.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불신앙인인 자연인과 신앙인인 그리스도인이다. 또 그리스도인 중에도 두 부류가 있다.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과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이다. 전자는 미숙한 그리스도인이고 후자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다.  고전 1:30절은 영에 속한 사람의 실체를 보여준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을 향해 “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 이것이 영에 속한 사람의 자기 이해의 핵심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해 있다는 것이고 그의 뜻과 가치관을 따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생명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2 천년전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 위에서 죽었고 주님이 부활하실때 그분과 함께 살아난 자이다. 그리스도가 영에 속한 분이듯이 그와 연합한 그리스도인도 영에 속한 사람이다. 우리 기독자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보배이듯이 그분 안에 있는 우리도 보배들이다. 우리들은 깨지기 쉬운 천한 질그릇으로서가 아니라 보배의 정체성으로 산다. 질그릇의 정체성으로 살면 늘 불안하고 두렵고 불완전하다. 허나 보배의 정체성으로 살면 주 안에서 당당하고 안전하고 기쁘다.
 영에 속한
 사람은 육에 속한 사람과 삶의 방향과 방식이 다르다. 육에 속한 사람에게는 육의 방식이 있고 영에 속한 사람에게는 영의 방식이 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육신과 외모에 따라 자기를 이해하고 더 좋은 외모를 취하기 위해서 살지만 영에 속한 사람은 영의 판단에 따라 자기를 이해하고 내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산다. 영에 속한 사람이나 육에 속한 사람이나 모두 땅에 두 발을 딛고 외견상 비슷한 일상에 얽매어 사는 것은 같지만 서로간에 맺어지는 삶의 열매들은 현저히 다르다.
 신앙인과 불신앙인의 구별은 외형적 모습에서가 아니라 나타나는 열매로서 구별된다. 열매로
 그가 어떤 신앙인인지를 파악한다. 예수님은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18)’ 하셨다. 즉 좋은 나무에만 좋은 열매가 맺고 나쁜 나무에는 나쁜 열매가 맺힌다. 마찬가지로 영에 속한 사람만 영의 열매를 맺을 수 있고 육에 속한 사람은 오직 육의 열매만 맺는다. 영에 속한 사람으로서 우리는 좋은 열매를 기도하고 기대하고 추구함이 마땅하다.
 어떻게 영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우선 영에 속한 사람이라는 자기정체성과 확신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각 사람은 자기 정체성에 부합한 삶의 열매를 맺는다. 정체성의 회복은 단지 삶의 모습과 외적 행위들을 바꾼다고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부활하신 주님의 영인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통제하셔야 한다.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육의 요소들인
 미움과 분노, 분쟁과 욕심, 분노, 갈등 두려움등은 오직 성령께서만 해결하실 수 있다. 정체성 회복은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할 때라야 가능하다. 갈 5:25에,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할지니”했다.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인, 하나님자녀로서의 정체성이 복원되면 자연스럽게 우리네 삶에서 영의 열매들이 맺어진다.
 우리들은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다. 영에 속한 자들로 우리들은 세상에 대해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들이다. 그리고 날마다 죄에 대해 죽는 자들이다. 우리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아직 남아있는 옛사람, 옛지체들을 날마다 죽이며 온전한 새 사람을 이루어 가고 있다. 물론 새사람의 열매들도 맺어가는 중이다. 



​목회 서신 
<하나님 신뢰> 2021.8.13.
​ 믿음이란 믿음의 대상이신 주 하나님에 대한 철저하고도 변함없는 신뢰이다. 잠 3:5에,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라 말라” 했다. 하나님에 대한 의지와 신뢰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어떤 경우에도 그것은 참 믿음이 아니다. 주님을 신뢰하면 인생여로에 많은 은혜와 도움을 누린다. ‘하나님의 부력’이란 말이 있다. 우리가 물에 몸을 담그면 그 순간은 물에 빠져들지만 몸에 힘을 뺴고 물에 몸을 온전히 맡기면 물에 떠오르게 된다. 이를 부력이라 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고 그분께 인생자체를 맡기면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부력을 경험할 수 있다. 하나님은 믿는 자가 고통과 절망의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지 않게끔 당신의 부력을 작동시키신다. 하나님의 부력을 체험했던 한 사람이 이렇게 노래했다. “슬픔의 파도에 떠밀려도 기쁨의 해안에 닻 내릴 수 있고 절망의 벼랑에 떨어져도 희망의 빚줄기 잡을 수 있네”.
​ 인생을 송두리채 주님께 맡기며 사는 사람은 삶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어떻게든 살수 있다. 강하신 주님의 손길이 늘 그에게 미치기 때문이다.​하나님을 신뢰하며 사는 사람은 매일매일 그분이 베푸시는 은혜에 감사하고, 부력같은 힘으로 역사하는 그분 능력에 감탄하며 살아간다.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자신 스스로 무언가를 할수 있다는 교만을 버리고 주님 앞에서 매사에 겸손해 한다. 시131:1에, “주님 이제 내가 교만한 마음을 버렸습니다. 오만한 길에서 돌아섰습니다. 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 나서지 않으며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했다. 교만과 오만은 다른 것이 아니다. 자신 스스로 인생과 삶을 주관하고 통제하고 다스릴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 인생이 무거운 이유 가운데 하나는 남보다 더 크고 놀라운 일을 해내야 한다는 강막관념과 자신이라면 그것을 할수 있다는 자기 과신때문이다. 우리들은 간혹 크고 놀라운 일들을 행하면서도 정작 일상적이며 꼭 필요한 소소한 일들을 놓치곤 한다. 남보다 더 큰 업적과 공적을 쌓는 것, 아무나 할수 없는 참 귀하고 위대한 일이다. 헌데 그것 못지 않게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은 크던 작던 간에 맡겨주신 사람과 주어진 일에 겸손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충성다하는 것이다. 가난한 자들의 아버지라 불리워졌던 피에르 신부는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을 “매일 저녁 ‘나의 능력과 특권과 재능과 학식을 가지고 나에게 위탁된 약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위해 무얼 했는가’를 자문하는 것”이라고 요약했다.
​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모든 일에 자신의 능력과 힘, 지혜는 간소화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힘을 극대화 시킨다.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정하고, 자신이 좋아하고 원하는 어떤 일들을 자의로 단념하고 내려놓는다. 그리고 주님이 기뻐하시고 소원하시는 일에 믿음으로 충성한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는 매순간이 의미로 충만한 시간이고 범사가 의미가득한 일들이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바라보며 사는 자의 자리는 늘 성전이 된다. 그에게는 현재의 시련조차 미래의 축복에 이르는 신비로운 통로이다. 범사 하나님을 인정하며 그분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주님의 부력이 늘 작동한다. 그것도 고성능으로 말이다.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면서 평안함, 안연함, 행복, 풍성함을 누리시길 기원한다.
​
목회 서신 
<주님 앞에 나갈 때> 2021.8.6.
 요즘에는 모임, 회합, 잔치에 참여할 사람의 조건과 자격을 정해 초대장을 보낸다. 그것 없이는 참여할 수 없다. 예전에 백안관만찬에 초대받지 않는 한 부부가 참석해 안보상의 큰 문젯거리가 된 적이 있었다. 헌데 예수님은 초대장없이 모두를 늘 초대하신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 주리고 목마른 자들, 세상에서 환영 못받는 자들, 사람들이 함께 하기를 꺼려하는 자들도 초대하시며 그들이 당신께 나올때 존귀히 여기며 환대하신다.
 우리들이 주님께 나아갈 때의 자세가 있다. 주님의 사랑을 받기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자기 개선이 아니라 주님 사랑이다. 주님 앞에 나온다고 일순간 인격이 변하고 삶이 고매해지고 탁월해지진 않는다. 변화에는 시간이 좀 걸린다. 헌데 주님 앞에 나오는 순간 자신이 누구이며 과거 무엇을 했던 상관없이 즉시 주님 사랑에 잠기게 되다. 예수님의 사랑은 현재적이며 무제한적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더 나아지지 않더라도 지금보다 우리를 덜 사랑하시지 않는다. 우리가 더 나아진다 하더라도 지금보다 더 사랑하시지 않으신다. 주님께 나아오는 순간 주님은 무제한의 사랑을 우리에게 쏱아내신다. 헌데 은혜되는 것은 주님사랑을 받을때 그것이 인생을 더 나아지게 한다는 것이다. 사랑을 많이 받은 자가 더 사랑할 수 있고 더 훌륭하고 감동적일 수 있다.
 또 주님께 나아가려면 세상의 시선에 개의치 않아야 한다. 사람들의 모임에 편하게 참여하려면 평소 좋은 평판을 쌓아야 한다. 불의한 자를 향한 세상의 시선은 늘 곱지 않다. 헌데 죄로 인해 주님을 뵐 면목이 없다고 주님 앞에 나아지 못할 자는 하나도 없다. 주님은 죄인과 병자,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오셨다. 믿음은 주님과 나와의 일대일 인격적 관계로 예수님에게 시선을 고정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에 많이 신경쓰면 그들이 좋아하는 모습으로 가장하게 된다. 너무 많이 가장하게 되면 실제의 모습을 찾기 힘들고 위선과 형식, 허례 허식만이 남게 된다. 삶의 여정에 수근거림과 편견, 조롱과 천대멸시는 언제던지, 어디던지 존재한다. 남의 시선에 개의치 말고 오직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하면 예수님도 당신에게 시선을 고정하실 것이다.
 또한 정직함과 진실함으로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 진실함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삶과 믿음의 요소이다. 믿음은 누가 보던지 듣던지 상관없이 주님 앞에 진실하게 삶을 드러내고 고백하는 것이다. 진실과 정직만이 주님보좌를 움직이고 감동시킨다. 부끄럽고 수치스럽더라도 주님 앞에서 거짓과 허식의 가면을 벗고 있는 모습 그대로, 즉 부족한 모습, 죄된 모습, 상처받은 모습을 보여 드려야 한다. 진실한 모습을 세상사람은 이해못할지라도 하나님은 족히 이해하시며 사랑, 용서, 치유, 보살핌, 공급, 위로, 격려를 베푸실 것이다. 
 때로 사람들에게는 불청객일지라도 주님의 초대에는 꼭 응해야겠다. 주님은 당신께나올 때마다 품어주시고 사랑, 환대해 주실 것이다. 주님 앞에 나가면  결국 인생이 개발되고 향상된다.
​

목회서신 2021년 7월
Picture
<이타적 기독교인>  7월30일
​ 임마누엘 칸트는 “이기주의”라는 논문에서 이기주의를 철학적으로 설명했다. 첫째는 논리적 이기주의로 자기 생각과 판단, 이론은 늘 옳다고 하는 것이다. 둘째, 미학적 이기주의로 자신의 심미적 취향에 만족하고 자기 느낌이 옳다고 여긴채 자신의 사고와 감성을 예찬하는 것이다. 세째, 도덕적 이기주의로 옳고 그르다고 하는 객관적 기준이 없고 내가 기준이 되어 내게 이로우면 이로운 것이요 내게 해가 되면 악하고 해롭다 하는 것이다. 칸트의 언급처럼 오늘날도 삶의 모든 분야에 계층, 지역, 집단, 국가 이기주의가 팽배해 있고 현대인들은 거기에 깊이 함몰되어 간다.
 죄가 관영한
 말세를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이 이기적 삶을 사는 것은 별로 큰 일이 아니다. 하면 우리들은 그들과는 구별되어야 하지 않을까? 안타깝게도 많은 기독자들도 이기주의 사조에 점차 빠져들고 있다. 세상사람들은 자신들보다 교회와 성도들이 더욱 이기적이라고 힐난하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들은 세상과는 뭔가 달라도 달라야 할 기독자들의 삶과 생활, 행동에서 이기적 모습만을 보는듯 하다. 교회의 이기적 모습은 사람들을 복음과 구원에서 멀어지게 하는 빌미를 제공한다.
​ 기독자들은 이기적으로
 판단되어서는 안되는 하늘의 생명으로 거듭난 새 사람들이다. 거듭난 자들게는 그들만의 정체성과 삶의 가치들이 있다. 그 정체성으로 믿음의 본질을 나타내고 믿음의 주이신 예수의 영광을 드러낸다. 기독자됨의 정체성중 하나가 이기심과 대척점에 있는 이타심이다. 대부분 성경의 위인들은 믿음으로 살면서 이타적 삶을 실천했다. 특히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이타심의 본보기였고 교과서였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서로 교제하고, 일심으로 기도에 전념했다. 자신들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 공유했고, 기쁨으로 음식을 나누었다. 그들은 마음과 뜻을 같이 했다. 초대교회는 당시에도 세력을 발휘했던 이기주의를 버리고 나와 너, 우리 모두의 공동체 삶을 지향하고 구현했다. 하나님께서는 초대교회에 큰 복을 베푸셨다. 각종 기사와 표적이 나타났고,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들이 더해 졌으며, 온 백성들에게 칭송을 들었다.
 초대교회의 이타적
 사랑은 예수님으로부터 기인했다. 예수님은 전적으로 타자를 위한 삶을 사셨다. 예수님의 이타적 삶이 가장 극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이다. 예수님은 하늘보좌와 영광을 온전히 내려 놓으시고 인류를 섬기시기 위해 종으로 오셨다. 그리고 온 인류를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서 희생하셨다. 바울은 갈 1:4에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자기 몸을 주셨으니” 했다. 따라서 새 생명으로 거듭난 자들이며 예수를 믿음의 주로 고백하고 따르는 우리들은 초대교회가 보여주고 예수님이 몸소 실천하셨던 이타적 사랑을 행하며 그것을 세상에 증거함이 마땅하다.
 오늘같이 환경이 척박하고 현실이 소요스러울수록 우리들은 자신만을 위한 삶을 내려놓고 성령의 능력과 지혜 안에서 주님과 이웃과 세상을 위한 생각과 계획, 언행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며 세상에 희망을 주는 이타적인 존재들로 살아야 할 것이다. 주님과 사람들 앞에 올바른 믿음 생활의 시작과 과정과 끝은 경건하고도 이타적인 사랑과 섬김일 것이다.
<마음 다해 주께 하듯>  7월23일
 ​ 필리핀의 부자 사업가의 아들인 카통 까우는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마닐라에 소재한 한 성서대학에 입학하였다. 헌데 기숙사에 들어간 날, 욕실과 화장실이 불결하여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학장에게 불평을 털어 놓았다. 학장은 웃음을 지으며 ‘내가 곧 조처해 주겠네”라고 했다. 까우는 학장이 청소부를 보내 깨끗하게 해주리라 믿었다. 얼마 후 화장실 닦는 소리가 들려왔다. 까우는 청소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보려고 화장실을 기웃거렸는데 다른 이가 아닌 학장이 즐겁게 화장실과 욕실을 청소하는 것이었다. 청소를 끝낸 뒤 학장은 “자, 화장실이 깨끗 해졌으니 이제 마음에 드나?”라고 물었다. 까우는 예상밖의 일에 놀라서 아무 말도 못했다. 학장은 웃음 띈 얼굴로 “우리 학교는 재정상태가 그다지 넉넉치 못해서 청소부를 따로 둘 수가 없어 모두가 스스로 일들을 한 다네” 말했다. 그때 까우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후일 그는 성서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학위를 받고 시카고 자유교회에서 외국인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목사가 되었는데 그 학장으로부터 평생 잊을 수 없는 사랑과 평화의 교훈을 받았 노라고 가는 곳마다 간증했다.
 요즘은 직업과
 일에 대한 개념과 가치가 많이 바뀌었지만 예전에는 직업의 귀천이 분명 있었다. 학식있고 지위가 높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있고, 불학식에 자리가 낮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은연중 구별되어 있었다. 3D 업종, 즉 더럽고 어렵고 위험한 일들은 배우지 못한 하류계층 미천한 자들의 몫이었다. 예전의 기준으로 한다면 위의 언급된 학장이 기숙사 청소를 하는 것은 신분과 격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헌데 성경의 기준은 사람들의 기준과는 사뭇 다르다. 성경은 누가 어떤 일을 했느냐에 관심있는 게 아니라 누가 하던 그 일을 하는 마음의 태도와 자세에 관심을 집중한다. 성경은 직업의 귀천, 일의 가치의 경중을 따지지 않는다. 다만 어떤 태도로 그 일을 수행하고 있느냐를 따진다.
 의식주를 해결하고
 이웃과 사회의 공공선을 도모하고 더 나아가 주님 영광을 위해서 하는 모든 일및 직업은 모두 소중한 하나님의 일이다. 즉 어떤 일을 하든지 일하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직업이나 일에는 동등한 가치가 부여된다. 해서 사람들이 기피하는 3D 직종은 누군가가 해야 하는 아주 중요한 일이고 그러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누구보다 귀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강단에서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를 집행하는 목사의 일만이 아니라 구원받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는 모든 일들도 다 거룩한 주님의 일이다.
 주님의 일이다
 여기면서 하는 일에는 두 가지 특별한 마음의 자세가 있다. 골3:23에, “무슨 일을 하던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말라” 했다. 이 귀절에 의하면 첫째 자세는 마음을 다하는 것이다. 즉 어떤 일이든지 주님이 맡겨 주셨다는 확신으로 그 일을 소중히 여기며 정성을 쏟는 것이다. 둘째 자세는 주님께 하듯 하는 것이다. 주님께 하듯 하면 대충대충 못한다. 그분의 영광을 위해 최선 다하고 죽을 힘 다해 일한다.
 지금 우리들이
 하고 있는 일들이 교회 일이건, 일상이건, 가정사이건 주님께서 우리를 충성스러이 여겨 맡겨 주신 주의 일이기에 감사와 기쁨으로 그 일에 최선 다하자. 범사 주께 하듯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 은혜와 행복, 평안과 풍성함이 임한다.​​
<다섯 감옥으로 부터의 자유>  7월16일
 기독자들은 주님께 예속된 주님의 자녀이며 백성으로 그 어떤 사람, 그 무엇으로부터도 자유한 자들이다. 갈 5:1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했다. 헌데 때때로 우리는 죄의 종처럼 살아간다. 의식하던 못하던 죄의 소원을 따르며 죄가 시키는 일을 행하곤 한다. 물론 성령께서 이럴 때마다 죄에 대해서 깨우쳐 주시고 회개케 하셔서 우리로 다시 자유자로 돌아오게끔 은혜 베푸신다. 죄는 우리를 자신의 종으로 만들어 다음과 같은 감옥에 구속시킨다. 헌데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감옥에 갇혀 있음을 모르는채 그곳에 거한다. 그 감옥은 철장과 쇠사슬이 있고 간수가 겹겹이 지키는 곳이 아닌데 오히려 더욱 강력하게 우리를 붙들고 옴싹달싹 못하게 한다. 이 감옥들로부터 자유해야만 참 자유자로 바로 설수 있고 평안과 행복을 누릴수 있다. 
 첫번째 감옥은 '자기 애의 감옥'이다. 우리들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서 결국은 자기를 사랑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심지어 자식 사랑한다는 말도 자기 중심적일 때가 많다. 이는 자신의 소원을 이루려는 경우를 뜻한다. 사람들은 이기적인 자기 애의 감옥에서 쉽게 출옥하지 못한다. 사랑이란 말은 참 아름답고 가치있지만 그 사랑이 자신을 향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기심, 자기 사랑이 큰 감옥이다. 둘째 감옥은 '근심의 감옥'이다. 정신과 의사들은 인간은 하루도 빼지 않고 근심하는 존재이다 말한다. 그들은 인간의 근심에 대하여 ‘40%는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근심, 30%는 지나간 과거의 일에 대한 근심, 12%는 미리 상상하고 가상해서 하는 근심, 18%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일에 대한  근심이다’고 발표했다. 근심하면 자신의 마음이 더욱 상하고 남까지 힘들게 하며 주변 분위기까지 해친다. 근심하면 자신이 지닌 잠재력, 능력, 지혜마저 사라져 버리고 창의력은 상상조차 못한다. 근심은 자신을 비겁하고 나약한 존재로 구속시키는 정신적 감옥이다. 세번째 감옥은 '향수의 감옥'이다. 사람들은 지나치게 과거를 생각하고 회상한채 종종 옛날로 돌아가서 ‘지금 와서 보니 그 때가 좋았고 축복이었어”라고 말하곤 한다. 또한 반대로 ‘그때에 그러지 말았어야 되는데” 하면서 과거를 부정적으로만 해석하기도 한다. 과거에 대한 지나친 향수와 부정등은 현재 삶에 도움이 안되며 미래로 향해 나갈 수 없는 감옥이다. 네째 감옥은 남의 것만 좋게 보는 '선망의 감옥'이다. 사람들은 비교의식을 통해 남의 것을 더 크고 좋고 가치있게 여긴다. 비교하면서 다른 사람의 처지를 선망하는 감옥에 매이면 자신에게 주어진 귀한 은사및 가치를 망각하고 비참함에 이른다. 
다섯째 감옥은 '증오의 감옥'이다. 이는 영혼과 몸으로 남을 미워하고 시기, 질투함에 매여 있는 상태이다. 이 감옥에 매여있는 자들은 동료가 자신의 바람과 요구대로 따라주면 고마움을 느끼며 동역자로 여기지만 그렇지 아니하면 자신의 대적이라 여기여 불평하고 비난하고 원망하곤 한다. 증오와 미움은 영혼을 서서히 말리우고 죽게 만들며 스스로를 주님제자의 위치에서 밀어내어 마귀의 자식으로 변하게 한다.
 이런 자기 애, 근심, 향수, 선망, 증오의 감옥들에서 스스로 자유할 수 있는 길이 있을까? 자신의 의지와 결심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어야 한다.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영육 간에 우리를 통제하시고 관리, 지도, 인도하셔야 한다. 성령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감옥의 요소들과는 대조되는 성령의 열매들을 맺게 하신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성령을 모시고 범사 매순간 그 분의 다스림을 받자. 죄는 성령으로만 다스리고 이길 수 있다. 오늘도 성령 충만하시길 기원한다.

​<동기 부여자>  7월9일
 축구경기를 하는데 한 팀이 일방적으로 경기를 주도하고 있었다. 전반전 동안 열세인 팀에게는 전혀 기회가 오지 않았고 경기를 포기한듯 보였다. 전반전이 끝나고 라커룸에서 코치가 선수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은 이렇게 무능하게 질 팀이 아니다. 후반전에는 좀 더 열심히 뛰면서 최선다해 보자. 전세를 반전시켜 이길 수도 있다. 혹 질때 지더라도 멋있고 폼나게 지자. 나는 선수들을 믿는다”. 경기력이 형편없다고 야단칠줄 알았는데 자신들을 격려, 독려하는 코치말을 들으면서 선수들의 각오가 새로와졌다. 그리고 후반전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열세를 보이던 팀의 선수들은 자신감을 갖고 활기있게 운동장을 뛰어 다녔다. 할수 있고 이길 수 있다는 확신으로 경기에 임하니 당황하는 것은 상대 선수들이었다. 그리고 경기가 끝났을 때 전반전과는 너무 다른 결과가 나타났다. 놀랄만한 역전승이었다.
 인생도 그와 같다. 뭔가가 긍정적으로 되어 간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자신감을 갖게 되고 그 자신감은 실제 행동을 유발시켜 긍정적 열매를 맺게 한다. 반면에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점점 꼬이게 되어 불안감을 느끼면서 부정적인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면 하는 일에 자신감을 잃고 자포자기 하게 된다. 바로 그렇게 떄문에 인생이 잘 나가고 좋을 떄만이 아니라 막히고 나쁜 상황일 때도 동기부여가 필요하다. 시간에 맟춰 하루 세끼 식사를 하듯 인생을 안연하고 풍요롭게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들은 필요한 순간마다 삶과 생활에 규칙적으로 동기부여를 해주어야 한다. 아무리 능력있고 지혜로와도 인간이 매 순간 잘하고 매 순간 성실할 수는 없다. 작심하고 의지를 다진다해도 늘 성공하고 항상 행복한건 아니다. 인생이 늘어지고 침체될 때마다 다시 일으켜주고 세워줄 수 있도록 해주는 그 누군가 그 무엇인가가 모두에게 필요하다.
 새로운 아이디어의 고취나 주입, 자신감을 세우고자 하는 의지, 이치에 맞는 사고등은 침체된 이들에게 활력을 불어 넣어주고 그의 내부에 새로운 계기및 기회를 마련해 준다. 동기부여가 일어나면 맡겨진 일이 힘들고 거칠어도 끝까지 좀 더  잘해 낼수 있다. 동기부여는 할수 있다는 희망의 연료를 공급받는 것과 같다.
 그런데 우리 믿는 이들에게 최고의 동기 부여자가 있다. 그분은 주님이시다. 주님은 우리 안에서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인격적 힘, 선한 행동을 불러오는 강력한 영적 에너지이시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는”(40:29) 분이라고 했다. 즉 매사에 탁월한 동기부여자시라는 뜻이다. 따라서 주님을 알고 그분과 연결될때 우리들은 믿음 안에서 모든 삶과 목적에 대해 새로운 동기를 얻게 된다. 주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내주하시면서 믿음과 삶에 불을 지펴주신다. 기도의 불, 선행의 불, 헌신의 불, 전도의 불, 섬김의 불등..
 주님은 우리로 성경말씀에 매달리며, 죄에서 돌이켜 당신 뜻에 순종하고, 예배와 경건에 힘쓰며, 교회와 주변사회, 불쌍한 이웃들을 섬기도록 감동을 주신다. 더 나아가 주님꼐서는 우리로 하며금 다른 사람들에게 동기 부여자가 되게 하셔서 모두를 유익하도록 하신다.
 동기부여는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다. 우리들은 하나님에 의해 영/육간에 이런 힘을  부여받은 사람들이다. 이 힘으로 아름답고 복된 삶, 영향력 있는 삶을 누리시길 기원한다
​<하나님을 사랑함>  7월2일
 에밀리는 성경교육과 보수적인 부모님 양육의 영향으로 성적 부도덕이 잘못된 것임을 익히 알고 있었다. 헌데 19세가 되자 성적호기심이 발동하면서 모든 성적 지식을 경험하고자 하는 욕망이 생겼다. 그녀는 이런 성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스스로 확신하기 위해 나름 홥리화 과정을 시도했다. “만일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성적 부도덕을 저질렀다면 믿을 때 주님은 나를 용서하셨겠지?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제도 용서하실 거야”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였는데 그도 밧세바와 뷸륜을 저질렀잖아. 그런 후에도 계속 쓰임 받았잖아,” “내가 부도덕한 행동을 해도 몰래하면 아무도 모를거야 해서 아무에게도 거침돌이 되지 않을거야”. 에밀리는 이런 식으로 죄지음을 합리화했고 거듭거듭 생각하고 또 생각한 끝에 마침내 자신이 성적으로 부도덕한 일을 해도 좋다고 확신하였다. 에밀리는 어느날 저녁 성적호기심을 행동으로 옮기려고 결심하고 차를 운전하다가 멋지게 생긴 히치 하이커가 앞에 서 잇는 것을 보고 멈추었다. 그녀는 최종적으로 하나님께 반항적인 도전을 하였다. “도대체 왜 안됩니까? 내 마음대로 하겠습니다” 그때 주님으로부터 놀라운 대답이 즉각 들려왔다. “왜냐면 내가 너에게 하지 말도록 요구했기 떄문이란다”. 그말을 듣자 에밀리는 엔진시동을 걸고 가속 페달을 밟아 기다리고 있는 히치 하이커 곁을 빠르게 지나쳤다. 에밀리가 합리화시킬 수 없는 한가지 이유가 그녀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임을 꺠달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적부도덕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에 어울리는 않은 행동이다는 단순한 깨우침이었다.
 신앙인들의 계획과 행동은 하나님을 사랑함에 근거해야 한다. 즉 무슨 일을 행하기에 앞서 이 일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인가를 헤아려 보는 것이다. 사랑은 상배방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것이다. 자신이 좋아한다고 상황과 여건을 자신 마음대로 합리화시키는 것, 상대방을 아프고 슬프게 하면서까지 자신의 방식을 고수하는 것은 온전한 사랑이 아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께서 불가하다 선언하신 것은 절대하지 말아야 한다. 반면에 하라고 명하신 것은 꼭 행해야 한다.
 주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들이 지키고 행하고 준수해야 할 규범과 기준들을 정하셨다. 그것들을 지키는 것은 취사선택이 아니라 우리들의 거룩한 의무이고 마땅한 책임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지킬수 있는 힘과 지혜는 주님을 사랑함에서 연유한다. 잘못된 행동을 제어하고 벗어날 수 있게 만드는 힘도 하나님 사랑에서 연유한다. 주님을 사랑하면 모든 계명을 지키는 것이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성적호기심을 제어하고, 세상과 벗하여 시류를 따르고 세상사조를 쫓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온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계명들을 지키고 따를수 있다. 요일 5:3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했다. 사랑하면 선한 일을 행하고 악한 일은 거부하기에 필요한 힘과 지혜가 생긴다. 그것이 사랑의 위대함이다.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부어주신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어 사랑을 열매맺게 하시어 하나님과 이웃사랑을 가능케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동시에 우리의 사랑을 얻길 원하신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만 하는 미숙한 자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가자. 주님을 사랑함에서 연유한 모든 삶에는 기쁨과 평안 행복이 있고 바름과 온전함도 있고 아름답고 복된 결실도 있다. 날마다 주님과 사랑에 빠져 시시길 기원한다.
목회서신 2021년 6월
Picture
<영적 습관>  6월25일
“나는 누구일까요? 나는 당신의 영원한 동반자입니다. 또한 당신의 가장 훌륭한 조력자이며 동시에 가장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합니다. 나는 당신을 성공으로 이끌기도 하고 실패의 나락으로 끌어내리기도 합니다. 나는 전적으로 당신이 하는대로 따라 갑니다. 그렇지만 당신행동의 99%가 나에 의해 좌우됩니다. 나는 당신의 행동을 빠르고 정확하게 좌지우지합니다. 당신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몇번 보고 나면 나는 자동적으로 그 일을 해냅니다. 나는 위대한 사람들의 하인일뿐 아니라 실패한 모든 이들의 주인이기도 합니다. 나는 인공지능 기계처럼 정밀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기계는 아닙니다. 나를 당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할 수도 있고 당신의 실패를 위해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나를 착취하십시오. 나를 훈련시킵시오. 그리고 나를 확실하게 당신의 것으로 만든다면 나는 당신의 발 앞에 이 세상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날 가볍게 여긴다면 난 당신을 파멸의 길로 이끌 것입니다. 내가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나는 습관입니다.” 이는 한 무명인이 쓴 글이다.
습관이란 어떤 행위를 오랫동안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익혀진 행동 방식을 말한다. 우리는 어떤 것을 오랫동안 반복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어떤 습관이나 사회관습을 만들어 왔다.​ 사람은 습관을 통하여 인격과 성품이 형성해 간다. 해서 좋은 습관은 생의 성공와 행복, 풍성함을 위해 필수적이다.
사람이 습관을 통해 인격과 성품을 형성해 가듯 신앙의 인격과 성품은 영적습관을 통해 형성해 간다. 해서 기독자들은 영적 습관을 길러야 한다. 영적 습관을 형성하는데는 정해지고 선택된 때는 없다. 지금이 최적기이다. 영적습관은 기초적인 것에서부터 시작되어 꾸준히 행해지는 것이다. 기독자들은 주님의 뜻인 기도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습관을​ 훈련해야 한다. 반복적 훈련을 지속하다 보면 이들이 영혼과 몸에 익혀져서 자연스러이 인생과 신앙생활의​과정들이 될 것이다. 주일성수도 습관화해야 한다. 이 날은 주의 날이기에 그분을 경배하고 섬긴다는 다짐하에 주일지키는 일을 반복하면 이후 자신의 상황이나 현실을​합리화시켜 주일을 범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말씀 읽고 묵상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말씀 훈련은 신앙영역에서 제일 중요한 요소이다. 매일 밥 먹듯이 말씀을 먹고 새기고 음미하는 것을 지속하다보면 언젠가부터는 말씀없이 하루도 견딜수 없을 것이다. 전도도 습관화되어야 한다. 영혼구원은 한,두번의 전도로 열매를 맺을수 있을만큼 그렇게 쉽거나 만만한 과업이 아니다. 지속적이고 꾸준한 사랑, 섬김, 증언등으로 이행해야 할 평생 과업이다.
좋은 습관, 영적 습관은 일종의 씨앗이다. 그것은 처음엔 아주 작아 아무 변화가 없는 것 같아도 어느 순간에 자라서 열매맺고 삶을 변화시킨다. 그것은​ 죽은 씨앗이 아니라 생명있는 씨앗이기 떄문이다. 영적습관은 당사자에게만 유익되는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유익함이 흘러간다. 자신의 영적 성숙함 덕분에 가정과 교회가 더불어 영적 유익함을 얻게 된다. 바울은 딤전 4:7,8에서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이르도록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라고 권한다.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 한알’과 같이 아주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작고 기초적인 것부터 꾸준히 신앙을 훈련하고 경건 연습을 시행하면 언젠가는 자신의 인생과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고 동시에 교회와 공동체내에도 기대이상의 번영및 성숙함이 일어날 것이다. ​

<성령의 역사하심>  6월18일
 불교에 몸담고 있다가 예수님을 믿게 된 나이많은 한 권사가 40년이상 식구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 권사는 자신의 가족, 친지들 모두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길 원했다. 그렇지만 오랜기간동안 그 권사만이 가족들중 유일하고도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당시 불교에 열성이던 식구들중 아무도 예수님께로 나아오지 않았다. 헌데 그 권사의 생애 끝자락에 기도의 응답이 나타났다. 가족과 친지들중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어 교회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이 구원얻은 것은 그 권사의 기도 중 역사하신 성령님의 작품이었다.
 요3장에는 예수와 율법 선생인 니고데모 사이의 대화가 나온다. 거기서 예수님은 성경의 핵심 주제인 구원의 본질에 대해 설명하셨다.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구원얻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즉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듭나게 하시는 주체가 성령님이라 하셨다. 심위일체의 한분이신 성령님은 자신의 뜻과 의지에 따라 사람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인생과 삶을 변화시키시어 하나님의 자녀, 하늘나라 시민이 되게 하신다.
 성경에는 성령님을 상징하는 비유들이 많이 나온다. 기름, 비와 이슬, 불, 비둘기, 물, 인, 그리고 바람등이다. 요 3장에서 예수님은 성령님을 자신이 원하시는 곳으로 움직이시는 바람에 비유하셨다. 3장5절에,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자도 다 그러하니라” 했다. 바람은 숨, 호흡을 의미한다. 이는 성령이 기운이라는 뜻이다. 기운은 삶의 생기이며 에너지이다. 또 바람은 유해요소들을 제거하고 날려보내며 산소같은 신선한 공기를 흡입하게 한다. 성령은 모든 더러운 것들을 정화시키고 신선하게 하는 공기청정기와 같다. 그런가 하면  바람과 같은 성령은 믿음의 증거가 되기도 한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물들의 움직임으로 그 존재자체를 증거한다. 거듭난 사람은 성령의 바람에 의해 심령이 움직이고 변화하여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감으로 믿음의 증거를 제시한다.
 우리의 구원 혹은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해서는 이처럼 성령의 역사하심이 절대 필요하다. 성령이 위에 있는 하늘생명으로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신다.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은혜를 진적으로 믿고 신뢰해야 한다. 헌데 거듭나게 하셔서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은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과 자비하심에 근거하고 잇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만드신 세상을 사랑하신다. 그분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의인도 사랑하시지만 지금도 죄중에 헤매는 죄인들도 사랑하신다. 그들이 회개하고 당신께 돌아와 구원받은 삶을 살길 바라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세상에 보내 주셨다. 우리들은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님을 절대 신뢰하면서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며 전도해야 한다. 불신앙들이 성령받도록 열성적으로 지속적으로 기도하면 위의 권사님의 기도응답처럼 우리들의 가족, 친지, 지인들이 언젠가는 주님 앞으로 돌아올 것이다.​​
<티베트 순례객>  6월11일
 중앙아시아의  고원지역에 티베트라는 작은 나라가 있다. 이 나라에는 종교적으로 살려는 사람들에게 아주 소중한 두 가지 요소들이 있다. 하나는 순례이다. 저들은 정화과정을 위해 3걸음마다 한번씩 순례목적지를 향해 온 몸을 땅에 납짝 엎드려 절하며 하루 6-8킬로 미터를 진행한다. 이러기를 수개월, 그들은 성지인 라싸의 조캉사원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무려 10만번 절한다. 가히 생명을 건 순례이다. 다른 하나는 조장이다. 저들은 친지들의 죽은 몸을 조각내 새들에게 보시하는데 이를 조장이라 한다. 그들은 순례시 꼭 필요한 것들만을 최소한도로 소지하며 죽은 후에도 사체까지 내려 놓는다. 물론 그들은 기독자들이 아니기에 순례와 조장이 구원의 조건을 충족시키진 못하지만 그들의 종교생활은 진지하지 그지없다.
 현대 기독자들의 신앙생활의 실체는 어떤가 ? 열성적인 신앙인들은 주일성수하고 예배드리고 십일조헌금하고 선교여행가며 교회건축, 선행, 구제, 쎄미나, 각종회의에 참여한다. 또 믿음으로 구원받았음을 간증한다. 이 정도면 믿음의 수준이 퍽 높아 보인다. 물론 늘 초보에 머무는 자들도 꽤 있다. 초보자들은 현재상황에 만족하며 더 자라가길 원치 않는다. 헌데 요즘 신앙인들에게 믿음의 열정 못지않은 또 다른 열정도 있다. 볼 것, 먹을 것, 놀 것, 즐길 것들에의 열정이다. 현대사회는 이런 것들을 계발하고 상품화한다. 이들은 이 시대 사람들의 문화가 되었다. 많은 이들이 잘 먹고 잘 보고 잘 놀고 잘 즐기면서도 잘(?) 믿는듯 하다. 볼거리, 놀거리, 먹거리, 즐길 거리들이 나쁘다는게 아니다. 육체와 정신의 건강을 위해 우리는 주님이 만드신 것들을 감사함으로 향유하며 즐길 수 있다.
 헌데 문제는 이것들이 성숙한 믿음생활에 장애요소들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열성이라는 말을 사용할 정도로 지나치다면 말이다. 즐기고 싶은 것들 다 즐기면서 제대로 믿을 수 있다면 정말 다행이고 은사이다. 헌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나는 확실하게 즐기면서 동시에 확실하게 믿는 것, 그것은 절대 못한다. 예전에 모국방문시 주의 일에 일시 손을 놓고 지인들과 여기저기 다닌 적이 있었다. 당시 참 재미있었는데 그후 미국에 다시 돌아왔을때 영성생활과 교회 일에 일시 맥이 끊겨 그것을 정상 회복하느라 적잖게 힘들었다. 한가지를 제대로 하려면 다른 것을 지나치게 하는 것을 삼가해야 한다.
 아무리 멋있고 흥겨운 것이어도 믿음생활에 장애가 된다면 어떤 이유, 명분을 내세워도 그것은 가치있고 좋은게 아니다. 따라서 그것을 줄이고 내려놓아야 마땅하다. 바울은 예수를 만난 이래로 과거의 모든 가치들을 분토처럼 버렸다. 제대로 믿기 위해서였다. 다방면에서 유력자였던 바울도 세상 것들과 겸해서는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할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예술을 우상과 왕으로 만든 이 미친
열정으로부터 예술이 짊어진 무거운 오류를 배웠다. 사람의 욕구에서 생겨난 무서운 불행..세상의 부질없는 것에 몰두하느라고 나는 하나님을 묵상하도록 주어진 시간을 허비했다”.  이는 천재예술가 미켈란젤로의 회한에 찬 고백이다.
 알게 모르게 세상 것들에 마음을 주면서 동시에 믿음의 순례 길을 가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신앙자의 모습일까 ? 이런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과연 무엇이라 하실까 ? 꾸짖으실까 아니면 격려하실까 ? 나름 자신들의 종교생활에 헌신적인 티베트 순례객들의 모습이 잔잔한 울림을 준다.
<참된 우정>  6월4일
 생애동안 크게 감화력과 영향력을 끼치는 3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부모님과 스승과 친구이다. 이들중 친구의 존재는 자신의 인격과 삶의 태도, 습관등을 형성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삶의 동반자이다. 4 세기경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였던 존 크리소스톰은 친구사이의 우정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친구와의 우정을 통해 장소와 계절까지 사랑하게 된다. 그것은 꽃들이 그 주위에 아름다운 꽃잎들을 흩뿌린 것 같이 친구들도 그들이 사는 장소와 시기에 참된 사랑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 우정을 논할 때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 두 인물이 있다. 목동출신의 다윗과 왕자 신분인 요나단이다. 이 둘은 신분 위치상 왕권을 두고 다툴 소지가 있었음에도 진실한 우정의 모델이 되었다. 성경은 두 사람의 친밀하고 밀접한 유대관계를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서로에게 충실함으로써 깊은 우정을 유지하였을뿐 아니라 서로를 돌봄으로서 그 우정이 흔들림없이 자라게 했다. 특히 다윗을 향한 요나단의 우정은 사람들의 기대치 이상이었다.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여 그에게 우정의 징표로 자신의 겉옷과 군복과 칼, 활, 띠등 왕자임을 상징하는 것들을 주었고 또한 여러번 곤경에 처한 다윗을 돌보아 주었다. 삼상 23장 16절에서 우리는 그 둘의 우정의 정점을 보게 된다.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수풀 속으로 도망할때 요나단이 일어나 그 속에 들어가서 다윗을 위로하며 힘있게 하나님을 의지하게 했다.​좋고 깊은 우정은 평안하고 형통할떄 만이 아니라 친구가 삶의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에도 하나님 안에서 강하고 담대하고 굳건히 서도록 돕는다. 잠언 17:17에,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낳느니라” 했다.
​ 개인주의가 팽배한 현시대에 대부분 인간관계가 상대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를 따짐에 반해 기독자들은 오히려 자신이 상대방에게 무엇을 줄수 있을까에​촛점을 맟추어야 한다. 주님은 우리를 친구라 부르면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주님은 당신이 하신 말씀대로 참 좋은 친구로서 우리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 자신의 실패와 약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주고 세워주는 친구가 있다면 그것은 큰 축복이며 은혜이다. 그런 친구에게 늘 고마움을 표하며 그와의 우정을 더욱 돈독히 세워가야 한다. 또한 예수님께서 죄인이었던 우리를 친구로 대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친구들을 대할 수 있어야 한다. 더욱 영광스럽고 빛나는 삶은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며, 받기 보다는 나눠 주며, 대접받기 보다는 묵묵히 섬기는 삶일게다.
​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진실하고 튼튼한 친구관계를 유지하려면 자신의 의지,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이 절대 필요하다. 즉 하나님 사랑이 자신 안에 부어질 때 그 사랑으로 이웃과 친구를 사랑할 수 있고 더 나아가선 원수 사랑까지 가능케 된다. 하나님 사랑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부어진다(롬5:5).
​ 사람은 사회적 존재이며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의 지체들이다. 행복하고 의미있고 조화로운 삶을 위해 모두에게 참된 사랑, 깊은 우정, 진실한 관계가 절실하다. 친구들, 교우들과 주 안에서 다윗과 요나단같은 아름다운 우정을 이어가길 기원한다..
<크리스천이란 이름>  6월1일
​알렉산더 대왕의 휘하에 같은 이름을 가진 알렉산더라는 병사가 있었다. 그런데 그는 행실이 난잡하고 형편없어서 동료 병사들에게 큰 민폐가 되었다. 그로 인해 알렉산더라는 이름이 마구 더렵혀 졌다.  그의 소문을 들은 알렉산더 대왕은 어느날 예고없이 병사 알렉산더의 막사를 방문했다. 대왕은 겁에 질려 경례를 하는 병사 알렉산더에게 물었다.  “ 자네가 알렉산더라지?”, “네. 그렇습니다. ” 자네에 대한 소문을 들었네. 내가 자네에게 두 가지를 명하겠네. 자네 이름을 바꾸게. 그게 싫다면 자네 생활을 바꾸게. 그래서 그 이름의 오욕을 앃게나“.
 자신에게 주어진 이름 값을 다하고 사는 자가 있는가 하면 훌륭한 이름이 있음에도 그에 걸맞지 앉은 삶을 사는 이도 있다. 주님을 믿은 이들에게 붙여진 이름은 크리스쳔이다. 크리스쳔이란 이름은 1세기에 최초의 이방인교회였던 안디옥교회 지체들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안디옥 시민들은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고 낮에는 그리스도를 위해 충성다하고 밤에는 그리스도를 꿈꾸면서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고, 그리스도를 나타내며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고 있는 안디옥 교회내의 그리스도 제자들을 가리켜 크리스쳔이란 이름을 붙여 주었다. 처음으로 크리스쳔으로 불린 안디옥 교인들의 의식과 사고, 언어와 행위는 누가 봐도 온통 그리스도에 젖어 있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삶의 가치이며 절대 필요 조건이었다. 안디옥교인들에게 붙여졌던 크리스쳔이란 말은 그후 믿은 이들을 지칭하는 일반명사가 되었다.
 크리스쳔이란 말에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작은 예수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를 닮은 자란 뜻이다. 물론 이둘의 뜻은 동일하다. 하면 우리들은 주님이름과 비슷한 이름을 소유해도 합당할 만큼 예수를 닮은 삶을 살고 있는지? 누군가 우리의 삶속에서 그 이름의 원주인이신 예수를 발견할 수 있는지?
 또한 믿는 이에게는 크리스쳔이란 이름 외에도 교인이란 이름이 있다. 교인이란 주님의 몸인 교회 공동체에 속한 지체란 의미이다. 교인들은 교회의 법과 질서를 따르면서 주님의 몸을 건강하고 평온하게 잘 가꾸어 가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교회를 교회답게 세워가야 가야 한다. 또한 믿는 이들을 성도라 부른다. 성도란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거룩한 무리이다. 거룩은 하나님의 절대 품성으로 “죄와 구별된 상태”이다. 하나님은 범사에 거룩할 것을 모든 믿는 이들에게 명하셨다. 따라서 성도들은 죄된 것은 생각, 상상하거나 계획하거나 모방, 실행치 않는 자이다. 믿는 이들은 거룩으로 영혼을 단장하며 성결로 행실을 다스리면서 세상사람들 보다는 더욱 순결하고 더욱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들은 크리스쳔, 교인, 성도란 이름에 과연 합당하게 살고 있는가? 우리들과 만나는 사람마다 ‘나도 크리스쳔이 되고 싶어” 라는 감동을 불러 일으키는 그런 예수닮은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삶을 통해 안에 계신 예수님을 드러내고 나타내면서 주위에 희망과 평안, 은혜와 복을 전달하는 매력있고 아름다운 성도이었으면 참 좋겠다.
 우리 모두 크리스쳔이란 명예로운 이름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그 이름에 부끄럼없이 이름 값을 하면서 언행심사간에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시길 기원한다.
목회서신 2021년 5월
Picture
<오늘 하루씩>  5월28일
<오늘 하루씩>
 답슨 목사는 버지니아 주에 사는 친구 에드 키츠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그를 방문했다. 암 환자가 된 키츠는 친구목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암에 걸린 것을 어제 알았네. 의사는 내가 두달 밖에 살수 없다고 조심스럽게 전해 주었네. 나는 의사에게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말중 아주 좋은 말입니다’ 했지. 그랬더니 의사가 놀라며 ‘무슨 말씀인지요?’ 하고 묻더군. ‘ 아, 오랫동안 저는 하루씩 주님께 의지하길 익혀 왔는데 지금 의사 선생님께서 두 달이나 주시니 저에게는 반갑고 복된 말일수 밖에요’ 라고 말했다네”.
 모든 사람들은 하루씩 살아간다. 장수한 사람은 하루씩 더 여러 날들을 살았고 단명한 사람도 하루씩 살되 좀 적은 날들을 살았다. 인생의 기초 범위는 오늘 하루이다. 우리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실존의 시간은 오늘 하루이다. 오늘은 우리들이 살아갈 인생이 새로움으로 시작하는 지점이다. 우리 일생의 행복은 오늘 하루들의 행복의 총체이다. 모든 이들에게는 하루에 오직 하루치 만큼의 생명이 주어진다. 물론 사람들은 내일을 바라보고 희망하고 계획하지만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른다. 내일은 아직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루를 소중히 생각하며 사셨다. 그분은 주어진 날에 충실하셨고 그날의 사명을 다하시면서 기쁘고 즐거워 하셨다. 심지어는 십자가 위에서 맞이하신 마지막 하루도 최선다하셨다. 주님은 십자가 고통중에도 인류를 위해 일곱마다 말들을 남기셨다. 바울도 하루를 넘어서 염려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 빌4:6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했다.  오늘을 넘어선 내일에 빠져 아무 것도 고민하거나 염려치 말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오늘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사셨던 것처럼 제자들에게 하루씩 살라고 가르치셨다. 마6:34에,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했다. 이는 내일 일을 오늘 하지말라는 뜻이다. 이 귀절을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표현한다. “하나님꼐서 바로 지금 하고 계신 일에 온전히 집중하여라. 내일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일로 동요하지 마라. 어떠한 어려운 일이 닥쳐도 막상 그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감당할 힘을 주실 것이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주님이 값없이 주신 은혜와 선물과 능력으로 여기며 감사히 받아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삶 전체를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오늘 하루에 집중하며 사는 법을 배우며 이를 실천해야 한다. 오늘 할 일은 오늘을 향하신 주님의 뜻을 꺠우치며 행하는 것에 몰두, 집중하는 것이다. 그럴때 우리는 하루씩 살아가는 것을 실행할 수 있다. 오늘 하는 일이 가장 소중한 일이다. 오늘 맡겨 주신 곁에 있는 사람들이 제일 소중한 사람들이다. 그들과 함께 매일 하루치 만큼의 삶의 사명과 숙제들을 행하고 풀어야 한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내일을 계획하고 그에 맟추어 살아가되 얽매이지 마시라. 내일은 불확실한 약속어음같은 것이다. 오늘이라는 시간의 청지지가 되어 오늘 하루에 온전히 충성하고 온전히 지내시길 바란다. 오늘은 잘 준비된 현금같은  것이다. 오늘 잘 믿으며 위를 소망하며 하나님과 이웃을 전심으로 사랑하며 사시길 기원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5월25일
<어떻게 살아야 할까> 
​ 기독교 2천년
 역사에 크게 3가지 논쟁이 있었다. 첫째는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기독 논쟁이다. 둘째는 어떻게 구원 얻는가라는 구원 논쟁이다. 세째는 언제 주님이 오시는가라는 종말 논쟁이다. 첫째와 둘째 논쟁은 해결되었고 종말 논쟁은 아직 진행중이다. 지금은 주님이 오실 때가 가까운 시기, 즉 종말의 때이다. 마 24장과 딤후 3장에 기록된 종말의 표징들은 전쟁, 기근, 자연재해, 자기 애, 돈 사랑, 교만, 불효, 불평, 참소, 성급함, 사나움, 배신, 무절제, 쾌락, 경건모습만 있음 등인데 이들은 오늘의 시대적 현상들이다.
 종말의 때에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주님 오실 날이 가까웠으니까 아무 것도 아니한채 그냥 ‘오시옵소서’라고만 외쳐야 할까 ? 또한 2천년 전부터 주님 오신다고 했놓고 아직 안 오셨으니 그냥 잊고 일과 휴식, 가정등 당면한 일상에 뭍혀서 주님재림에 대해서 무감각해야 할까 ? 기독자들은 맡겨진 세상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언제 오시던 주님 맞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일과 휴식, 가정이 중요하지만 이것들에만 파뭍혀 주님 오심을 대비하지 못한다면 참으로 잘못하는 것이다.
 이 종말의 시기에 우리들은 경건한 예배자로 살아야 한다. 히10:24에, ‘모이기에 힘쓰라’ 했다. 모이는 것은 예배하고 말씀듣고 기도하며 주님께 영광돌리기 위해서이다.
 우리들은 
예수님 이름으로 모여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고 그분의 능력을 공급받고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겠다는 결단을 하기 위해 모인다. 예배가 없다면 인생은 무의미하고 공허하기 그지없다. 예배 대상자가 없다면 인생은 매사에 방황하고 작은 일에도 두렵고 떨리게 된다. 또 우리들은 어떤 상황에서건 착한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시대가 악하다고 믿는 이들마저 서로에게 무심, 냉담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서로 돌아보면서 사랑과 선행을 행해야 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헌데 참된 믿음의 기준은 사랑의 행위이다. 믿는다 하면서도 선행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일 뿐이다. 악행과 범죄지수가 늘어갈수록 기독자의 본분은 선행에 몰두하고 그것을 격려, 장려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기독자들은 복음 전도자로 살아야 한다.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마지막 명은 ‘전도하라’ 였다. 주님 재림은 복음이 지상의 모든 족속에게 전해질 때 드디어 임한다(마 24:13). 말세란 복음이 전해지는 기간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오셔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때가 말세의 시작이라면 복음전도가 완성된 때는 말세의 끝, 즉 예수님의 재림 때인 것이다. 우리들은 전도에 더욱 힘을 내어 마지막 종족이 복음을 수용할 때까지 증인으로 살면서 만나는 사람, 오가는 장소를 복음전도와 관련시켜야 한다. 복음전도를 통해 불신영혼을 천국자녀로 만들 때 주님은 그 무엇보다 더욱 기뻐하실 것이다.
 지금은 종말의
 때이다. 마지막 시기에 지혜로운 인생은 세월을 아끼며 시대의 징조를 깨우치며 그에 합한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 모두 신실한 예배자로, 겸손한 선행자로 충성스런 전도자로 살아가길 기원한다.​​
<믿음의 성장>  5월21일
 <믿음의 성장>
 살아 있는 것들중 고정, 불변으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생명체들은 조금씩이라도 바뀌고 변한다. 자람은 생명체의 특성이다. 꽃도 자라고 나무도 자란다. 수확하기까지 곡식도 자라고 과일도 자란다. 어린 나무만이 아니라 고목도 자란다. 고목은 다 자란듯 보여도 철이 되면 잎사귀가 나오고 꽃도 피운다. 사람도 계속 자라가는 존재이다. 생명으로 잉태되어 엄마 자궁에서 10개월을 자라고,  태어난 후에도 성장을 계속한다. 육신의 성장은 20세를 전후로 멈추지만 인품과 지혜, 교양은 계속 성장하게 된다. 삶의 여정에서 성장은 귀하며 발전은 심히 아름답다.
 생명체만이 아니라
 구원에 절대 요건인 믿음도 자란다. 즉 우리들은 영적으로 성숙해지게 된다. 구원을 얻은 우리들은 영혼의 거처가 어둠의 자리에서 빛의 왕국으로 옮겨졌다. 헌데 구원받고 빛의 자녀가 되었다고 우리들의 모든 것이 한번에  바뀌거나 온전해 지지도 않는다. 처음부터 성숙한 믿음으로 출발하는 기독교인은 아무도 없다. 지식, 나이, 세상 지위, 자리와 상관없이 누구나 믿음 안에서 어린 아이로 시작한다. 그리고 한 걸음씩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을 향해 성장하게 된다. 기독자들은 평생토톡 점진적으로  자라가는 과정을 거친다. 믿음이 자라지 않으면  믿어도 기쁨과 만족이 없다. 영적 성숙에 도달하지 않으면 각종 시험과 유혹에 휘청거리고 별것 아닌 세파에도 넘어지게 된다. 믿음이 자라지 않으면 교회적으로도 많은 문제점에 봉착하게 된다. 교회 내에서 야기되는 문제점들 대부분은 지체들의 믿음이 전혀 없어서가 아니라 연약해서이다.
 1960년대 저명한 복음주의자인 토저 목사는 현대교회에 큰 세가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첫째 믿는 자가 성장하지 않고 항상 어린아이로 머물면서 살만 찌는 것, 둘째, 믿는 자가 교회 안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알지 못하고 오직 참관만 하는 것, 셋째, 믿는 자가 서로 일치되지 않고 분열과 다툼만 일삼는 것이라 했다.
 성경은 믿음의
 성숙에 대해 언급한다. 엡4:15에서 “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했고, 벧후3:18에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했다. 벧전2:2에는 “갓난 아기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했다.
 기독자들에게는 ‘믿음 성장’의 모습이 인생과 삶에서 나타나야 하는데 성장은 3가지 것들, 즉 말씀과 기도와 사역들을 통해 일어난다. 우리들이 육신의 건강을 위해 음식을 섭취하고, 이를 에너지로 바꾸기 위해 호흡하는 것과 같이 믿음의 건강을 위해서는 영혼의 양식인 말씀을 먹어야 하며 그 말씀을 영적 에너지로 바꾸기 위해서는 기도로 호흡해야 하며, 또 각자의 분량에 따라 주의 일을 감당함으로써 지속적인 믿음 성장이 이루어 지는 것이다.
 믿음 성장은
 우리가 생활 속의 각종 스트레스에 대항할 수 있게끔 영적 능력을 향상시킨다. 믿음 성장은 우리를 죄와 유혹으로부터 막아주는 벽과 울타리를 우리주변에 쌓아 준다. 또한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과 울림을 줌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낸다.
 우리 모두
 믿음과 인격과 삶의 진보를 이루어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시길 기원한다.
<침묵>  5월18일
<침묵>
 
젊은 철학자 에머슨이 대사상가인 칼라일을 찾아갔다. 두 사람은 말없이 호수 주변의 산책로를 걸었다. 해질 무렵에는 둘 다 지그시 눈을 감고 깊은 사색에 잠겼다. 두 사람은 한 마디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었다. 에머슨은 매우 기쁜 표정으로 칼라일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오늘 선생님께 정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칼라일은 밝은 표정을 지으며 에머슨의 손을 꼭 잡았다. “나도 자네에게 한 수 배웠네. 자네는 매우 훌륭한 철학자가 될 걸세.” 두 석학은 침묵 속에서 많은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많은 말보다 침묵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 세상에서는 목소리가 큰 사람이 득세한다. 무엇이던 강하게 자기소신을 주장해야 하고 목청을 돋우어 공동체의 비젼을 선전하고 내세워야 한다. 남들보다 좀 더 큰 목소리이어야 주위의 시선을 끌게 되고 관심도 얻게 된다. 너도나도 할 말이 무척 많은 세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대상이 있는 것만으로 행복을 느끼고 위안을 삼는다. 헌데 성경은 세상이 소요스럽고 떠들석할수록 잠잠할 것을 권한다. 시37:7에,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떄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했다. 말과 언어가 공동체의 표시라면 침묵은 개인적인 고독의 표시이다.
 침묵에는 세 종류의 침묵이 있다. 말이 없는 무언의 침묵과 욕망과 탐심으로부터의 침묵, 그리고 불필요하고 방황하는 생각으로부터의 침묵이다. 침묵은 삶의 훌륭한 도우미이다. 우리네 생활은 일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사소하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투덜거리거나 실랑이함으로써 어두워지곤 한다. 범사가 항상 마음먹은대로 이루어지지 아니한 채 화가 나고 걱정 근심에 시달리기도 한다. 침묵은 그러한 상황들을 삶의 과정들로 이해하고 용납하고 받아 들여 온화하고 넉넉한 마음을 지니도록 해준다.
 침묵은 입에서 나오는 거친 말을 예방하여 후회할 말들을 하지 않도록 도와준다. 침묵은 다른 사람의 말을 더 잘 들어줄 수 있도록 큰 인내심을 길러 준다. 침묵은 세상과 나 사이에 일정한 간격을 둘 수 있도록 해주어 세상적 소요스러움이 내 안에 들어오는 것을 막아준다. 침묵은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는 것을 도와 주어 언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바로 기도하도록 해 준다. 무엇보다 침묵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해준다.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는데 그것을 들으려면 침묵 속에 세심한 귀가 필요하다.
 말을 잘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헌데 침묵은 더 좋은 일이다. 사실 지난 날들을 돌아볼때 입을 열어 다툼이 되느니 차라리 입을 닫고 침묵했던 것이 좋았던 때가 더욱 많았다. 잠언기자는 13:3에서,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 했다. 침묵은 금이며, 성숙된 인격의 한 표현이며 깊이있는 믿음의 내용이다.
 우리는 심신이 회복되고 새로워지고 재충천하기 위해서 때때로 분주한 삶과 복잡다단한 세상으로부터 한걸음 물러나 하나님 임재 안으로 들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그분 앞에서 자신의 모든 짐을 벗고 고요하게 있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침묵할때 우리 영혼은 그분의 지혜, 풍성, 영광으로 충만히 채워질 것이다.
<늑대 대신에 멧돼지>  5월14일
 <늑대 대신에 멧돼지> 
 밭농사를 지어서 생활하는 한적한 농촌 지역이 있었다. 그 지역은 주위에 산이 있어서 산짐승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특히 멧돼지와 늑대가 많았다. 늑대는 밤이면 마을 주변에 나타나기에 주민들은 어두워지면 외출을 삼가고 꼭 외출해야 하는 경우에는 여러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다녔다. 지역주민들 중 대부분 남자들이 총을 소지하고서 늑대를 보면 쏘아대곤 했다. 일정기간을 이렇게하니 많은 늑대들이 사로잡히거나 죽었고 살아남는 늑대들은 다른 곳으로 도망을 쳤다. 헌데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주민들이 아침에 일어나 보면 밭이 온통 파헤쳐 있고 농작물이 없어진 것이다. 추적해보니 멧돼지 짓 이었다. 늑대가 없어지자 멧돼지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난 것이다. 그놈들은 먹을 것이 부족해지자 인가로 내려와서 농작물을 파먹으며 밭을 헤쳐 놓았다. 마을 사람들은 인간과 늑대와의 관계만 생각했지 늑대와 맷돼지, 또 인간과 멧돼지의 관계는 생각치 못했던 것이다. 제발 사라졌으면 좋겠다 싶던 늑대가 사라졌을 때 직접적인 피해를 본 것은 사람이었다.
 인간을 위시 모든 동물, 식물, 자연, 환경등은 직,간접으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이 세상은 서로 연결된 섬이다. 바다가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보여도 바다 밑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의식하던 못하던 사람들은 서로 관계가 있다. 자신이 아는 사람은 물론 생면부지의 사람과도 연관이 있다. 우리들은 누군지도 모르는 농사꾼이 농사한 쌀로 밥을 짓고, 식빵 제조업자가 만든 빵을 먹는다.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기술자들이 만든 제품들을 사용하고 배움과 지식속에 파뭍혀 사는 전문가들이 만든 법과 질서에 따라 생활한다. 세상에는 불필요한 사람과 버려야 할 사람이 하나도 없다. 최고 설계사이시고 제조업자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을 필요에 따라 만드셨고, 필요한 자리에 두셨다. 하늘의 희미한 별, 이름없는 들풀, 오늘 낳았다가 내일 뽑힐 잡초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고 존재해야 할 이유들이 있다.
 살다보면 남보다 더 눈에 거슬리게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 헌데 내 눈에 거슬린다고 다 나쁜 것은 아니다. 외모와 행색이 초라해 보이는 사람이 있다. 헌데 그렇다고 그가 정말 가치없는 것은 아니다. 작은 것이라고 다 힘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주어진 특성과 가치와 장점이 있고 쓸모도 있기 마련이다. 물론 죄로 인해 인성이 파괴되고 행위가 과격해진 괴물같은 존재가 있다. 헌데 그도 주님 눈에는 사랑과 구원의 대상이다. 주님은 그를 위해서도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 그가 진심 회개하고 믿으면 의로워지고 주님자녀가 될수 있다. 파스칼의 언급처럼 어떤 사람이라도 천사와 악마의 중간존재이다.
 우리들은 사람을 외모로, 보이는 행위로, 나타나는 결과만으로 판단하며 정죄치 말아야 한다. 그가 당장 불필요한 사람, 무가치한 사람이다 여겨 내치지 말아야 한다. 죽을 죄를 짓지 않았다면, 영생과 진리를 완전 거절하는 죄인이 아니라면 말이다. 주님께서는 몹쓸 죄인들을 길이 참으시고 인내하셨다.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마음에 담으셨다. 12 제자들은 세상적 기준에서 볼때 쓸모있고 가치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주님은 그들을 안으시고 참으시고 훈련시키셔서 세계를 변화시키는 주역들로 만드셨다.
 나를 힘들게 한다고 누군가를 내친다면 그를 대신해 또 다른 이가 나를 힘겹게 할 것이고 피해는 나 자신이 볼 것이다. 참된 믿음과 인품과 지혜는 예수님처럼 모든 이들과 따스한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이다. 직접 보이지 않거나 느껴지지 않은 관계조차 소중히 여기는 자에게는 주님이 허락하신 여러가지 소득들과 감사와 평안이 넘칠 것이다.
<분노의 다스림>  5월7일
​ <분노의 다스림> 
​
알렉산더 대왕은 ‘나는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다’고 할만큼 많은 나라들을 정복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서 큰 고통을 겪은 일이 있었다. 그에게는 어릴적부터 함께 자란 막역한 친구가 있었다. 클레토스라는 그 친구는 알렉산더 대제의 휘하에서 장군으로 있었다. 어느날 이 친구가 술에 크게 취해 군졸들 앞에서 대제를 모욕하는 발언을 했다. 순간적으로 알렉산더는 옆에 있던 병사의 창을 빼앗아서 클레토스에게 던졌다. 물론 죽이려는 의도는 아니었는데 불행하게도 그 창은 친구를 죽이고 말았다. 알렉산더는 크게 후회했다. 후에 그는 최책감으로 자신의 목숨을 끊으려 했지만 주위 사람들의 만류로 실패했다. 그는 전 세계를 정복했지만 자기의 분노를 다스리는 일에는 실패했다.
 분노는 '
자신의 욕구 실현이 저지당하거나 어떤 일을 강요당했을 때 이에 저항하기 위해 생기는 부정적인 정서상태'를 뜻한다. 누군가로부터 부당하게 무시당하거나 자신의 바람이 좌절되거나, 손해를 강요당하거나 심신의 위협을 당할때 분노가 발생한다. 분노는 흔한 감정이지만 원초적이고 강렬하기에 이를 통제하거나 다스리기가 쉽지 않다. 분노를  화  또는 성이라고도 한다.
 어떻게 
분노를 다스릴까? 정신의학에서는 분노를 절제하는 방법들을 제시한다. 먼저 분노를 촉발시킨 자리를 피하는 것이다. 또 분노가 치밀 때는 또박또박 숫자를 세어 보는 것이다. 숫자 세는 동안 분노가 가라 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묵주같은 물건을 만지면서 참기를 시도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종교적 의미가 담긴 물건을 접하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또 탄수화물을 섭취하는 것이다. 탄수화물에는 흥분을 가라앉히는 성분이 있다. 또한  운동으로 분노를 몰아내는 것이다. 땀 흘리며 운동에 열중하는 동안 노가 진정되게 된다. 
 성경도 
성냄을 다스리는 것에 대한 풍부한 교훈과 지침을 제시한다. 먼저 분노케 하는 상황과 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다. 주님이 모든 것을 아시고 상황을 통제해 주신다. 또한 화 내기를 더디 하는 것을 훈련하고 배우는 것이다. 화 내는 것은 배우지 않더라도 되지만 화 안내는 것은 훈련과 연습을 필요로 한다. 감정절제는 경건연습의 하나이다. 또 화가 치밀 때 생각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감정은 마음깊은 곳의 생각을 바탕으로 한다. 생각을 고치면 감정대처가 용이해 진다. 또한 잘못된 신앙을 고백하고 회개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분노는 하나님을 좇는 믿음이 아니라 내 방식의 믿음이다.  그리고 성령충만을 받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인생과 믿음을 주도하신다. 그분께 철저히 순종하면 아름다운 인품의 열매들을 맺게 된다.
​ 기독자들에게 
요구되는 두 가지는 바른 믿음과 바른 인격이다. 우리들은 기도와 말씀, 훈련과 회개, 성령의 도우심으로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고 불평을 삼가하는 성숙한 자들이 되어야겠다. 설령 화를 내더라도 죄를 짓지 말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아야겠다. 성 냄을 다스릴줄 알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 인생절반의 성공을 거둔 셈이다.
목회서신 2021년 4월
Picture
<주의 일>  4월30일
 어느 마을에 홍수가 났다. 집에 물이 들어오고 온 동네가 물에 가득하여 마을사람들은 옥상으로 피신하여 구조를 기다렸다. 마침내 구조선이 왔다. 구조원이 “고지대로 옮겨 주겠으니 배에 어서 타시오”라고 권했다. 헌데 한 사람이 “아니오, 나는 하나님을 믿는데 그분이 나를 구출해 주실 것입니다. 나는 여기서 기다리겠소” 라며 사양했다. 물이 불어나서 옥상에서도 허리에까지 올라왔을 때, 동력선이 와서 고지대에 옮겨 주겠다고 했으나 그는 전과 같이 말하며 사양했다. 물이 목에까지 잠기게 되었을 때 헬리콥터가 와서 밧줄을 내려 주면서 '잡으라 했지만 이번에도 그는 “고맙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구출해 주실 것입니다”라면서 거절했다. 결국 그 사람은 주님앞으로 갔다. 그는 주님께 따졌다. "주님! 어찌 홍수에서 저를 구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십니까?" 주님이 말씀 하시길 “나는 너에게 구조선을 세 번이나 보냈는데 그떄마다 네가 거절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실 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먹고 놀면서 편하게만 살도록 만들지 않으셨다. 부지런히 일하며 먹고 살도록 하셨다. 헌데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가만히 있어도 사업과 장사가 잘 되어 이내 부자 되고, 노력을 안해도 공부와 고시도 합격하는 것으로 오해한다. 물론 주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지만 무위도식하거나 해야 할 일에 대해서 게으르거나 태만한 것도 축복하시지 않는다. 예수님을 믿는 자라면 기도하고 그분을 의지하고 더 힘을 얻어서 열심히 노력하고 수고하고 뛰어 다녀야 한다. 주님은 거룩하고 깨끗한 자, 부지런하고 근면한 자를 사용하신다.
 헌데 
열심히 일한다고 기독자들이 모든 것을 다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이 할수 있는 일이 있고 못하는 일이 있다. 해야 할 일이 있고 해서는 안되는 일도 있다. 특히 주의 일에는 그 범위가 정해져 있다. 성도와 교회는 주님이 시키시고 위탁하신 일만을 해야 한다. 반면에 주님이 시키시지 않는 일들은 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내의 다툼과 갈등은 주님이 할당하시지 않는 일에 몰두할때 발생하곤 한다. 예수님은 공생애동안 크게 3 가지 일들을 하셨고 그것들을 교회에 위임하셨다.마 4:23에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벡성 중의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시니” 했다. 예수님은 말씀대로 살도록 진리를 가르치셨고, 천국복음을 전도하셨고, 상처받고 아픈 영혼들을 치유하셨다. 즉 주님은 교육과 전도와 치유사역을 하셨고 부활 승천하시면서 이들을 교회와 성도에게 위탁하셨다. 교회는 주의 일을 실행하는 사명공동체이고 성도들은 그것의 지체들이다.
 교회가 편안과
 안전을 이유로, 능력과 지혜 부족을 이유로 일 안하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아무 것도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배울 수 없고 무엇도 얻을 수 없다. 활동및 움직임이 없거나 빈약하면 교회부흥이 없고 그런 교회는 결국 병들게 된다. 또한 성도가 주판알 두드리며 생산성, 효율성만 따지면 주의 일 못한다. 주님 계산법은 세상기준과 사믓 다르다. 주님이 시키신 일을 기도로 준비하고 믿음 안에서 예수이름으로 실행하면 무언가 일이 일어난다. 주의 일에는 사람들 기대보다 더욱 크고 신비롭고 폭발적인 열매가 맺어진다. 초대교회는 가진 것이 없었지만 예수 이름으로 크고 위대한 사역들을 해냈다.
 인생 여정에
 가장 행복하고 가치있는 것은 주님 일에 열성다하는 것이다. 주님은 열성으로 사명을 감당한 교회와 지체들을 활력있고 견고히 세워 가실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꿈>  4월27일
 세상의 모든 생물체들 중에 인간만 꿈을 꾸며 사는 존재이다. 사람은 공기없이 대략 8분, 물없이 3일, 음식없이 40일을 지낼 수 있어도 꿈없이는 한순간도 지낼 수 없다. 꿈이 사라지면 생의 의미도 사라진다. 학창 시절에 선생님들로부터 큰 비젼과 꿈을 가지라는 말씀을 수없이 듣곤 했다. 헌데 꿈은 젊은 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나이들고 육체의 기력이 쇠해져가는 자들에게도 꿈이 있다. 나는 요즘 젊은 후배목사들과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진취적이며 도적적인 꿈과 설계에 많은 울림을 받는데 실은 나에게도 기도하면서 실현되기를 바라는 꿈이 있다. 물론 우리 교회의 미래와 지체들의 행복에 대한 것이 꿈의 주된 내용이다. 시편 71 편은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시인이 육체적으로 쇠약하고 병들고 게다가 대적들의 위협이 심각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절대적인 소망을 두고 쓴 시이다. 시인은 14절에서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찬송하리이다’ 고백한다. 나이, 육체적 상황, 주변 방해자들이 자신의 꿈을 막거나 방해 못하게 하리라는 선언이다.
 우리의 꿈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신이 스스로 꾸는 꿈과 다른 하나는 주님께서 꾸게 하시는 꿈이다. 세상이 말하는 대부분의 꿈은 스스로의 꿈이다. 자신의 의지 재능 지혜로 남이 꿈꾸지 못할 것을 생각하고 설계하고 도모하고 실행해 가는 것이다. 그 과정중에 역경이 있고 장애물이 있더라도 이에 굴하지 않고 할수 있다는 자기확신과 소신을 지니고 굳건히 꿈을 실행해 가는 것이다. 반면에 성경에서 말하는 꿈은 하나님이 주시는 꿈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기쁘신 뜻 안에서 인간의 연약함, 의지의 부족함에도 위대한 꿈을 주신다. 스스로가 꾸는 꿈들은 종내는 개인 욕망으로 변한다. 자신의 행복과 성공과 업적에 촛점이 맟추어진다. 반면에 주님이 꿈꾸게 하시면 그것은 주님영광과 모두의 안녕과 번영을 위한 것이 된다. 따라서 주님이 주시는 꿈은 지극히  아름답고 가치있는 비젼이 된다. 이 비젼은 믿음 길의 안내자이며 인생과 삶의 승리의 비결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비젼을 품었던 사람들이 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가나안에 대한 환상과 비젼을 받고 정든 고향과 아비 집을 떠났고, 모세는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라는 비젼을 품고 80 세에 헌신했다. 바울은 이방세계를 복음화시키라는 꿈을 갖고 평생을 충성했다.
 보통사람, 평범한
 사람이어도 주님이 허락하신 꿈과 비젼을 품으면 주변에 감화력을 끼치고 변화시키는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주님이 주시는 꿈을 갖고 기도하며 헌신하면 정한 때에 그것이  현실화된다. 주님은 우리로 선한 꿈을 갖게 하시며 또한 그것을 능히 이루어 가신다.
 경마 대회에서 우승한 말에 대해 누군가가 설명하길 ‘그 말은 혈통이 좋은 순종 말의 후예로 그 안에 우승마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말했다. 외견상 연약하고 뭔가 부족해 보여도 우리 안에는 예수님의 십자자 보혈이 흐르고 있다. 우리 안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각양 좋은 선물과 보화가 잔뜩 담겨 있다. 믿는 우리들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씨앗이다. 우리 안에 담긴 이런 위대한 요소들로 감사드리며 이들이 삶속에서 실체화 될 것이다는 꿈을 갖고 그것을 이루어가길 기원한다.
 
<즉시 예쓰>  4월23일
 엘리사 선지자는 성경에 나타난 흥미있는 사람들 가운데 한 분이다. 그는 이스라엘역사의 극심한 시기에 살았다. 그가 살던 시대는 소수에 편중된 부, 대다수의 극심한 가난, 극단적 기후,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극심한 불충성의 시대였다. 엘리사는 네 명의 왕들이 통치하는 동안 선지자로서 50년 이상을 섬겼다. 그는 기적의 선지자라 불릴만큼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장되어 많은 기적들을 행했는데 이는 훗날 예수님의 사역과 임무를 미리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엘리사라는 이름에서도 예수님을 나타낸다. 엘리사와 예수라는 두 이름은 모두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엘리사는 당시 선지자들이 다녔던 선지학교 출신이 아니었다. 지금식으로 말하면 정규 신학전문 학원을 다니지 않은 셈이다. 또한 엘리사는 다른 면에서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정치,교육, 경제계에서 두드러진 존재가 아니다. 그는 그저 보통사람이며 평범한 농부였다.
 이런 엘리사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장면은 참으로 극적이다. 어느날 그가 밭을 갈고 있을때 당대 유명한 선지자인 엘리야가 냄새나는 자신의 겉옷을 엘리사 위에 던짐으로 하나님을 위한 엘리사의 사역이 시작되었다. 엘리야의 겉옷이 자신의 몸에 닿는 순간 엘리사는 즉각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역자로 부르셨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아주 확신있게 반응했다. 왕상 19:19-20에 이 이야기를 이렇게 기록한다.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그가 열두 겨리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두째 겨릿소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그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컨대 나를 내 부모와 입맟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엘리사의 이런 반응을 인간적 상식으로 판단하면 조금 성급하다 여길 수도 있다.  만약 저와 여러분이 그 밭에 있고 해야 할 일을 부지런히 행하고 있었을때 주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다면 한참을 생각해 보고, 부르심의 열매들을 따져보고, 그 결정의 장단점들도 헤아려 보고 또한 선생님이 정말 신뢰하고 따라가도 좋을 분인가를 숙고하며 따져 볼것이다. 어쩌면 최종 결심을 하기까지 시간이 좀 더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헌데 엘리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엘리사의 반응은 즉시 예스였고 열정적인 굿바이였다. 그는 앞으로 집에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서 쟁기질을 멈추고 큰 연회를 열었다. 자신의 연장들을 태우고 황소를 잡으며 엘리사는 이 부르심에서 다시 돌이키지 않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는 쟁기를 들고 뒤돌아보는 자가 아니었다. 사역자로의 부르심에 대해 짥고 굵게 예스라 했고 이를 실천으로 옮겼다. 막 1장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예수님은 물고기를 잡고 그물을 씻고 있는 시몬, 안드레, 야고보, 요한을 만나시고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셨다. 이때 그들의 대답은 엘리사와 같았다. 마가는 그들이 ‘곧’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랐다 증언한다.
 세상사는 참 불확실하다. 아무리 계획을 잘 세워도 열매및 결과는 불확실하다. 이런 세상이치를 내세워 불확실하며 결과가 두렵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뜻과 인도를 따를 기회를 놓친다면 언제 우리들은 순종을 배우게 될까?  주님이 말씀하시고 권하시고 명하시면, 즉시 예스로 응답해드리자. 온전히 철저히 순종할때 비로서 믿음의 눈이 열리고 범사에 믿음대로 될 것이다.
<예수님 삶의 패턴>  4월16일
 나는 기회되면 아침에 동네 호숫가를 걷는다. 타원형으로 조성되어 둘레 길이가 2마일로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 35분에서 40분 걸리는 호수이다. 헌데 나는 걸을 때마다 늘 시계방향 반대쪽으로만 걷는다. 쌍방 통행임에도 말이다. 이는 나의 걷기 패턴이다. 우리들 삶에는 여러분야에서 패턴이 작동되고 있는데 누구에게나 그 사람만의 고유한 패턴이 있다. 패턴을 사전적으로 정의하면 ‘일정한 형태 유형 양식등이 주기를 갖고 삶에 규칙적 반복적으로 배열되는 것’을 가리킨다. 고유하게 형성된 패턴에 따라 사람들은 생각하고 계획하고 말하고 느끼고 행동하곤 한다. 즉 패턴이란 일종의 규칙이며 신호이며 양식으로 어떤 식으로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삶을 형성, 조직하기도 한다. 패턴은 사람의 거의 모든 것이고 시작과 끝이다. 헌데 습관에 좋는 숩관이 있는가 하면 나쁜 습관이 잇는 것처럼 삶의 패턴에도 바람직하고 좋은 패턴이 있고 반면에 버려야 할 좋지 않은 패턴도 있다.
 예수님에게도 삶의
 패턴이 있었다. 주님은 무언가를 계획하시거나 사역하실 때 소위 성령의 감동하심이라는 이름하에 즉흥적이거나, 순간순간 감정내키시는대로 행하시지 아니하셨다. 주님은 기도하며 오랫동안 구성되고 실체화된 패턴에 따라 행하셨다. 물론 예수님의 생활 패턴은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합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지상에서의 공생애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간을 광야에서 홀로 보내셨다. 그 기사가 마태복음 4장 1-11절에 기록되는데 1절에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에 가사” 했다. 그곳 광야에 홀로 가신 것이다. 또 예수님은 십자가 형을 바로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도 홀로였다. 물론 기도하러 가실 때는 3명의 핵심 제자들과 동행하셨지만 이후 그들도 물리치시고 자신의 아버지 하나님과 고요히 마주 하셨다. 마 26:36에, “예수꼐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기록한다.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과 끝은 그분의 사역의 특징과 방향을 뚜렷이 보여 주는데 그것은 침묵과 고독이었다. 즉 홀로됨과 침묵은 예수님의 삶의 패턴이었다.
​ 주님께서는 사역의
 시작과 끝만 홀로 였을까? 예수님은 제자들을 택하시기 전에 산에서 홀로 온 밤을 지새우셨다. 세례 요한이 목 잘리고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예수님은 배로 한적한 곳으로 홀로 물러나셨다. 여러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떠올라 사람들을 대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후 5 천명을 먹이신 기적을 행하신 후에도 예수님은 무리를 해산시키시고 홀로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셨다. 예수님의 삶과 사역의 패턴은 홀로됨 속에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함을 누리는 것이었다.
 바람직한 삶의 패턴으로 인생을 규모있고 의미있고 아름답게 보내는 것 참 중요하다.  외부 상황이 열악하고 살기 힘들어도 삶의 원칙과 규칙을 지키며 제대로 사는 사람을 보면 감동이 일고 울림이 일어난다. 우리들에게 혹 좋지않은 습관이 있다면 이를 삶에서 추방해야 할 것이며 정말 좋은 것임에도 아직 형성되지 못한 삶의 패턴이 있다면 이를 반드시 실행하며 세워가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만나기 위해 정기적으로 고독과 홀로됨의 상황으로 물러 나셨던 것처럼 우리들도 그래야 한다. 예수님에게 침묵과 고독이 필요하셨다면 우리는 더욱 이 훈련을 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삶의 패턴을 우리들은 답습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 닳은 그분 자녀이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과정>  4월13일
 윌리엄 보르텐은 시카고 갑부의 아들로 태어나 예일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였는데 중국을 여행하던 중 회족의 비참한 상황을 목도하고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후 회사를 물려받으라는 아버지요청을 거절하고 재산을 선교단체에 기증한채 선교지를 향해 떠났다. 중도에 언어를 배우려고 카이로에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풍토병에 걸려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토록 소원했던 선교지를 밟아 보지도 못한채.. 헌데 그의 유품에 마지막 말이 새겨져 있었다. “No Regret” 그토록 염원하던 선교열매가 없었도, 아니 시작조차 못했어도 그의 삶은 실패가 아니었다. 이슬람 족에 대한 선교열정, 하나님을 향한 넘치는 사랑으로 후회없는 삶을 살았고 훗날 그 열매가 맺어졌기 때문이다.
 오늘날 모든
 분야에 결과주의가 팽배해 있다. 결과주의에서는 보이는 현실과 나타나는 것을 더욱 중요시하며 결과물로 성공을 판단하고 행복을 가늠한다. 결과를 보면서 그 사람을 크고 위대한 사람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결과지향의 경우들이 더욱 많아지면서 과정을 아주 작은 일을 여기며 아예 무시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꿩 잡는 것이 매라는 속담이 있다. 총이 발명되지 않았을 때 꿩을 잡는 데는 매의 힘이 컸다.  매를 잘 다루는 사냥꾼이라야 꿩을 많이 잡아 수획을 올렸다. 해서 꿩을 잡는 것이 매라는 말이 생겨났다. 헌데 이 속담에서 매의 뜻은 상당히 넓은 외연을 가진다. 무엇이든, 어떻게 하여 꿩을 잡았으면, 그것이 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무슨 수단과 방법을 쓰든 꿩만 잡으면 졸지에 매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이 속담의 풀이다. 과정이 무시되면 정당한 방법 외에 악하고 나쁜 방법도 이용되기도 한다.
 헌데 보이는 결과 못지않게 동기와 과정도 소중하다. 아니 과정이 더욱 중요할런지 모른다. 감옥에 십년 있으면 바늘로 파옥한다는 말이 있다. 감옥살이 십년이면 바늘을 가지고도 옥을 깨쳐 뛰쳐 나오게 된다는 뜻으로 사람이 역경에 처하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오래 애쓰는 과정에서는 사소한 물건을 가지고도 큰 일을 성사시킬 수 있음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과정의 중요성을 잘 나타내는 말이다. 쇼펜하우워는 모든 진실은 반드시 세 가지 과정들을 거친다 말한다. ‘첫째, 조롱당한다. 둘째, 심한 반대에 무딪힌다. 세째, 자명한 진실로 받아들여진다’  이다. 이는 과정들이 있기에 진실도 규명된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결과는
 과정들의 소산물이다. 따라서 과정이 잘못되면 결과도 잘못되기 십상이다. 생과 삶의 열매는 주님이 맺어 주시지만 그것은 심고 물주고 가꾸는 과정들을 통해 주어진다. 과정은 전적으로 우리의 몫이다. 우리가 눈물로 씨를 뿌리면 주님은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하신다. 눈에 보이는 결과물에만 매달리거나 함몰되지 말고 주께서 위탁하신 일들을 사명으로 행하면서 하루하루 최선다해야 한다. 세상 것들은 정함이 없고 수시로 흔들리고 변한다. 이런 무지개같은 허황된 것에 매달려 버둥거릴 것이 아니라 건실한 땅에 두발을 딛고 매 삶의 과정들을 치열하게 후회없이 살아야 한다.
 우리들은 지금
 과정 도중에 있다. 이미 이룬 게 아니라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지금 달려간다는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들도 이루어가는 과정중에 있다. '오늘의 나'는 '지난 날들의 나의 총체'이며, '내일의 내 모습'은 '오늘의 모습들의 합체'로 드러날 것이다. 내일의 행복과 풍요함을 원한다면 오늘 피와 땀과 눈물을 쏱아야 한다. 최선다한 사람은 그 모습 그대로 아름답기 그지없다. 하루 책임을 다하고 수평선 너머로 지는 노을의 아름다움처럼요.
<안디옥교회 같은 교회>  4월9일
 1세기경  세계 3대 도시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이었다. 이들중 안디옥은 헬라문화의 중심지이자 동서양 문화가 만나 융합하는 요충지이다. 스데반 순교시 예루살렘교회에 박해가 일어났고 성도들은 뿔뿔히 흩어져서 베니게와 구브로, 안디옥 등지에 복음을 전하는데 그때 안디옥 교회가 세워졌다. 안디옥교회는 최초의 이방인 교회이며, 지역 사람로부터 최초로 크리스쳔으로 일컬음받은 교회였다.
 기독교 2천년 역사상 수많은 교회들이 이 땅에 세워지고 번영하고 사라지기도 했다. 그들 중에는 빛과 소금기능을 감당하며 영적, 시대적 소명을 다한 교회들이 있는가 하면 기능과 역활을 제대로 못한채 금촛대가 옮겨졌던 교회들도 상당수이다. 그 모든 교회들 중에서 안디옥교회는 하나님이 영광받으시고 세상사람들도 인정한 참 아름다운 교회, 건강한 교회였다. 오늘날의 교회들이 죄악이 가득한 시대에 하나님께서 신뢰하시고 인정하시는 교회다운 교회들로 존재했으면 좋겠다. 
 주님으로부터 인정받으려면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할까? 안디옥 교회에서 그 해답을 찾아보자. 무엇보다 교회 구성원들간 벽과 차별이 없어야 한다. 안디옥 교회에는 5명의 지도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민족이 다르고 지식, 위치, 재산등이 달랐지만 주 안에서 한팀이 되어 교회를 잘 인도하고 부흥시켰다. 안디옥교회는 구성원간 차별과 벽이 없는 평안한 교회였다. 교회가 문턱이 높다던지, 특정부류만 모인다면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아니다. 예수님은 모두를 차별없이 사랑하셨고 몸으로 안으셨다. 교회에는 세상기준과 잣대에 의한 벽이 없어야 한다. 벽이 없는 교회가 되려면 한마음의식, 공동목표의식, 지체의식을 지녀야 한다. 또한 영성이 있어야 한다. 영성이란 예수님을 닮은 거룩함을 뜻하는데 이는 말씀과 기도로 이루어진다. 안디옥교회에는 말씀이 왕성했고 기도가 풍성했다. 즉 영성이 있는 교회였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교회가 있는데 영성이 있는 교회와 없는 교회이다. 주님께서는 영성이 깊은 교회를 든든히 세우시고 견고히 유지하시고 꾸준히 부흥시키신다. 세상 사람들도 그런 교회를 주시하고 기대한다. 그리고 전도의 사명도 감당해야 한다. 안디옥교회는 성령의 지시를 따라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세워 파송했고 교회는 배후에서 그들을 기도와 물질로 힘을 다해 도왔다. 안디옥교회는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 명을 실제 이행하는 사명자 교회였다. 기독자들에게는 두 가지 큰 사명이 있는데 하나는 문화적 사명으로 삶의 현장을 잘 관리하고 다스리어 밝고 복되게 건설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사랑 안에서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복음전도는 교회의 절대사명이다. 인생의 행복은 부자되고 권세잡고 이름을 내는데 있지 않다.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하며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하는가를 깨닫고 사는데 있다. 믿음생활의 가치와 행복은 전도를 통해 영혼을 구함에 있다. 전도사명을 감당할때 개인적 믿음성장은 물론 교회도 은혜롭게 성장할 것이다.
 우리교회는 
어떤 교회이어야 할까? 인적자원, 재정자원이 풍요롭고 프로그램들이 활발한 교회이어야 할까? 물론 주님이 그런 자원들을 허락해 주시면 감사함으로 잘 활용해야 한다. 헌데 주님이 더욱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교회는 안디옥교회처럼 영적자원을 갗춘 교회이다. 즉 벽과 차별이 없어 모든 이들이 즐겨 찾는 평안한 교회, 말씀과 기도의 생명이 넘치는 교회, 복음의 말씀 전함을 사명으로 삼는 교회이다. 모든 교회들이 1세기경의 안디옥교회처럼 아름답고 건강한 교회가 되길 소망하며 기도한다.
<신뢰받는 사람>  4월6일
 공기가 청명하고 상쾌하며, 꽃들의 향내음이 잔잔히 퍼지는 봄 날의 아침이다. 선물로 주어진 또 하루를 영육간 생기있고 행복하게 열어가시길 바란다. 오늘은 ‘신뢰받는 사람’ 이란 주제로 말씀드린다. 1990년대 초 우리나라 한 T.V.광고에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예요”라는 광고가 유행했다. 그 광고에 출연했던 여배우는 큰 인기를 얻고 국민적 여배우로 자리매김 했다. 헌데 인생은 남들의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결국은 스스로 하기 나름이다. 자신이 한 만큼 열매맺고 자신이 살아가는 내용만큼 주변 사람들의 평가를 받는다. 세상은 일견 남에 대해 무심한 것 같아도 볼 것은 보고 판단한다. 범사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면 지인들로부터 그만큼 존경과 신뢰를 받을 것이고 거짓과 불성실로 일관하면 비난과 손가락질을 당할 것이다. 뿌리고 심는 대로 거두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원리이다.
 창 14장에는
 아브라함의 싸움 기사가 나온다. 그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도착했던 당시 그곳에는 작은 나라들이 여럿 있었다. 어느날 그곳 나라들 왕들이 서로 싸우는 와중에 소돔에 거주하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가족이 포로로 잡혀갔다. 이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은 집에서 훈련시킨 개인 군사들을 신속히 동원하여 조카 일행을 구출해 돌아왔다. 그때 소동 왕과 살렘 왕이 돌아오는 그를 영접했다. 아브라함은 양쪽 군대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았고 단지 조카를 구하기 위해 군사를 동원했을 뿐인데 왕들의 뜨거운 영접을 받았다는 것은 그의 삶과 행동양식에 대한 주변사람들의 좋은 평가를 뜻한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주민들에게 그저 평범한 사람, 보통 사람이었다. 그는 왕, 귀족이 아니며 그곳 본토박이도 아니다. 그는 외지에서 유입된 이방인이다. 그리고 지금 싸우기 위해 나갔다 오는 것도 연합군을 위한 공적인 일이 아니다. 헌데 국가들의 존망이 걸린 전쟁시에 아브라함이 개인적 일로 군사를 동원해도 왕들과 주민들중 그 누구도 그것을 문제삼는 이가 없고 오히려 그를 영접했다. 이는 아브라함이 믿음과 인품에 있서 그만큼 존경받고 인정을 받았다는 증거이다. 간혹 실수와 허물이 있었지만 그것들을 덮을 만한 신앙적, 인격적 장점들과 요소들이 그에게 참 많았다. 아브라함은 우루 지역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복의 근원으로 부름받고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래로  주님의 부르심에 합한 삶을 살면서 그 땅 주민들에게 존경과 신뢰의 대상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의 신뢰도가 많이 추락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기독자들을 예전처럼 호의적으로 보지 않는다. 하면 우리들은 식구들, 교우들, 주위사람들에게 과연 존경과 신뢰를 받고 있는지.. 만약 주위 사람들에게 크게 신뢰받고 있다면 이는 믿음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믿음생활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과도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참된 신앙생활을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과 고통받고 환난중에 있는 이웃을 돌보고 섬기는 삶으로 규정했다. 하나님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 만큼 위탁된 사람들에게도 최선 다하는 것이 참된 믿음이다.
 사회적 존재로서
 우리들은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물론 새로운 사람들도 만나고 대할 것이다. 그가 누구이던 주 안에서 친절히 대하며 사랑하며 섬기며 보호하며 보살펴야 한다. 하면 자신의 행위만큼 그들로부터 신뢰받고 영접과 환영을 받을 것이다. 남들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을때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 영광이 드러나게 된다. 오늘도 대하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가슴에 품고 예수님제자의 삶을 사시길 기원한다.
사순절 묵상(2)  2021년
Picture
<가상칠언>  4월2일
 오늘은 사순절 39 일째 날로 ‘가상칠언’이란 주제로  말씀드린다. 함께 나눌 본문은 누가 23장 44-46절이다. 다 같이 읽어보자.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 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예수꼐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후 숨지시니라” 아멘. 오늘 부를 찬송은 151장, “만 왕의 왕 내 주께서”이다. 1절 함께 부르겠다.
 예수님께서 온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로서 고난당하고 죽기 위해 보내신 마지막 주간을 고난(수난)주간이라고 하며 이 주간의 가장 극적인 사건이 주님의 십자가에 못박히심이다. 예수님은 빌라도에 의해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리고 유대인 시간으로 제 9시, 즉 오후 3시에 운명하셨다. 십자가 처형은 빨리 죽지 않고 모든 장기가 뒤틀리고 파괴되는 무시한 고통을 겪으며 서서히 죽기에 가장 잔인하고 끔찍한 처형수단이다. 당시 십자가 형은 잔악한 중범자들에게 집행되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고통스러운 6시간 동안에 일곱마디 말씀을 하셨는데 이를 가상 칠언이라 한다. 예수님 말씀과 강화는 평소 때도 모두에게 귀하고 감동적이며 영혼을 움직이는 감화력이 있지만 십자가에서의 말씀은 죽음 앞에서 하신 말씀이기에 더욱 의미심장한 깊이와 내용과 무게가 있고 비장감마저 서려 있다. 또 말씀하신 순서에도 귀한 뜻이 있다. 4 복음서에 기록된 것을  순서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말씀은 눅23장 34절에 기록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이다. 이것은 자신을 반대하고 죽이며 하나님 영광을 가리는 모든 죄인들을 향한 용서의 기도이다. 둘째 말씀은 눅23장 43절에 기록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이다. 이는 당신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중 회개한 강도에게 허락된 낙원에의 약속이다. 세째 말씀은 요 19장26, 27절에 기록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보라 네 어머니라”이다. 이는 아들로서의 육신의 어머니에 대한 효도로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한 말이다. 넷째 말씀은 마 27장 46절에 기록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이다. 이는 인류구원을 위해 자신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영적고민을 토로함이다. 다섯째 말씀은 요 19장28절에 기록된 “내가 목마르다”이다. 이는 영적인 고통은 물론 육체적 고통까지 당한다는 뜻이다. 여섯째 말씀은 요 19장 30절에 기록된 “다 이루었다”이다. 이는 하나도 부족함없이 인류를 구원하는 사역을 완성했다는 승리의 선언이다. 마지막 말씀은 눅 23장46절에 기록된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이다. 이는 하나님 아버지를 절대 신뢰하는 최후의 신앙고백이다.
 주님께서는 
일곱 마디 말씀 중 처음 세 마디는 9시부터 12시 사이에 하셨고, 갑자기 온 땅이 해를 잃고 어두워졌던 12시부터 3시까지 세시간 동안은 단 한 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시다가 오후 3시에 나머지 네 마디 말씀을 연거푸 하시고 세상을 떠나셨다.
 오늘은 2
천년전 갈보리 언덕에서 주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날이다. 고난주간 동안의 주님의 교훈들및 사역들을 헤아리며 또한 십자가 위에서의 그분의 유언의 말씀들을 깊이 묵상하면서 우리들의 신앙자세를 새롭게 세워 갔으면 한다.
<거룩한 헌금>  3월30일
 고난주간 화요일에 예수님께서는 대부분의 시간을 강화, 교훈하시고 토론하시는데 사용하셨다. 당신의 권위, 가이샤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 부활, 당신의 존재됨등에 대해서 반대자들과 논쟁하셨고, 포도원농부를 주제로 강화하셨다.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으며 예루살렘 성전파괴를 예언하셨다. 주님은 ‘모든 계명들 중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라고 답하셨다. 주님은 또한 성전구역중 여인의 뜰에 비치된 헌금함에 헌금하는 사람들을 지켜보시면서 한 과부에 대해 말씀하셨다.
 오늘은 사순절
 36 일째 날로 ‘ 거룩한 헌금’이란 주제로  말씀드린다. 함께 나눌 본문은 막 12장 41-44절이다. 다 같이 읽어보자.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렙 곧 한 고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아멘. 오늘 부를 찬송은 144장, “예수 나를 위하여”이다. 1,2절을 함께 부르겠다.
 본문의 시기는
 유월절이었기에 전국각처로부터 많은 예배자들이 모였고 헌금드리는 자들도 많았다. 헌금하는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신 예수님은 두 렙돈을 드린 과부를 칭찬하시며 그녀야말로 누구보다도 더 많은 헌금을 드렸다 하셨다. 당시 장정의 하루 품삯은 한 데나리온이다. 한 렙돈은 데나리온의 1/64에 해당한다. 두 렙돈은 1/32 데나리온인 셈이다. 하루 품삯을 10 만원으로 계산하면 두 렙돈은 3천원 정도이다. 이 금액이 과부의 헌금액수로 요즘 물가시세로 따지면 참 적은 금액이다. 헌데 주님께서 그 과부를 칭찬하셨다. 헌금에 대한 예수님 평가는 액수가 아니라 드리는 자의 정성이기 떄문이다. 다른 사람의 헌금은 자신이 가진 것의 일부였지만 이 과부의 헌금은 생활비 전부였다. 과부는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헌금을 드렸다. 드린 후 어찌 될까 염려치 않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렸다. 해서 그녀의 헌금은 액수를 떠나서 부자들보다도 더욱 풍성하고 넘쳤으며 실로 주님이 받으실만한 거룩한 헌금이었다. 예수님은 과부의 적은 헌금을 높이 평가하심으로 신앙의 핵심이 외적 풍요함과 화려한 양에 있는게 아니라 진실한 마음중심과 순전한 본질에 있음을 일깨워 주셨다. 
 이 과부에게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을 만한게 또 한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그 헌금이 구제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성전 뜰 안에는 13개의 헌금함이 비치돼 있었는데 이들 헌금함에 모아진 헌금은 모두 가난하고 불우한 자들을 위해 사용되어졌다. 그때 도움을 필요로 했던 비천한 자들의 명단에 고아와 과부는 제일 순위였다. 그들은 사회구조상 경제력이 없는 빈곤층 계층이었고 해서 나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대상들이었다. 그 과부 역시 구제대상 우선순위이다. 그런데도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헌금한 것은 자신보다 더 불우한 이웃을 배려하기 위해서이고, 가난한 자를 도우라는 성경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이다.
 신앙생활은 성경에
 기록된 주님 명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자신의 상황과 주변 환경을 지나치게 따지고 의식하면 누군가를 도울 수 없게 된다. 헌데 주님 명을 믿음으로 받들면 어렵고 힘든 일들도 주저없이 행할 수 있게 된다. 이 고난주간에 과부의 거룩한 헌금을 통해 외식주의의 허상을 꺠닫고 진실하고 사랑이 넘치는 배려자의 마음을 회복하시길 기원한다.
<희망>  3월26일
 오늘은 사순절 33 일째 날로 ‘ 희망 ’이란 주제로 말씀드린다. 함께 나눌 본문은 에스겔 37장 1-3절까지이다. 다 같이 읽어보자.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서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아멘 오늘 부를 찬송은 183장, “빈들에 마른 풀같이”이다. 1 절을 함께 부르겠다.
 평생을 전도와
 빈민구제에 헌신한 구세군 창설자 윌리엄 부스에게 한 신문기자가  ‘미래에 기독교에 닥쳐올 가장 큰 위험은 무엇이겠습니까?” 라고 물었다. 당시 83세의 나이로 임종을 앞두고 있던 윌리엄은 조용한 음성으로 미래 기독교의 위기를 두 가지로 진단했다. ‘하나는 성령의 역사가 없는 형식적 기독교로 변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가 없는 세속적 교회로 전락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오늘날 교회의 실상을 헤아려보면서 그의 예언이 빗나가지 않았음을 실감한다. 성령과 말씀의 역사가 줄어들고 복음 외의 것들이 교회중심에 터를 잡아가고 있음을 쉽게 목도하고 쉽게 경험한다.
 헌데 이런
 현상은 이 시대에 갑자기 돌출된게 아니라 전부터 있어 왔다. 본문에서 에스겔은 무수히 많은 해골과 뼈들이 골짜기를 가득 메우고 있는 환상을 보았다. 그곳 마른 뼈들은 살과 피가 없고 따라서 생명, 희망, 꿈이 없는 죽은 존재들이다. 그 골짜기의 뼈들은 당시의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이고 육신적 모습이었다. 그들은 10년이상 바벨론의 포로생활을 하고 있었다. 헌데 나라가 망했는데도 그들은 서로 싸움을 일삼고, 하나님을 섬겨야 할 백성임에도 우상숭배에 빠졌으며, 성전에서 기도해야 함에도 기도하지 않았고, 세상과 야합한채 죄를 음식처럼 먹고 마시며 살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잊고 떠났다. 하나님을 향한 사명을 저버렸다. 하나님의 징계와 경고를 무시하고 죄의 길에 집착했다. 그 결과 개인과 나라의 회복조짐이 보이지 않고 앞날에의 희망이 전무해 보였다. 이 마른 뼈 환상을 보면서 에스겔은 슬퍼하며 기도했을 것이다. “하나님, 이 백성을 이대로 방치하시렵니까? 주님의 계획이 무엇입니까?”
 이때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되물으셨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죽어 나자빠져 있는 이들이 다시 살아나 일어날 수 있느냐라는 물음이다. 에스겔은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다. 이는 한 나라의 흥망성쇠와 개인의 살고 죽음이 하나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이며, 주님께서 마른 뼈들을 능히 살리실 수 있고 또한 그러실 것이다는 확신과 희망을 담고 있는 말이다. 천하에 누가 마른 뼈들을 능히 살리실 수 있을까?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그 분은 왜 마른 뼈들을 살리시는가? 비록 죄로 인해 징계를 받고 있을지라도 그들을 죽도록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말씀과 성령의
 역사가 사라진채 생기와 활력, 꿈을 상실한 마른 뼈와 같은 모습이 나 자신이고, 우리 가정이고, 현대 교회의 살상이다 라고 말하면 지나친 말일까? 설령 그럴지라도 우리들에게는 여전히 희망이 있다. 마른 뼈에 살을 붙이시고 생기를 불어넣어 살리시고 회복시키시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인생과 삶, 믿음이 마른 뼈처럼 절망상태가 되어갈 때 자신의 실상을 깨닫고 통회하며 주님께 다시 돌아가자. 이 사순절에 스스로를 돌아보며 마른 뼈조차도 생명으로 회복시키시는 주님을 깊이 체험하시길 기원한다.
<회개>  3월23일
 오늘은 사순절 30 일째 날로 ‘ 회개 ’에 대해 말씀드린다. 함께 나눌 본문은 열왕기하 19장 1-3절까지이다. 다 같이 읽어보자. “히스기야 왕이 듣고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두르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왕궁의 책임자인 엘리야김과 서기관 셉나와 제사장 중 장로들에게 굵은 베를 둘려서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에게로 보내매 그들이 이사야에게 이르되 히스기야의 말씀이 오늘은 환난과 징벌과 모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을 때가 되었으나 해산할 힘이 없도다” 아멘. 오늘 부를 찬송은 320장, “나의 죄를 정케 하사” 이다. 1 절을 함께 부르겠다.
 한 나라의
 왕이 금으로 수놓은 왕복을 찢고 스스로 굵은 베옷을 입으면서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시라. 그것도 자신만이 아니라 궁내대신과 서기관과 제사장들에게도 베옷을 입게 해서 함께 회개하는 장면을 말이다. 이런 일이 유다왕 히스기야에 의해 일어났다. 당시 유다는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징벌을 받게 되었는데 하나님은 이방인 앗수르를 심판도구로 사용하셨다. 이런 국가적 위기 시에 히스기야는 선지자 이사야에게 기도를 요청했고 자신도 하나님앞에서 옷을 찢고 베옷을 입고 무릎끓고 통회기도했다. 당시 유대인들은 회개할 일이 발생했을 때, 국가적 개인적 재난 때, 극도의 슬픔을 몸으로 표현할 때 옷을 찢고 베옷을 걸치고 재를 뿌리고 그 위에 앉아 통회하고 회개했다. 사람이 자기 옷을 찢고 벗은 것은 자신의 추악한 실상을 파악하고 죄로 얼룩진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을 뜻한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낯추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와 백성들의 회개를 받으시고 용서하시고 앗수르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보호해 주셨다.
 우리들도 옷을
 찢고 벗어야 한다. 헌데 의상만 찢을게 아니라 마음의 옷도 찢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옷 만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 명하셨다. 우리들은 교만의 옷, 불순종의 옷, 우상숭배의 옷, 자아의 옷을 찢어야 한다. 마음을 찢는 것이 참된 회개이다. 나라가 잘 되고 흥하려면 입법 사법 행정 교육 군사 정치 사회 경제 예술 문화등 모든 분야의 사람들이 회개해야 한다. 사과의 한쪽 부분이 썩었다면 그것은 썩은 사과이다. 나머지 부분이 썩지 않았어도 말이다. 어느 한쪽, 어느 한부분만 통회한다고 온 나라가 잘 되는 것 아니다. 온 백성들이 다같이 범사에 회개하고 다같이 돌이켜야 한다. 교회가 회복받고 개인이 새로와 지려면 지금까지의 모든 죄들을 기억하고 애통해 하면서 마음을 철저히 찢어야 한다. 죄에 대해 애통해 하는 자는 결국은 용서의 복을 누린다.히스기야 왕이 끝까지 교만을 버리지 않았거나 혹은 대적 산헤립의 비위를 맟추기 위해 그에게 무릎끓고 애걸하는 일을 자행했다면 결국은 앗수르의 종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헌데 그는 자신및 국가의 죄를 안고 회개했고 백성들에게도 회개를 요청하면서 위에 계신 하나님께 도움의 손길을 구했다. 히스기야에게 살 길은 오직 주님 뿐이었고 그는 회개를 통해서 살 길을 찾았다. 어려울 때 절대 우리 편은 하나님이시다. 회개는 세상 편에 섰다가 하나님 편으로 돌아서는 것이다. 세상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다. 사람눈치를 보던 사람이 하나님 뜻을 추구하며 그분을 따르는 것, 불경건한 삶을 살던 사람이 마음과 언어를 고치고 삶과 행위를 고치고 목적과 방향을 고쳐서 경건한 삶으로 돌아오는 것, 그것이 회개이다.
 이 사순절에
 자신의 삶을 깊이 돌아보며 참회의 시간을 가지시길 바란다. 잘못된 삶을 깨닫고 진심 회개할 때 주님은 영혼과 마음, 생각과 삶을 아름답고 새롭게 빚어 주신다. ​
<신앙고백>  3월19일
 오늘은 사순절 27 일째 날로 ‘ 신앙고백 ’이란 주제로 말씀드린다. 함께 나눌 본문은 역대상 29장 11-12절이다. 다 같이 읽어보자.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아멘. 오늘 부를 찬송은 542장, “구주 예수 의지함이” 이다. 1 절을 함께 부르겠다.
 현대를 포트모더니즘 시대라 부른다. 이는 탈 근대주의 시대라는 뜻이다. 근대주의가 신 중심의 세계관임에 반해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 중심의 세계관으로 이 시대 특징들중 하나는 상대주의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윤리, 종교, 예술, 철학, 건축, 문학등 모든 삶의 방식에서 절대 진리및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동성애, 성전환, 낙태등을 죄악으로 인정치 않고 단지 삶의 방식, 성향, 기호로 여긴다. 또 다원주의를 주창한다. 모든 분야에 원칙과 목적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며 이에 따라 인생과 삶도 다양하게 누리고 즐긴다. 감성주의도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형태이다. 즉 온 영역에서 이성보다는 감정적, 감각적인 것을 추구하고 감정에 따라 행동한다. 그리고 혼합주의도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서는 통일된 장르들이 해체되고 이질적인 것들이 서로 융합되고 혼합된다.
 이 시대 특징들 중에서 기독자들에게 가장 위험스러운 것은 상대주의이다. 절대적인 것을 인정치 않는다면 기독자들에게 가장 소중하고  가치있는 하나님과 그분 말씀은 설 자리를 잃어버린다. 하나님이 절대자가 아니시라면 그분은 인간에게 신앙의 대상이 될수 없고 성경이 절대진리가 아니라면 그것은 죄인들을 구원으로 안내하는 규범이 될수 없다. 우리들이 믿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며 말씀은 영원히  변함없는 절대 진리이다.
 어느 시대 어느 국가이건간에 절대자인 하나님을 상대화하고 상대적 존재인 인간을 절대화할때 그 나라의 역사는 타락하고 무너질 수 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다윗은 참으로 겸손한 신앙인이다. 그는 권력, 부, 이름과 명예를 한 몸에 지닌 힘있는 군왕이었고 위대한 통치자, 집권자였다. 헌데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고백했다. 다윗은 성전건축 헌물을 바친 후에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의 기도를 드리면서 천지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주의 것이다고 고백했다. 하나님을 절대시하고 자신을 상대시 한 것이다. 주의 것이다 라는 말속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주의 소유라는 것, 주께서 관리하신다는 것, 주께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다윗의 말처럼 하나님은 모든 것을 소유하시고 다스리시고 완결지으시는 유일하신 절대자이시다. 주님을 믿고 따르면 인생이 평안하고 여유롭다. 미래에 대한 확신이 생기며 고난을 당해도 이겨낼 수 잇다. 사실 인간은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생노병사의 한계 속에 살아가며 종내는 흙이 되어 안개처럼 잊혀지고 사라지는 존재이다. 다윗은 이런 한계성, 유한성, 연약성을 깨닫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했다. ‘모든 것이 다 주의 것 입니다’ 라고 그분의 절대성을 인정했다.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존귀케 하셨고 높여 주셨다. .
 사랑하는 이들이여, 간혹 ‘이것만은 내 것이다’라고 외치며 안간 힘을 쓰다 실패의 쓴 잔을 마신 일이 있으신지, ‘이것만은 내가 절대 지킬 수 있다’라고 확신하다가 어느날 물거품처럼 사라진 그것 때문에 오랫동안 아팠던 경험이 있으신지? 세상 모든 것은 결국은 부패하고 썩고 사라진다. 오직 하나님과 그분 말씀만이 영원하다. 절대 가치이고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 사순절 아침 조용히 다윗의 신앙고백을 묵상하고 음미하면서 주님을 향한 믿음과 헌신지수를 더욱 높여 가시길 기원한다.
<거치는 자>  3월16일
 오늘은 사순절 24 일째 날로 ‘거치는 자'란 주제로 말씀드린다. 함께 나눌 본문은 고전 10장 32-33절이다. 다 같이 읽어보자.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아멘. 오늘 부를 찬송은 292장, “주 없이 살수 없네”이다. 1 절을 함께 부르겠다.
 기독자들이 되지 말아야 할 사람가운데 ‘거치는 자’가 있다. "거치는 자" 라는 말은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자"란 뜻이다. 성경의 위인들 중 야곱은 남을 걸어 넘어뜨렸던 대표적 인물이다. 야곱이란 이름의 뜻이 ‘발 뒤꿈치를 잡는 자’이다. 야곱은 선택은혜로 12지파의 조상이 되었지만 생애동안 남을 넘어뜨리면서 살았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 아버지를 속이고 넘어뜨렸고 장자권을 빼앗고 형도 넘어뜨렸다. 외삼촌도 넘어 뜨렸다. 그는 남을 넘어뜨렸던 만큼 오랜 세월 고통과 눈물로 얼룩진 삶을 살아야 했다.
 바울은 신앙인의 근본은 하나님께 영광돌림이라 말하면서 그 일환으로 ‘남에게 거치는 자가 되지 말 것’을 강력 권한다. 바울은 헬라인에게 거치는 자가 되지말라 권한다. 헬라인은 이방인, 이교도, 불신자를 뜻한다. 우리들 주변에는 많은 불신자들이 있다. 우리들은 거친 말과 모순된 행위로 신앙 없는 자들에게 잘못된 믿음의 인상을 심어 주거나 또한 반복된 실수로 그들의 천국행을 가로막고 전도의 문을 닫는 걸림돌이 되지 말아야 한다. 또한 유대인에게도 거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유대인은 선민, 즉 믿는 사람들이다. 우리들은 끼리끼리 어둠의 장벽을 만들고, 함정을 만들고, 벽을 두텁게 쌓고, 서로 이간질하며 다투며 다른 지체들을 아프게 하는 걸림돌이 되지 말아야 한다. 교회에도 거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자신으로 인해 교회가 부흥하지 못할뿐더러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냉대를 당하게 하고, 또 교회가 은혜받고 회복받기는커녕 오히려 교회 내에 혼란과 소요스러움을 가중시키는 원인 제공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남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자들을 향해 "누구든지 이 소자들중 하나를 걸려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만일 고기가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일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성도들은 주님 앞에 하나 된 형제요 제자들이다. 우리들은 결코 넘어뜨리는 자들이 아닌 기회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특히 믿음의 가정들에게 더욱 착함으로 대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믿음과 소망, 사랑은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영원한 특성들이다. 이 셋은 자신뿐 아니라 남을 세워주고 살리는 요소들이다. 스스로가 가진 자유로 누군가를 넘어지게 하거나 상케 하거나 시험들게 말고 믿음과 소망 사랑안에서 그를 헤아리고 세워줌으로 그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도록 도와주어야 겠다. 일정기간만이 아니라 평생 거치는 자가 되지 않도록 노력했던 바울의 가르침을 이 사순절기에 영혼깊이 새기시길 기원한다.
<하나님의 말씀>  3월12일
 오늘은 사순절 21 일째 날로 ‘하나님 말씀’에 대해 말씀드린다. 함께 나눌 본문은 요 1장 1-3절이다. 다 같이 읽어보자. “태초에 말씀이 계시느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아멘. 오늘 부를 찬송은 285장, “주의 말씀 받은 그날”이다. 1 절을 함께 부르겠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 말씀을 3 가지로 표현했다. (1) 기록된 말씀, 즉 성경, (2) 살아있는 말씀, 즉 예수님, (3) 선포된 말씀, 즉 설교라 했다. 본문에서 요한은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 하나님이심을 증언한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존재하시다가 때가 되어 예수님 몸을 입으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되었다. 말씀은 하나님이시고 동시에 예수님이 되신다. 따라서 말씀을 저버리고 불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버리는 것과 같고 그분의 권위와 인품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초대 왕이었던 사울 왕을 버리셨는데 이유는 그가 하나님 말씀을 버렸기 때문이다. 삼상 15장 23절에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했다.
 인생과 삶에 귀중하고 의미있는 것들이 제법 있다. 가정, 교회, 직장, 일터등은 희노애락을 경험하며 꿈을 실현해 가는 소중한 삶의 터전들이다. 식구, 친구, 교우, 동료, 동업자들은 어떤 식으로던 영향을 끼치는 삶의 소중한 동반자들이다. 헌데 더욱 소중한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분 말씀이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체들에게 생사회복의 주관자이시며 말씀은 절대진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평생을 주님과 동행하며 그분 말씀을 심령에 담고 살아야 한다. 한 독실한 성도가 병상에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그는 온 식구들을 불러 기도, 찬송하며 유언을 남기며 모든 일들을 아름답고 깨끗하게 정리했다. 그는 숨을 거두기 전 조용히 왼 손바닥을 펴들고 오른 손을 꼭 쥐었다. 이것이 무슨 행동인지 의아해 하는 식구들에게 그의 부인이 말했다. “너희 아버지는 지금까지 쥐고 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의 오른 손을 꼭 잡고 떠나려 하신다.” 그는 참으로 경건한 삶을 살다가 주님 손에 이끌려 하늘나라로 갔다.
 지금 우리들 가슴 속에 담긴 꿈과 이상과 계획들, 그리고 손아귀에 움켜진 그 모든 것들은 이 세상과 이별하는 날, 힘없이 내려 놓아야 하는 것들이다. 이런 것들을 최고가치로 삼고 이를 붙잡기 위해 가장 소중한 하나님과 말씀을 버리고 포기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아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떠나는 것을 보면서 베드로는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고 그분 말씀을 버리면 하나님께서도 어쩔 수 없이 우리를 버리실 것이다.
 하나님말씀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값진 보화이다. 말씀은 믿음과 의로움과 영생을 담보하는 유일한 가치이다. 우리들 정말 말씀에 붙들여 살아야겠다.  한순간이라도 말씀없이 살수 있다고 착각하지 않을뿐더러 실제 말씀없이 사는 과오를 범치 말아야겠다. 말씀 안에 거하며 말씀으로 영혼의 양식을 삼고 말씀을 따라 행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겠다. 이 사순절기에 말씀의 은혜가 모두에게 충만하길 기원한다.
사순절 묵상(1)  2021년
Picture
<회개>  3월9일
오늘은 사순절 18 일째 날로 ‘회개’ 에 대해 말씀드린다. 함께 나눌 본문은 시편 51편 10-12절이다. 다 같이 읽어보자.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 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아멘. 오늘 부를 찬송은 252장, “나의 죄를 씻기는”이다. 1 절을 함께 부르겠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사람은 다윗이다. 말째 아들이면서도 사무엘로부터 왕으로 기름부음 받음, 물맷돌로 거인 골리앗을 물리침, 사울왕의 핍박으로 10년간 도망자로 살아감, 요나단과 깊은 우정을 나눔,  말년에 아들 압살롬과의 권력투쟁, 그리고 밧세바로부터 낳은 아들 솔로몬을 왕으로 옹립함등 그의 일대기에 대해 우리들은 어려서부터 듣고 배우고 깨우치며 은혜를 받았다. 성경이 그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거론함은 그가 그만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소중한 인물이었다는 반증이다. 게다가 그는 예수님의 육신의 조상이었다. 헌데 다윗에게도 씻지못할 치욕거리가 있었는데 유부녀였던 밧세바와의 불륜이었다. 그는 왕의 귄세로 밧세바를 범하고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치열한 전투로 내몰아 죽게 했다. 다윗은 가정 파괴범이었으며 살인자였다. 왕의 대표이며 성군이었던 다윗이 한때 그런 범죄자였다. 헌데 다윗은 자신의 죄를 철저히 자백, 회개함으로 용서받고 주님의 사랑하심을 회복했다. 시 51편은 다윗이 자신이 범한 죄를 나단에게 지적받았을 때 그 죄를 즉시 고백하고 통회한 것을 기록한다. 다윗은 정직한 영과 마음의 회복을 하나님께 탄원한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회개를 들으시고 그를 용서해 주셨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우리들은 때떄로 인간적 한계와 무지와 연약함으로 인해 죄의 유혹에 넘어가곤 한다. 그럴 떄마다 우리들은 연약한 육신을 탓하며 곤고한 심령을 변명거리로 삼는다. 헌데 죄는 은폐하고 덮어두고 변명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죄는 하나님의 성품에 배치되는 것으로 하나님은 무슨 죄이던 싫어하시고 그 댓가를 꼭 치루게 하신다. 죄가 쌓이고 쌓여 주님의 기준에 도달하면 주님께서 심판하신다.  믿음의 가문에서 태어나고 교회출석 잘하고 교회활동 많이 한다고, 직분받고 예배의식 진행한다고 죄의 형벌로부터 면죄부 받는게 아니다. 죄의 댓가를 치룸에는 모든 사람사이에 차별이 없다. 죄에서 헤어나오는 유일한 길은 다윗처럼 진실함으로 통회, 회개하는 것이다. 회개는 한마디로 마음을 바꾸는 것, 즉 회심하는 것이다. 마음이 바뀌어야 생각과 말과 행동이 바뀐다.  마음이 새로와지면 인생과 삶이 새로와 진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할 때 아까 불렀던 찬송가 가사처럼 예수님보혈이 흘러나와 죄를 씻어준다. 죄를 고백하면 구원의 즐거움이 회복되고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유쾌함이 삶에  돌아온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하심이 다시 가동된다.
 세상이 악해질수록 우리들은 새로운 심령으로 선하고 아름답게 살아야겠다. 올바로  믿고 제대로 주님을 섬기면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그분 영광을 더욱 드러내야겠다. 이 사순절에 그간 묵혀두었던 모든 죄들을 끄집어내어 자백하고 회개하고 용서함받음으로 영혼이 성숙해지며, 또한 주위 사람들에게 새 삶의 길을 제시하는 우리 모두이기를 기원한다.
​
<마음>  3월5일
오늘은 사순절 15 일째 날로 ‘ 마음’ 이라는 주제로 말씀드린다. 함께 나눌 본문은 빌 2장 5-7절이다. 다 같이 읽어보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아멘. 오늘 부를 찬송은 212장, “겸손히 주를 섬길 때”이다. 1,2 절을 함께 부르겠다.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누군가를 모방하고 닮아가길 시도한다. 다른 사람과 절대 벽을 쌓은채 조금이라도 섞이거나 연관되지 않고 홀로만의 독창적이고 독단적인 인생을 사는 자는 없다. 사람은 누군가를 닮아가는 과정 중에 자신만의 독특성과 고유성을 형성하며 그것들을 삶 속에 체질화 시켜간다. 다른 사람을 닮는다는 함에는 여러 경우들이 있다. 외모를 닮는 경우가 있고 성격을 닮는 경우도 있다. 누군가의 습관을 닮으며 식성을 닮기도 한다. 닮아가는 것은 갑자기 이루어지는게 아니다. 하룻밤 사이에 자신이 원하는 어떤 사람과 같아지는게 아니다. 닮아짐은 오랜 세월을 두고 함께 하면서 서서히 이루어지는 과업이다.
 인생에 있어서
 닮아져 가는 대상들이 있다. 사람들은 부모를 닮고, 스승을 닮는다. 친구를 닮고 역사를 빛낸 성인들을 닮아가곤 한다. 헌데 성도들이 꼭 닮아야 할 존재가 있다.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믿음의 주이시고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유일한 분이시다. 그분은 상천하지에 유일하게 선하신 분, 유일하게 인생의 진리와 길이 되시는 분이시다. 헌데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은 그분의 외모, 식성, 어투를 닮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예수님 초상화에 그려진대로 예수님처럼 얼굴을 성형하고  수염을 기르고 유대인의 긴복장을 하고 맨발에 샌들을 신는다고 그분을 닮는게 아니다. 그것들은 그저 주님을 흉내내는 것이다. 흉내냄과 닮음은 서로 다르다.
 우리들은 
예수님을 흉내만 내지 말고 그분을 정말로 닮아야 한다. 주님을 닮는다는 것은 그분 마음을 닮는 것이다. 5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했다. 마음이 인생의 주체이고 모든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 마음을 닮을 때 정말로 그분을 닮는 것이다. 
 주님의 마음을
 닮으면 교만이 사라지고 겸손, 온유해 진다. 증오와 적개심, 복수심이 사라지고 사랑과 관용, 이해가 생성된다. 세상적 욕망이 희미해지고 하나님의 비젼과 꿈이 생성되어 삶이 생기와 활력으로 넘친다. 또한 세파로 소요스럽고 혼란스러운 영혼이 고요하고 평온해진다. 주님의 마음을 품고 닮으면 하늘 아버지의 뜻과 소망이 무엇인지를 밝히 깨우치게 된다.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갈때 긍국적으로 인생자체가 변하게 된다. 자신이 바뀌면 가정이 바뀌고 교회와 공동체가 그만큼 바뀐다. 주님 마음을 닮을 때 우리들은 기독자의 온전함 즉 성결에 이르게 된다.
 세상과 현실이
 보기 좋고 탐스럽게 보일지라도 결코 이들과 벗하거나 닮으려 하지 말자. 오직 주님만이 우리들이 도달해야 할 생의 목표이고 목적이다. 이 사순절기에 우리모두 주님의 마음을 품고 그 분을 더욱 닮아 가기 위해 훈련하고 애쓰시길 기원한다.
​
<자아발견>  3월2일
오늘은 사순절 12 일째 날로 ‘자아 발견’ 이라는 주제로 말씀드린다. 함께 나눌 본문은 이사야 6장 5절이다. 다 같이 읽어보자.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아멘. 오늘의 찬송은 445장,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이다. 1 절을 함께 부르겠다.
 이사야 6장은 이사야에게 임한 환상들과 그가 선지자로 소명받는 장면을  묘사한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을 52년간 통치하던 웃시아 왕이 죽던 해에 높은 보좌에 앉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보았고 그분 주위에서 경배하는 스랍들의 찬양소리를 들었다. 그는 하늘과 땅에 충만한 하나님영광을 경험했다. 이런 특별한 환상을 본 후에 그는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다.
 헌데 이사야가 체험한 환상도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소중한 것은 그의 자아발견이다. 이사야는 환상 중에 자신의 실체를 발견했다. 신앙여정에서 신비롭고 장엄한 이상과 계시들을 체험하는 것 참으로 가치있는 일이다. 헌데 환상체험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우치는 것과 연관되어야 더욱 의미있고 아름다운 것이다. 이사야는 환상 중에 드러난 주님의 거룩하심에 비해 자신은 심히 부정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상에서 자신의 실상을 알고 보고 느끼고 확신하는 것만큼 실제적인 발견이 어디 있을까? 자신을 알면 인생사가 새롭게 쓰여진다. 삶의 여로에 일대 전환이 일어난다. 자신의 실체를 제대로 알면 무엇이 인생의 문제이고 아픔, 상처인지를 파악할 수 있고 해서 그 치유책도 만들 수가 있다. 자아를 발견함은 과학을 가동하여 자연현상을 파헤치고 난치병을 치유하고 삶의 환경을 편리하게 구성하는 것 못지않게 영육간 평안과 행복과 강건함을 위해서도 절대 필요하다.
 이사야는 자신의 실상을 성전에서 보게 되었다. 성전이란 기도하고 말씀듣고 찬양하고 예배드리는 물리적 공간을 뜻하지만 그보다 더 넓은 의미로 하나님이 계신 곳, 그분의 임재를 뜻한다. 장소가 어디이던 하나님 임재 앞에 서면 그 누구이던 자신의 실상과 실체가 그래로 드러난다. 주님 앞에 설 때 허물과 죄악많은 자신의 모습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교만하고 오만불손한 실체가 밝혀진다. 나태하고 게으른 자기 실상이 보여진다. 주님보다는 세상을 사랑하고 따라가는 일그러지고 추악한 자신의 모습이 비춰진다. 주님 임재 밖에서는 자신이 그다지 죄인임을 몰랐는데 주님 앞에 서니 용서받기에 너무 민망한 죄인임을 알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실체를 발견하면 즉시 고백하고 회개해야 한다.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로다”했다. 회개하면 주님이 용서하신다.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주님은 자아 발견한 자를 새롭게 부르시고 당신 도구로, 일꾼으로 사용하신다.
 이 사순절기에 우리들의 모든 실상들이 주님 앞에서 낱낱이 밝혀지고 드러나서 그간 잘 몰랐던 자신의 참 모습이 어떤지를 발견하길 바란다. 우리 모두 새로워진 자들로 주님 소원하심에 따라 사용되어지길 소망한다.
<부르시는 곳>  2월26일
 오늘은 사순절 9 일째날로 ‘부르시는 곳’이라는 주제로 말씀드린다. 함께 나눌 본문은 욘 1장 2-3 절이다. 다 같이 읽어보자.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 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오늘의 찬송은 323장, “부름받아 나선 이 몸”이다. 1 절을 함께 부르겠다.
 요나는 이방인을 대상으로 활동한 선지자이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앗수르 수도 니느웨로 가서 회개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명을 받는다. 허나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던 요나는 하나님 명에 불순종한채 반대편인 다시스로 도망을 간다. 당시 앗수르는 아직 이스라엘을 침략하기 전이다. 요나는 다시스 행의 배 안에서 깊이 잠을 청한다. 요나의 이런 행위를 선민우월의식에 빠진 자들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좀 이해할듯 하다. 머잖아 자신들을 멸망시킬 이방나라에 회개를 촉구하며 주님은혜를 선포하는 것은 대적을 이롭게 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쟎는가? 헌데 하나님의 부르심과 세우심을 받고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예언하고 그분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라면 달라야 한다. 선지자에게 자신의 뜻과 감정과 해석은 별로 중요치 않다. 하나님 일을 위임받은 자는 비록 그것이 인간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고 마음에 안 내켜도 순종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이다. 면에서 요나는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르기에는 참으로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오늘날은 비상 시기, 비정상적 시기이다. 우리 모두에게 현실적, 영적상황이 참 어둡다. 각종 불의 불법들이 판을 치고 성경에서 죄로 언급하는 일들이 너주 자주, 너무 자연스럽게 벌어지고 있다. 이럴 때는 교회와 성도가 일어나 주님의 뜻을 밝히며 복음으로 세상을 정화시키고 회복시켜야 한다.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니 말이다. 헌데 위기상황속에서 오늘날의 교회가 많이 무력하다. 뱃전에서 잠든 요나처럼 영적 잠에 빠져 시대적 소명에 둔감해가고 있다. 또한 가야할 곳과 가지 말아야 할 곳을 분별 못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오늘의 교회및 성도들은 자기 몫과 기능을 온전히 감당치 못한 채 시류를 따라가기에 급급해 한다. 
우리들은 돌이켜 니느웨로 가야 한다. 요나가 탄 배의 선장은 혼돈스런 상황중에도 깊은 잠에 빠진 요나를 향해, “자는 자여 일어나라”며 그를 깨웠다. 하나님은 영적 잠에 취해가는 우리들을 깨우시며 소명과 사명의 자리인 니느웨로 가라고 명하신다. 그곳이 재미없고 이름과 빛이 없고 위험과 고난이 기다리는 곳이어도 주님이 부르시고 가라 명하신 곳이기에 꼭 가야 한다. 그곳에서 주님을 알리고 전해야 한다. 반면에 다시스가 손짓하며 오라 해도 가지 말아야 한다. 그곳이 현실에 안주하며 안일하게 먹고 즐기며 살수 있는 곳이어도 주님이 보내시지 않은 곳이기에 가서는 안된다. 이 사순절에 우리를 필요로 하는 니느웨의 환상을 보고 그곳에서 우리를 부르는 음성을 확실히 들을 수 있길 기원한다.
<경건>  2월23일
오늘은 사순절 여섯째 날로 경건에 대해 말씀드린다. 함께 나눌 본문은 딤전 4:7-8이다. 다 같이 읽어보자.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오늘의 찬송은 288장,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이다. 1,2 절을 같이 부르겠다.
 일반적으로 경건이란 단어는 거룩한 삶, 온전한 예배, 건전한 영성 이라고 기술하며 이를 영혼이나 정신적 영역에 속한 종교적 활동으로 이해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헌데 본문및 성경전반에 언급된 경건은 더욱 넓은 의미를 지닌다. 경건은 종교적 행위만을 좁게 의미하지 않는다. 경건은 일상활동과 종교활동을 하나로 통합하고, 세속적인 것과 성스러운 것을 하나로 묶고, 주일 날과 주중의 날들을 연결시키면서 삶의 모든 영역들을 하나로 엮어내는 넓은 의미에서의 전인적 삶이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물론 하나님 말씀이다. 고로 경건한 삶이란 정신적 종교적 활동만을 넘어 모든 분야에서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실체적인 삶이다. 브루스 다마레스트 교수는 “성경적 경건은 정교, 정감, 정행의 통합”이라고 했다. 그에 의하면 바른 가르침인 정교, 바른 감정인 정감, 바른 실천인 정행이 하나님말씀 안에서 통합되는 성결하고 건강한 삶이 참된 경건이라는 것이다.
 경건은 저절로 습득되지 않는다. 그것은 연습해야 할 성향의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경건의 연단을 하라고 권하다. 연단이란 연습, 훈련을 뜻하는데 이는 익숙해지기까지 그리고 익숙해진 후에도 그 기술과 기능을 지속 유지하기위해 거듭 반복하는 것을 말한다. 위대한 피아니스트들은 악보상의 음들을 손가락으로 본능적으로 눌러댄다. 즉 머리의 해석보다 손가락이 먼저 알고 자동적으로 건반을 쳐대는 것이다. 이는 부단한 연습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무엇이던 한 분야의 전문가, 달인이 되려면 몸사리지 않는 훈련이 필요하다. 아무 노력없이 실력을 키울수 없고 어쩌다 목표에 이른다해도 오래가지 못한다.
 육체와 세상적인 것에의 연습에는 유익한 점들이 많다. 헌데 그 범주와 시효에 있어서 부분적, 한시적이며 또한 그것이 천국 행을 보장하거나 영혼의 안녕과 평안을 주지는 못한다. 헌데 경건의 연습은 현세적 삶만이 아니라 장차 천국에서의 삶을 위해서도 유용하며 유익이 된다. 즉 경건연습은 이 땅에서 영육간 건강하고 복되게 살수 있도록 해주며 그 열매로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도록 해 준다.
 기도, 말씀묵상, 찬양, 봉사, 성경공부, 전도, 구제등이 경건에 이르는 연습이 될수 있다. 예배 잘 출석하고 설교 잘 듣는 것도 경건훈련에 속한다.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연습하듯 신앙생활의 기본부터 꾸준히 다져 나간다면 누구나 때가 되면 강하고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될수 있다. 
​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지금 어린이 같은 신앙 상태인가 아니면 견고한 어른 신앙 상태인가? 믿음 안에서 낳은 제자 디모데에게 경건한 생을 요구했던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 이 사순절기에 경건에 이르기를 더욱 연습하면서 기독자의 온전에 도달해 가는 우리 모두이길 기원한다.
<죽음>  2월29일
​오늘은 사순절 세째날로 ‘죽음’이란 주제로 말씀드린다. 본문은 열왕기상 2장 1-3절이다. 
​
다 함께 읽어보자.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으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던지 어디로 가던지 형통할지라”. 오늘 찬송은 179장, “주 예수의 강림이”이다. 이 찬송 1절을 같이 부르자.
 본문은 임종을 앞둔 다윗이 왕위를 계승할 솔로몬에게 들려주는 유언같은 엄숙하고 비장한 부탁성 이야기이다. 2절에서 다윗은 ‘내가 세상 모든 사람의 길로 가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의 고백은 왕도 권력자도 죽음 앞에서는 예외일 수 없음을 보여준다. 문무백관을 호령하고 골리앗을 돌팔매로 쓰러뜨렸고 막강 불레셋을 격파했으며 소년시절에는 사자와 곰을 맨손으로 찢었던 다윗이지만 죽음의 길 앞에서는 그역시 어찌할 수 없었다. 죽음은 아무 힘도 못쓰게 하고 아무 것도 못하게 하는 그런 것이다. 그 어떤 세상 자랑거리, 업적, 공적도 죽음의 길을 막지 못한다. 죽음은 모든 인간들이 가는 길이며, 살아 생전의 모든 것들을 뒤에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이들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안됐다, 허무하다, 어찌하누’ 라고  가슴 아파하면서도 언젠가 현실로 다가올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치 않는다. 다윗은 ‘모든 사람들이 맞이 하는 죽음의 길이기에 자신도 예외일 수 없다’는 진리를 간파해 겸손히 받아드렸고 해서 죽음에 대해서 준비할 수 있었다.
천년만년 산다던지 목숨이 여러개 있다면 일상이 긴장과 불안 속에 진행되지 않을 것이다. 시간과 기회가 많기 때문이다. 오늘 잘 못하면 내일 잘하고 열심내면 될 것이고, 목숨이 여러 개여서 이번 생은 대충 살아도 다음 생에 최선다하면 사람들의 평가가 달라질 수 있을터이니 말이다. 생은 유일회적이다. 한번 태어나서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이고 후에는 살아온 생에 대한 준엄한 주님 평가가 있다. 모든 사람은 예외없이 죽음이라는 길로 간다. 믿음의 조상들이 그 길을 갔고 다윗도 그 길을 갔다. 우리도 언젠가 주님이 부르셔서 그 길을 답습할 것이다,
 우리들이 이 결론에 동의한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할끼? 바르게 잘 살아야 한다. 좀 더 겸손히 사랑을 실천하며 좀 더 섬기며 살아야 한다. 주님과 세상이 인정할 만큼 예수 잘 믿고 맡겨주신 일에 더욱 헌신해야 한다. 예수님 믿는 이들에게 죽음의 길은 끝이 아니다. 이 땅에서의 생애의 끝이 존재의 마지막이 아니다. 오히려 죽음은 다른 세계에의 시작이자 시발점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에서 영원히 살것 같은 착각을 버리고 정한 날에 하늘본향으로 돌아가야 할 인생임을 꺠닫고 매일매일 진지하고 신실하게 사시길 바란다. 이 사순절기간에 영적, 정서적, 육신적으로 평소떄보다 더욱 의미있고 아름답고 복되길 바란다. 또한 우리 모두에게 하루하루가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충만하길 기원한다.
목회서신 2021년 2월
Picture
2월16일: 자신만의 고유한 존재
올망 졸망한 4남매를 둔 가장이 있었다. 어느날 주일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중 차 안에서 둘째 아들이 갑자기 물었다. “아빠, 형아와 동생들은 하안데 왜 나만 피부가 까매요? 유치원 아이들이 놀려요”. 다섯살인 둘째는 날 때부터 피부가 유난히 검었는데 지금 그 색깔을 의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돌발적 질문에 아빠는 뭐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가 머뭇거리자 옆에 있던 아내가 나서서  “둘째야, 검은 색은 나쁜 것이 아니라 튼튼한 색깔이란다. 엄마를 봐. 이렇게 몸이 하야니까 자주 아프잖니. 하나님이 너를 특별히 사랑하셔서 튼튼한 색깔을 주신거야”라고 말했다. 엄마 말에 둘째는 기분이 좋아졌다. 헌데 피부색깔이 흰 나머지 아이들이 마음에 걸렸다. 그 아이들이 하나님은 자신들을 사랑치 않으셔서 약한 색깔을 주셨다고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나머지 자녀들을 향해서도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하얀 색은 하얀 색대로 튼튼한 색이고 검은 색은 검은 색대로 튼튼한 색이야 하나님은 각자에게 가장 잘 맞는 색을 주시는 거란다”.
 이 세상에 자신과 똑같은 사람은 없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시 만물들을 다르게 지으셨다. 다르기에 볼 때마다 신기하고 관심도 생긴다. 다르다는 것은 좋음과 나쁨의 구별이 아니다. 하나님이 만드시고 우리들에게 주신 것들중 나쁜 것, 불필요한 것은 하나도 없다. 검은 피부 색을 위시, 작은 키, 허스키한 목소리, 개성있는 외모등도 모두 가치잇고 의미있다.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던 안하던 모두가 자신만의 본질과 정체성이 있고 독특한 매력도 지닌다.
 정말 나란 인간은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고유한 존재이다. 최고의 설계사이며 건축가이신 주님이 만드셨는데 거기에 조금이라도 착오가 있고 실수가 있을까? 특히 기독자들은 소유, 권력, 자리, 외모, 지식, 배경등을 넘어 아주 탁월한 존재들이다.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을 가리켜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벧전2:9) 말한다. 주님께서 믿음 안에서 우리를 이토록 영광스럽게 만드셨다. 인종과 피부색깔, 지식과 생활수준, 권력과 명예에 관계없이 우리들은 최상의 존재들이다. 
 인생과 삶의 형통함과 행복을 위해서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늘 지니고 살아갸겠다. ‘자기규정 효과’란 말이 있다.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면 뇌에서 그것을 인식하여 그 기준에 맞게끔 몸과 행동을 움직이게 한다는 뜻이다. ‘주 안에서 나는 존재가치가 높은 사람이야’ 라고 확신하면 정말로 그런 사람으로 변해간다. 주님께서 그렇게 만드신다.
자신의 고유가치를 인정하고 즐거워 할때 창조주에 대한 감사가 우러나오고 그분 뜻을 따라 살겠다는 고백과 결의도 생겨난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 만족하고 위탁받은 것에 최선다함으로 삶의 의미가 더욱 깊어지고 만드신 분의 영광도 크게 드러내는 우리 모두이길 기원한다.
2월12일: 은혜의 순환
대다수가 하루하루 근근히 살아가던 가난한 시절, 꿈을 가진 한 청년이 막노동으로 생활비와 검정고시 학원비를 벌고 있었다. 어느날 저녁 야간학원 공부를 마치고 허름한 집으로 돌아가는데 주머니에는 달랑 동전 하나 밖에 없었다. 그날 집 골목의 포장마차에 들러 동전가격에 해당하는 오뎅 한 개를 사먹고 국물을 수차례 떠 먹었다. 그 모습을 보던 주인이 안스러워 하면서 오뎅 열개를 건넸다. "오늘 손님이 적어 남는 오뎅이니 그냥 먹어요”. 허겁지겁 오뎅을 먹는 청년의 눈에 눈물이 그렁 그렁 맺혔다. 그후에도 아주머니는 청년을 볼 때마다 남아도는 오뎅들을 그냥 먹게 했다. 청년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 ‘아주머니, 제가 능력이 되면 은혜 꼭 갚겠습니다” 했다. 이후 청년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기업 인사과에 취업했다. 어느날 그는 포장마차가 예전 장소에 있을까 하여 찾아갔다. 근 10년만이었다. 헌데 아주머니는 여전히 그곳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아들과 함께 있었는데 뇌성마비 장애인이었다. 장애로 인해 마땅히 일할 곳이 없어 어머니와 함께 포장마차 가게에 와 있는 것이다. 그의 눈에 아주머니가 참 안스러워 보였다. 그가 다니는 회사는 장애인도 전문으로 채용하는 사회적 기업이었다. 급여는 많지 않아도 늦은 나이까지 정년이 보장되고 학자금도 융자받을 수 있는 회사였다. 그는 상무를 찾아 자초지종을 얘기했고 이후 아주머니 아들은 회사에 공식 채용되었다. 아들이 입사하던 날 아주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이 은혜를 어떻게 갚죠?"라고 그에게 말했다. 그가 말하길," 아니예요 제가 먼저 큰 빚을 졌잖아요. 이제야 그것을 갚았을 뿐입니다."
 세상에는 자신에게는 별로 어렵지 않는 일이 누군가에는 절실한 일이고, 자신에게는 꼭 필요치 않는 것이 다른 이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것인 경우가 종종 있다. 만약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누군가가 공급해 준다면 그것이, 주는 자에게는 큰 것이 아니어도 받는 자신에게는 아주 큰 가치이고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들은 하찮게 보이는 것으로도 다른 이의 인생과 삶에 힘을 실어줄 수 있다. 주변사람들을 감화시키고 감동케 하는 것은 크고 화려한 것만을 건넴으로서가 아니다. 사랑과 배려, 친절과 온화의 마음으로 도움 필요한 이를 섬긴다면 그 행위 속에 섬기는 것의 실제 가격과 비교할 수 없는 가치와 아름다움이 생성된다. 은혜는 또 다른 은혜를 낳는다. 누군가로부터 받은 은혜는 다른 이에게 베풀어질 은혜의 씨앗이고 근거이다. 마 22:37~40절은 가장 위대한 계명이다.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했다. 성경의 중심주제는 사랑이다. 신앙생활의 핵심요체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믿음은 이 말씀에 근거해서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고 은혜베푼 만큼 주변이 행복해지고 안연해진다. 아니 그 이상의 열매가 맺어진다.
 주변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 있는지 살펴보며, 있다면 주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를 순환시키며 살아가시길 기원한다.

​ 
2월9일: 행복의 기준
영국인의 존경을 받았던 윌리암 글래드스틴 수상이 이런 말을 했다. "나는 교회의 예배석을 영국의 수상석보다 귀하게 여긴다. 나는 수상 자리를 포기할찌라도 절대로 교회 예배자리는 포기할 수 없다." 어느날 윌리엄 수상이 국회연설을 준비하고 있는데 이웃집 꼬마 아이가 문을 두드렸다. "아저씨, 우리 형이 죽어가고 있어요. 어서 오셔서 천국가는 길을 알려 주세요." 국회연설 시간이 촉박함에도 그는 일어나서 꼬마의 집으로 가서 중한 병으로 생명이 꺼져가는 소년에게 예수님을 꼭 받아 드리도록 했다. 그런 후 그는 국회연설 시간에 늦은채 상대당의 야유를 받으면서 단상에 올라갔다. 그리곤 이렇게 연설을 시작했다. "동료 여러분, 오늘 나는 영국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곳에 오기 전 한 어린 영혼과 예배드리며 그를 구원받게 하고 이 자리에 섰기 때문입니다."
 참 행복의 기준은 무엇일까? 남이 시키는 것을 어쩔 수 없이 행한다면 열매가 있어도 과히 기쁘거나 행복하지 않다. 행복은 타인의 강요및 강청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에 자신이 소망하고 하길 원하는 것을 행하면 설령 열매가 적어도 가슴이 설레고 행복하다. 행복은 자신의 의지와 선택에 의해서 일정부분 얻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헌데 하나님이 소원하시고 요구하시는 것을 행하면 정서적, 육신적 기쁨을 넘어 영혼이 감동을 받고 큰 행복을 누린다. 행복의 근거및 원천은 주님께 속해 있다. 주님이 행복의 생산자, 수여자이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바라시고 소원하시는 것은 예배이다. 윌리암 수상이 생명처럼 여겼던 예배 말이다. 우리들이 온전하고 정직한 예배를 드릴때 주님은 한량 없으신  사랑과 자비를 부으시고 우리로 크게 행복케 하신다. 
 예배는 하나님 임재 안으로 들어가 그분의 영광스러우심을 인식, 인정하고 그 영광스러우심에 대해 자신의 모든 존재가치를 드려 예를 표하는 것이다. 예배는  최고의 하늘가치와 영적 아름다움을 지닌 것으로 인간의 제일가는 본분이며 모든 피조물들에게 마땅한 바이다. 성경에서 인간들이 예배하느냐 마느냐는 논의의 주제가 아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주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창조되었다. 해서 인간의 본분인 예배에 치중할때 참 기쁨, 행복, 평안이 오고 삶이 더욱 풍요롭게 된다.
 우리들은 지난 1년간 코로나 19로 인해 성전중심의 예배를 드리지 못했다. 심히 안타깝고 아쉽고 송구스럽기도 하다. 어서 이 재난이 종식되어 예배의 규모와 질서및 열정과 능력도 정상화 되었으면 한다. 헌데 우리는 교회건물에서만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다. 영혼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분 뜻에 순종하는 모든 삶의 자리가 예배 자리이다. 매일매일 몸으로의 생활이 주님께 드리는 산 제사이다. 예배당에서의 시간들 만이 아니라 일하고 먹고 쉬고 노는 일상의 시간들도 주님께 드리는 예배이다. 주님은 신실한 예배자를 찾으신다. 그들을 발견하시면 당신 도구로 쓰신다. 가치가 덜한 세상 것에 마음 쓰지 말고 하나님께 마음두며 그분께 삶과 생활로 예배드리는 행복자로 살아가시길 기원한다.

2월5일: 뿌리깊은 믿음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뮐쌔, 곶 됴코 여름 하나니. 새미 기픈 므른 가마래 아니 그츨쌔, 내히 이러 바라래 가나니.” 이 글은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을 통해 지은 “용비어천가”의 한 대목으로 이를 현대어로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뿌리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움직이니 꽃 좋고 열매 많나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그치지 아니하니 냇물을 이뤄 바다에 가나니.” 뿌리가 깊어야 건강하고 실하고 생산성있는 나무가 된다는 말이다. 성경에는 레바논의 백향목이 76번 언급된다. 레바논 백향목은 높이가 40m, 반경이 2.5m 되는 크고 웅장한 나무이다. 백향목은 매우 단단하고 벌레가 붙지 않으며 향이 아주 좋다. 이런 특성들 때문에 백향목은 성경에서 위엄, 힘, 영화및 영원함을 상징하는 나무로 표현되며 세상의 자랑으로 비유된다. 헌데 백향목의 또 하나의 특성이 있다. 그것은 뿌리의 깊음이다. 호세아 13장5절에,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했다. 백향목은 아름답고 향기로울 뿐아니라 뿌리도 깊다. 그래서 성경에서 귀히 언급되는 나무이다.
 나무가 잎사귀가 풍성하고 가지가 튼실하며 또 열매를 많이 맺어도 뿌리가 깊지 아니하면 거센 푹풍우에 꺽여지고 뿌리째 뽑힐 수도 있다. 최근 거센 비바람으로 인해 동네 가로수들의 가지들이 뿌러지고 꺾인채 여기저기 어지럽게 널려 있는 것을 보았다. 송두리채 나자빠진 나무도 있었다. 이게 다 푹풍만의 탓인가? 폭풍은 자연환경에 유익을 주기도 한다. 폭풍이 불어오면 바닷물이 뒤집히면서 산소가 공급되어 물고기가 더 활기를 찾는다. 또한 폭풍은 나무의 뿌리를 더욱 깊게 내리도록 만든다. 바람이 불어와 나무를 흔들면  나무는 이를 이기기 위해 밑으로 뿌리를 더 깊게 내린다.
 뿌리깊은 나무처럼 인생도 심지가 깊어야 한다. 심지가 깊은 인생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거나 요동치지 않는다. 간혹 너무 거센 풍파앞에 일시적으로 휘청거리지만 이내 제자리를 잡고 굳건히 평온하게 버텨간다. 주님은 심지가 깊은 자를 평강으로 지키신다(사26:3). 기독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뿌리깊은 믿음을 갖는 것이다. 인생과 삶은 생각보다 녹녹치 않다. 때론 무척 힘들고 불편하다. 헌데 믿음생활은 더욱 힘들다. 천국 향한 여정이 고통을 수반한 십자가 길이기 때문이다. 기독자들에게는 세상적 풍파 외에 믿음때문에 주어지는 고통과 아픔이 더해진다. 이런 역경들을 참고 이기려면 믿음의 뿌리가 깊어야 한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2:7) 권했다. 뿌리깊은 나무가 모진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믿음의 뿌리가 박힌 사람은 어떤 세상풍파를 당해도, 마귀의 도전과 유혹을 받아도 보란듯이 끗끗히 서간다.
 우리들 모두 주님 안에, 그분 말씀 안에 뿌리를 내리며 믿음이 더욱 자라갔으면 좋겠다. 주님의 속성인 사랑 안에서 삶의 뿌리가 깊어졌으면 좋겠다. 뿌리 깊어가는 우리 믿음을 보시고 주님은 크게 기뻐하실 것이다. 뿌리깊은 우리 믿음을 목도하면서 주변사람들은 주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2월2일: 인생의 강
1992년에 방영된 미국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은 개척초기 몬태나 주에 살던 맥클레안목사 가족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로 아름다운 자연풍경을 배경으로 예술적 경지에 도달한 플라이 낚시의 환상적인 장면과 가족간의 사랑과 아픔, 인생의 참 의미를 담백하게 그려 낸다. 이 영화 제목처럼 인생은 흐르는 강물과 같다. 강물은 멈춤없이 흐르고 흘러서 최종 목적지인 바다에 도달한다. 그 무엇도 도도한 강물의 줄기를 막을 수 없다. 장 슬로우가 쓴 <세월의 강물> 이라는 시가 있다. ‘더 빨리 흐르라고 강물의 등을 떠밀지 마라. 다친 달팽이를 보거든 도우려 들지 말아라. 그 스스로 궁지에서 벗어날 것이다. 당신의 도움으로 그를 화나게 하거나 상심하게 만들 것이다. 하늘의 여러 시렁 가운데서 제자리를 떠난 별을 보게 되거든 별에게 충고하고 싶더라도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라. 더 빨리 흐르라고 강물의 등을 떠밀지 말아라. 강물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도 생애동안 시간의 강을 흘러가 천국이라는 바다에 도착해 영원하신 하나님의 팔에 안긴다. 우리들은 기쁨과 행복, 번영 중에 시간의 강을 흐르고 코로나 19같은 고난과 재난, 실패 시에도 세월의 강을 흐른다. 인생의 강이 탁트인 광야사이를 직선으로 향해 흐를 때가 있고 험산준령들 사이를 굽이굽이 돌고돌아 흐를 때도 있다. 헌데 어떤 상황 속을 흐르던 강이 목적지에 제대로 도달하려면 가는 뱡향이 정확해야 한다. 올바른 방향이려면 오직 하나님을 따라 흘러야 한다. 뒤에 가는 강물은 앞선 강물을 쫓아간다. 앞의 강물이 제대로 흘러야 뒤의 강물도 바른 방향을 잡게 된다. 하나님의 마음은 늘 천국을 향한다. 따라서 주님을 따라 흐르면 우리들도 영원한 본향바다, 즉 주님의 시선이 머문 천국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앞서 가시면서 물길을 낼때 그것을 따라 흐르면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광야시절에 구름이 자신들 위에 머물면 진행을 멈추고 진을 쳤고 구름이 떠나면 진을 거두고 진행했던 것처럼 주님이 머물라 하시면 머물고 떠나라 하시면 떠나면 된다.
 또한 인생의 강이 목적지를 향해 제대로 흐르려면 모든 것을 비우고 내려 놓아야 한다. 강물은 흐를때 오직 자신만 지니고 흐른다. 자신외의 것들은 모두 비워내고 부인한다. 흘러간다고 자신의 본질과 정체성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본질 외의 것들을 내려놓었기에 더욱 철저한 자신이 되어 간다. 우리들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은 우리들 소유가 아니라 주님께서 필요 시에 맡기신 것들이다. 따라서 소유한 자가 아니라 맡은 자로 살아야 한다. 필요시 감사히 사용하고 그 기능을 다하면 후회없이 내려놓아야 한다. 그래야 보무도 당당하고 가볍게 목적지를 향해 흐를 수 있다.
 삶이란 인생의 강을 흘러가는 과정이다. 우리들은 이 땅에 천년만년 살아가는 존재가 아닌 흐르고 떠나는 나그네이요 행인이다. 하늘나라라는 목적지가 정해진 길손이다. 인생의 강을 하나님을 따라 잘 흘러가자. 탐욕을 비우고 내려놓고 가볍게 흘러가자. 오늘도 주님은혜와 평강이 내내 함께 하길 기원한다.
목회서신 2021년 1월
Picture
1월29일: 긍정적 마음
​ 어려서 앓은 소아마비로 인해 목발을 짚고 다니는 학생이 있었다. 그는 늘 쾌활하며 매사 긍정적이었다. 게다가 공부도 잘하는 우등학생으로 친구들에게 신뢰를 받았다. 어느날 한 친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의 자신감있는 행동의 비밀을 말해줄 수 있겠니?". 그는 밝게 웃으며 "아, 그거 별것 아냐 소아마비가 내 마음까지 파고들어 불구로 만든건 아니였기 때문이지" 대답했다. 크고 심각한 인생문제는 육신의 질고 때문이기보다는 마음의 병 때문이다. 육신의 병은 일정기간 고통을 주고 불편함을 야기시키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대로 그 불편함에 적응하게 된다. 헌데 마음의 병에 걸리면 인생과 삶은 혼란에 빠진채 망가지고 무너진다. 세상만사는 마음가짐에 따라 달리 느껴지고 해석된다. 어떤 마음을 품고 어떤 마음가짐을 지니느냐에 따라 행동양식이 달라지고 그 결과및 열매도 달라진다.
 교육열이 뛰어난 유대인들은 자녀들에게 어려서부터 긍정적인 마음가짐과 열린 사고를 심어준다. 그들은 자녀 교육시에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종종 인용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골리앗을 물리치기에는 너무 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두려움에 떨며 감히 저항하지 못했다. 그러나 다윗은 돌팔매가 빗나가기에는 골리앗의 몸집이 너무 크다며 생각하고 물맷돌을 들었다."고 교육한다. 사고의 출발점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 매사 부정적인 사람은 늘 할수 없다고 스스로 위축된다. 남이 하는 일도 안된다고 비판한다. 해서 부정적인 사람은 부정적 열매를 맺는다. 부정적인 사람의 곁에 있으면 영향을 받고 같이 부정적이 된다. 반면에 긍정적 마음을 지닌 사람은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그만큼 노력하고 열성다한다. 당연히 열매도 열심낸 만큼 주어진다. 찰스 알렌 목사는 성공한 사람들의 특성들을 이렇게 말했다. ‘성공자들은 가능성이 희박한 상황에서도 할수 있다는 신념을 지녔다,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의 장점과 은사를 본받는다, 다른 이들을 근거없이 비판, 비난하지 않는다, 다른 이들과 화평을 이루고 공동체의 번영을 위해 아름답게 공존한다’ 등이다.
 잠언서 4장 23절에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 했다. 마음이 공허해지지 않도록 지키려면 하나님말씀으로 마음을 채워야 한다. 말씀이 마음에 깊이 새겨지면 인생의 힘이 되고 안내자가 된다. 말씀은 마음의 중심을 잡아주어 어떤 상황에서도 견고히 서 가게 해준다. 기도도 마음을 채우는 비결이다. 기도할때 성령께서 마음에 내주하시어 마음의 소원과 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성령이 함께하면 마음의 두려움이 사라지고 주님사랑, 축복, 은혜를 생각하면서 마음이 담대해진다. 
 코로나 재난시기에 말씀과 기도로 마음을 무장하고 지켜야겠다. 주님 안에서, 그분 능력으로 우리마음은 좀 더 선하고 아름답고 굳건해 질수 있다. 오늘도 강하고 담대하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부정적 세계관을 이기시길 기원한다.
1월26일: 성인아이 신앙인
 미숙이란 아직 익숙하지 못하여 서투른 상태, 또는 발육이 완전하지 못한 상태를 뜻한다. 미숙한 사람은 언행심사간에 성장이 덜 되어 철이 없고 매사에 부족함 모자람이 있는 자이다. 헌데 미숙을 영어로 표현할 때는 두 단어가 사용된다. 하나는 premature 이고 다른 하나는 immature 이다. Premature 는 시간상으로 성숙되지 못한 상태의 미숙이다. 반면에 Immature는 시간상으로는 이미 성숙함에 도달해야 함에도 아직도 미숙함에 머문 상태이다. 대부분 아이들은 premature하다.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어른들에 비해 현저히 부족하고 모자란다. 개인적 역량과 사회적 적용력이 어른들과는 비교할 바가 못된다. 헌데 아이들의 미숙함은 유년기,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성숙함으로 바뀐다. 허나 성숙에 단계에 이르렀어야 할 성인이 여전이 어린아이같이 철이 없고 유치하다면 이는 Immature이다. 한마디로 premature는 아직 덜자란 아이들에게 쓰이는 말이고  Immature는 성숙치 못한 어른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주변에서 간혹 성숙히 못한 어른, Immature한 사람을 본다. 그는 나이상으로는 어른이고 신체상으로는 성인인데 정신적, 이성적, 영적으로 제 기능과 역활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 심리학에선 이런 사람을 성인아이라 칭한다. 몸은 성인이지만 그 외는 미숙한 아이라는 뜻이다. 기독교 세계에도 성인아이 신앙인들이 제법 있다. 그들은 신앙생활의 길이와 연륜, 교회출석의 기간에 근거하면 분명 성숙함의 반열에 들어 있어야 하는데 늘 초보 신앙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미숙한 신앙인은 십자가 보혈로 인한 죄사함에의 확신및 구원의 확신이 희미하다. 그는 동일한 죄를 반복하면서 괴로워하며 힘겨워 한다. 견고한 영적 지각을 사용하기 보다는 변하기 쉬운 감성에 호소해 신앙생활, 교회활동을 하곤 한다. 성경말씀을 따르기보다는 자주 여론과 시대적 흐름에 관심을 갖는다. 미숙한 신앙인은 별 것 아닌 일에도 자주 유혹, 도전받고 넘어지곤 한다. 히브리기자는 미숙한 기독자들을 향해서 그리스도의 초보를 버리자고 호소한다. 히6:1-2에,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라” 했다.
 우리들은 어떤가? 믿음의 기간상으로 보나, 연단과 훈련상으로 보나, 주님의 은혜를 덧입은 상황으로 보나 장성한 신앙인이 되어 있어야 할 시점에 회개, 믿음, 세례, 안수, 심판등의 초보적 교리에 매달려 씨름하고 논쟁하고 있지 아니한지. 혹 역기능 신앙생태라면 이를 벗어나서 영적성장을 이루어야 한다. 믿음 안에서 자라가며 영적 열매를 맺을때 주님이 기뻐하시고 영광받으신다. 우리 모두 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주님과 주위 사람들이 인정하는 성숙한 성인 신앙인이 되자.
1월22일: 하나님의 음성듣기
 하와이 주 코나에 YWAM이라는 선교단체가 있다. 그곳에는 세계 각처에서 온 2,2000명의 봉사자들이 일하고 있다. 한 선교단체에 어떻게 2만명 이상이 모집되어  사역하고 있을까? 그것도 자원해서 말이다. 그들은 복음선교의 사명과 가치에 매료되어 시간과 돈과 젊음을 투자하고 있다. YWAM설립자인 달린 커밍햄은 그 비결이 ‘하나님음성 듣기’ 라고 힘주어 말한다. 자원사역자들은 이구동성으로 하나님께서 선교를 위해 자신들을 부르셨을때 주의 음성을 듣고 모든 것을 희생할 용의가 되어 있었다고 했다. 그들에게 하나님음성을 듣는 일이 가장 우선이었다.
 상담학에서 제일가는 원리가 있다. 그것은 내담자의 말을 잘 들어 주는 것, 즉 경청하는 것이다. 믿음세계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의 음성듣기이다. 하나님은 말씀자체로 존재하신다. 하나님 말씀에는 생명과 빛이 있어서 우리들이 그것을 들을때 영혼이 살고 삶이 어둠 속에 실족치 아니한다. 우리들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음성을 듣는다. 기도 중에 주님음성을 체험하기도 한다. 때때로 환상과 이상, 꿈을 통해서 주님음성을 듣는다. 믿음이 연약한 자는 믿음 강한 자를 통해서 주님말씀을 깨우치기도 한다. 환경과 예기치 못한 사건과 사고들을 통해서도 주님은 말씀하신다. 사람마다 주님음성을 듣는 방법과 시점은 달라도 하나님은 모두를 향해 말씀하신다.
우리들은 주님음성 듣는 것을 훈련해야 한다. 두 귀가 있다고 저절로 주님말씀이 들리는 것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듣길 원하는 말만을 들으려 하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누군가 말해 주길 바란다. 내용상 좋고 아름다운 말이어도 자신이 듣길 원치 않으면 그것이 들리지 않는다. 기독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바가 아니라 주님이 말씀하시길 원하시는 것을 들으려 해야 한다. 주님음성을 들으려면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온전히 내려 놓아야 한다. 말씀에 대한 편견을 버려야 한다. 주님음성 듣기는 필수적인 영성훈련 과정이며 꼭 배워야 할 중요한 경건 연습이다.
 우리는 어린 사무엘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 음성듣기의 중요함을 깨우칠 수 있다. 사무엘은 제사장 엘리에게 성전사역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가르침받았다. 그는 정결례, 음식 규정, 기도하는 법, 제사드리는 법, 율법 읽기등을 배웠다. 헌데 이 모든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이 배우지 못한 것이 한가지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 음성듣기였다.  어느날 하나님이 사무엘을 세번 부르셨다. 그때마다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이 자신을 부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엘리에게로 갔고 엘리는 마침내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고 계심을 알게 되었다. 엘리는 사무엘에게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말하도록 지시했다. 이런 방식으로 사무엘은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훈련을 했다. 그후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전무후무한 선지자로 사용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말씀을 듣도록 하셨다.
 하나님음성 듣기는 신앙생활의 기초이며 근본이다. 하나님음성을 잘 듣어야 제대로 믿고 올바로 주의 일에 헌신 할수 있다. 주의 음성 듣기를 매일 훈련하며 말씀을 푯대삼아 신실하고 성결하게 살아가시길 부탁드린다.
1월19일: 우리의 목표
 과거 러시아 수도인 페체르부르크에 아까끼에비치라는 노인이 살고 있었다. 지인들이 그에게 “당신의 평생 소원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매번 똑같이 “내 인생 목표는 아주 비싸고 고급진 외투를 갖는 것이오”라고 대답했다. 아까끼에바치는 생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평생동안 일하고 저축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는 80 루블의 돈을 저축하여 꿈에 그리던 외투를 구입했다. 그 날은 노인에게 성공한 날이자 목적을 이룬 날이었기에 큰 기대감과 흥분된 마음으로 가득 찼다. 허나 안타깝게도 그는 비싼 외투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던중 강도를 만나서 그것을 강탈당했다. 그는 매우 절망했다. 단순히 고급 외투만 강탈당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성공과 행복까지도 강탈당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노인은 너무 속상해 하면서 좌절의 늪에 빠진채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죽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고골리의 단편소설 「외투」라는 소설에 나오는 내용이다.
 세상에는 이 노인처럼 한시적이고 허망한 것에 목표를 둔 사람들로 넘친다. 고급 물건을 위시 호화 주택, 비싼 승용차, 높고 우아한 자리, 충분한 은행잔고등 소유및 세상적 가치에 목표를 두고 이의 성취를 통해 성공과 행복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심리학자 에릭 프롬은 “소유에는 행복이 없다. 행복은 존재에 있다”고 말했다. 소유가 결코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하는데도 우리들은 어리석게도 그것을 추구하며 계속 속고 사는 것이다. 참된 행복은 인생의 목표를 분별하여 그것을 이루었을 때 주어진다. 사람들마다 계획하고 추구하는 바가 다를 수 있지만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삶의 목표가 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우리들은 주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 헌데 죄로 상당부분 그 형상을 상실했다. 그 잃어버린 형상을 회복해 다시금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 우리들의 목표이다. 하나님 형상의 속성은 거룩함이다. 따라서 거룩해지는 것이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며 우리들의 제일가는 목표이다. 거룩은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에릭 프롬이 말하는 존재의 개념이다. 레 19:2에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라” 했다.
 거룩하기를 원하는 자들이 피해야 할 것들이 있다. 음행, 부정, 정욕, 악한 욕망, 탐욕, 우상숭배, 분노, 격분, 중상모략, 신성모독, 부끄러운 말, 궤변, 거짓말등이다. 반면에 추구해야할 것들은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인내, 용서, 사랑, 화평, 감사, 성실, 성실, 순종적 자녀됨, 믿음 안에서의 부부관계, 친절하고 따스한 대인관계등이
다. 거룩은 거룩은 인간스스로의 노력의 산물이 아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거룩케 하신다. 성령님은 우리가 말씀과 기도에 전념할 때, 진리를 따라 행할때, 죄를 철저히 회개할 때, 주님말씀에 순종하고 따를때 거룩케 하신다. 인생목표인 거룩함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의 생각과 언어, 행위는 순결하고 아름답다. 거룩한 자의 얼굴에는 늘 하나님의 광채가 서려 있다. 그의 삶에는 행복과 기쁨의 강이 늘 흐른다. 주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 즉 거룩한 자가 복이 있다 하셨다. 삶의 상황과 여건에 상관없이 항상 거룩함에의 열망을 지닌 우리 모두이길 기원한다.
1월13일: 마음 안아 주기
 코일구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작년 3월 중순에 시작됐는데 지금 10개월이 훌쩍 지났다. 그간 우리들은 거리두기및 마스크쓰기, 손 잘 씻기가 전염병을 예방하는 유일한 수단이라 믿고 지내왔다. 헌데 지금의 결과는 어떤가? 여러 백신들이 개발되어 단계적으로 상용화되고 있지만 확진자 수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 가고 사망자 수도 증가하고 있다. 지난 1년 동안  사회적 거리두기를 열심히 실천했지만 그것이 예방책의 전부가 아니었고 게다가 서로 안보는 사이에 우리들 사이의 마음은  좀 거리감도 생겼다. 사실 사회적 거리두기란 말은 불합리한 용어이다. 인간은 애초부터 사회적 존재로 지음받았다. 하나님은 아담이 독처하는 것을 안 좋게 보시고 돕는 베필로 하와를 지으셨다. 둘은 최소단위의 사회를 이루고 그것의 구성원들로 생과 삶을 공유했다. 인간에게서 사회성을 빼면 존재의미가 없어진다. 해서 사회적 거리두기란 용어보다 물리적 거리두기란 말이 더욱 적합하다. 최근 서울시 송파구청에서 이런 현수막을 걸었단다. “사회는 거리두기! 마음은 안아주기!”. 재난기간이 길어져 가면서 사람들이 사회적 거리두기에 지쳐갈때 서로 마음을 안아주며 힘이 되어주라는 뜻이다. 우리들 각자는 외딴 곳에 홀로 떠 있는 섬과 같다. 섬은 바다를 필요로 한다. 바다가 감싸주고 안아주어야만 섬이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해결할 수 없는 어렵고 힘든 일들을 만나 아프고 슬프고 막막할 때 바다같은 마음으로 우리를 감싸주고 안아줄 누군가가 잇다면 그대로 살 가치있는 세상이 될 것이다. 거리 두기 만큼 안아 주기도 중요하다. 물리적 거리는 유지하되 마음의 거리는 좁혀야 한다. 그것이 회복과 치유의 도리이다.
 나호열의 시
 <안아주기>를 소개한다. “어디 쉬운 일인가 나무를, 책상을, 모르는 사람을 안아준다는 것이/ 물컹하게 가슴과 가슴이 맞닿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대, 어둠을 안아 보았는가 무량한 허공을 안아 보았는가/ 슬픔도 안으면 따뜻하다 미움도 안으면 따뜻하다/ 가슴이 없다면 우주는 우주가 아니다”. 그의 시처럼 외롭고 추울때 안아주면 삶이 평온하고 따스해진다. 왜 안으면 따스해질까? 거기에 사랑의 온기가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가장 강력한 표현은 마음을 안아 주기이다. 예수님은 모든 이들의 마음을 안아 주셨다. 창기 세리 죄인도 안아 주셨다. 그들은 예수님의 온기를 느끼며 주님께 돌아왔고 영육간 회복되었다. 코로나로 인해 물리적 거리 간격이 벌어졌을 때 우리들은 더욱 마음으로 밀착하여 서로 안아주어야 한다. 누구에게나 힘들고 아플 때가 있다. 그때 몸과 마음을 모두 안아주면 큰 위로와 평안을 얻고 살아갈 힘이 생긴다. 누군가를 안아줄때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이 그에게 전해진다. 오늘, 마음을 안아주는 따스한 날 보내시길 바란다.​
1월12일: 고칠수 있는 습관
 주의 은혜 안에서 건강하고 평안한 날 보내시길 바란다. 요람에서 생긴 버릇은 무덤까지 간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들은 소시적의 지혜로움을 노년에도 발휘하고 반면에 젊어서의 어리섞음을 노년에도 저지르곤 한다. 사람의 천성을 못 바꾸듯이 오랜시간 고착화되고 정형화된 습관도 바꾸기가 무척 힘들다. 습관은 제2의 천성이기 때문이다. 긴 세월동안 굳어진 습관을 바꾸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에 대한 여러나라 격언들이 있다. 영어에 ‘늙은 개에게 새로운 재주를 가르칠 수 없다’, 불어에 ’ 늙은 원숭이에게 우수운 표징을 짓는 방법을 가르칠 수 없다’,  스페인어에 ‘늙은 앵무새는 말하는 것을 배울 수 없다’ 등의 말들이 있다.  동일한 의미의 ‘세살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우리나라 속담도 있다. 시내가 강이 되고 강이 모여 바다가 되듯이 습관은 보이지 않는 사이에 바다같이 커진다.
 예수님이 유대선생인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를 볼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시자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 갔다가 날수 있삽나이까’ 라고 물었다(요3:3-4). 저술가이자 교수인 메릴 데니는 니고데모의 질문을 이렇게도 해석한다. ‘새로 태어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저는 변화하기에는 너무 늙었습니다. 제 삶의 틀은 이미 정해졌고 육신의 탄생은 말할 것도 없고 심리적인 재탄생도 더욱 불가능해 보입니다. 저에겐 희망이 없는걸까요?”. 예수님은 니고데모와 대화를 나누신 후 이렇게 덧붙이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이 말은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새로운 삶과 시작이 열려 있고 허락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역사하심이 있으면 아무리 습관이 단단해졌더라도 그것도 바뀌고 변할 수 있다.
 주님은 나이와 삶의 상황, 여건에 상관없이 우리를 고치시고 바꾸시고 회복시키신다. 그분은 우리들의 안과 밖에서 새 일, 크고 은밀한 일을 만들고 성취하신다. 주님의 의도하심, 목적하심을 깨닫고 변화하기에 결코 늦은 나이란 없다. 주님을 배우고 믿고 순종하기에 늦은 시간은 없다. 오래된 안좋은 습관, 나태하고 게으른 습관, 뭘하던 안된다는 부정적인 습관, 자기중심적인 습관, 자신의 마음에 안들면 화부터 내는 습관, 결심했다가 이내 포기하는 작심삼일의 습관, 매사 불경건하고 비성경적인 습관등을 주님 안에서 버리고 고칠 수 있다. 사람은 때때로 실패해도 주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바울은 ‘누구던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 했다. 지금까지 안 좋은 습관이라 여겼던 것들을 주님께 맡기며 전부 버리자. 주님이 기뻐하실 만한 습관들을 새로 키워 나가자. 기독자들의 미덕은 좋은 습관에서 나온다
.
1월11일: 주님의 본을 따라서
 몇년전 지독한 한파가 미동부 농촌지역을 강타했었다. 폭설로 전선이 끊겨 대부분 가정과 공장들이 몇일동안 전기가 공급되지 않았다. 그곳 주민인 빌은 집에서 음식을 요리할 수 없어서 식구들과 식당을 찾아 나섰다. 수마일 운전하는 동안 대부분의 가게들이 문닫은 것을 보았다. 마침내 전기가 끊이지 않았던 한 식당을 발견했는데 그곳은 손님들로 가득차 있었다. 한 여성이 빌 일행의 음식을 주문받으러 와서 말했다. “저는 이 식당 종업원이 아니예요. 교회 성도들과 여기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밀어닥친 손님들로 인해서  종업원들이 너무 바쁜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종업원과 손님들을 돕겠다고 메니저에게 말했더니 그가 승낙해서 이렇게 일하고 있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조건없이 도우려는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이고 성경이 명하는 마음이다. 주님은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기꺼이 돕고 섬기기 위해 오셨다. 따라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울때, 그것은 예수님의 본을 따르는 것이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기회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라” 권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까지 이 세상은 완벽한 곳이 아니다. 영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소용되는 것들을 모두 소유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멀리 볼 필요없이 주변 가까이를 돌아보면 주위에 많은 도움이 필요함을 파악할 것이다. 세상은 도움이 필요한만큼 소요스럽고 아픈 곳이다. 해서 세상은 줄곧 탄식한다. 피조물은 썪어짐의 종노릇 때문에 탄식하고 성도들은 연약하고 부족한 육신때문에 탄식한다. 이런 세상에서 위로받고 소망을 얻을 수 있는 비결은 서로 돕고 섬기는 것이다. 나의 넉넉함으로 상대방의 부족함을 보충하고 상대방의 넉넉함으로 나의 부족함을 보충받을 때 세상은 균등하고 조화롭게 된다.
 우리들은 물질로 도울 수 있다. 땅에는 가난한 자가 늘 존재한다. 잘사는 나라에 못사는 사람도 있다. 우리들은 그들을 향해 손을 펴고 주머니를 열어야 한다. 또 기도로 도울 수 있다. 기도는 하늘의 도움이 내려오는 파이프이다. 헌데 어떻게 기도해야할지 무엇을 아뢰야할지 모른채 기도의 입이 막힌 영혼들이 많다. 저들을 위해 중보기도자가 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들은 복음으로 도울 수 있다. 우리들에게 물질이 필요하지만 더욱 필요한 것은 복음이다. 소유는 이땅에서만 통용되지만 복음은 구원과 안녕을 위해서 절대적 요소로 내세에서까지 필요로 한다. 기독자들은 복음에 무지하고 가난한 영혼들을 복음으로 섬겨야 한다. 바울은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마케도니아 사람의 환상을 보고 유럽선교의 문을 열었다.
 주변에 정말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우리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들을 도울 수 있는 기회와 마음과 지혜를 주십사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주님의 응답을 받고 어려운 자들을 기꺼이 돕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곳이 천국 같아질 것이다.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 나이다.  아 멘.

​The Lord’s Prayer (NLT)
Our Father in heaven, may your name be honored. May your kingdom come soon. May your will be done here on earth, just as it is in heaven. Give us our food for today, and forgive us our sins, just as we have forgiven those who have sinned against us. And don’t let us yield 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the evil one. (For yours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ever, Amen.) Matt, 6:9-13
사도신경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 멘

​The Apostles' Creed(NIV) 
I believe in God the Father Almighty, maker of heaven and earth; And in Jesus Christ, his only Son our Lord: who was conceived by the Holy Spirit,
born of the Virgin Mary,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ead, and buried; he descended into hell, the third day he rose again from the dead;
he ascend ino heaven, and sitteth on the right hand of God the Father Almighty; from thence he shall come to judge the quick and the dead. I believe in the Holy Spirit, the holy universal church, the communion of saints, the forgiveness of sins, the resurrection of the boby, and the life everlasting. Amen.
십계명
* 십계명은 성경에 있는 열 가지의 법으로서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이스라엘 국가에게 주신 것입니다. 십계명은 본질적으로 구약 성경에 포함된 613개의 계명들이 요약된 것입니다. 처음 4 개의 계명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나머지 6개의 계명은 우리들끼리의 서로의 관계를 다룹니다. 십계명은 성경의 출애굽기 20장 1-17절과 신명기 5장 6-21절에 기록되어 있으며 다음과 같습니다.

1)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이것은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 외에 어떤 다른 신을 숭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신들은 거짓된 신들입니다.

2)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
를 베푸느니라.” 이 명령은 우상, 즉,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나타내는 것을 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는 우상을 만드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묘사하는 우상을 만드는 것은 거짓된 신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3)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주님의 이름을 헛되이 취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가볍게 취급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존경하고 공경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언급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보여야 합니다.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이것은 우리가 주님께 전념하고 쉬는 날로서 안식일(토요일, 한 주간에 마지막 날)을 따로 챙기라는 명령입니다.

5)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이것은 부모님을 항상 존중하고 공경하라는 명령입니다.

6) 살인하지 말라.
이것은 다른 사람을 계획적으로 죽이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7) 간음하지 말라.
이것은 자신의 배우자 외에 다른 누구와도 성관계를 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8) 도둑질하지 말라.
이것은 자신이 소유하지 않은 그 어떤 것도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허락 없이 취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9)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이것은 다른 사람에 대해 거짓으로 증언하는 것을 금하는 명령입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10)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이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면 그 어떤 것이라도 갈망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탐낸다는 것은 위에 열거된 계명들(살인, 간음, 그리고 도둑질에 관한 계명들) 중 하나를 어기게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을 하는 것이 잘못이라면, 바로 그것을 하려는 욕구 또한 잘못된 것입니다.


* 많은 사람들이 십계명을 지키면 죽은 후에 천국 가는 것을 보장하는 한 묶음의 규율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십계명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다는 것과(롬 7:7-11) 따라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9장 16절에 나오는 부자 청년의 주장과는 반대로 누구도 완벽하게 십계명을 지킬 수 없습니다(전 7:20). 십계명은 우리 모두가 죄를 범하였고(롬 3:23), 그러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이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
사중복음
​성결교회는 창립 당시부터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4대표제를 들어 강조하여 왔으니 이는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이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살전 5:23) 말씀에 부합되는 복음입니다.

중생: 주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가르치신 중생의 도리는 실로 기독교의 입문이며 천국시민의 자격을 갖추는 유일한 도리이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중생은 곧 영으로 나는 일이니 신비에 속한 영적 변화이며 모든 사람이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십자가에 달려 속죄의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의 역사로 새 생명을 얻어 그 사람의 심령과 인격 전체에 근본적 일대 변혁 을 일으키는 것이니 이는 진실로 천국복음이다.

성결: 이는 교인이 받을 성령 세례를 가리킴이니 주 예수께서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행1:5)고 약속하신 대로 오순절에 제자들은 성령의 세례, 즉 성결의 은혜를 체험하였으니(행2:1-4) 우리도 모든 사람을 중생으로 인도하고 중생한 처지에 있는 신자들은 성결의 은혜를 체험하도록 인도한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12: 14).

신유: 이는 신자가 하나님의 보호로 항상 건강하게 지내는 것과 또는 병들었을 때에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나음을 얻은것을 가리킴이니 이 은사는 우리 육신을 안전케 하는 복음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 모든 신자들에게 이적이 따를 것을 언명하였으니(막16:17-18) 병 낫기 위하여 기도한다든가 안수하는 일은 당연한 특권이다. 그러나 신유를 믿는다 하여 의약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재림: 구약성경의 예언의 중심이 그리스도의 수육탄생(受肉誕生)이라면 신약 성경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재림이라 할 수 있나니 우리는 공중재림 (살전4:16-18)과 지상재림(행1:11)을 믿는다. 요한계시록은 재림을 전적으로 계시한 성경으로 마지막에 [내가 속히 오리라] 한 말씀이 세번이나 거듭 기록되었다 (계22:7,12,20). 재림은 신앙생활의 요소이며 (살전3:13) 소망이요 (살전2:19-20) 경성이 된다 (마24:44,25:13).
구약성경(총39권) 목차
율법서(모세오경):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역사서: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 사무엘하/ 열왕기상/ 열왕기하/ 역대상/ 역대하/ 에스라/ 느혜미야/ 에스더/
시가서: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
대선지서: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애가/ 에스겔/ 다니엘/
​
소선지서:
​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신약성경(총27권) 목차
복음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역사서:
  사도행전/
바울서신:
  (교리서신)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옥중서신)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일반서신) 데살로나가전서/ 데살로니가후서/
  (목회서신)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옥중서신) 빌레몬서/
사도서신: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
예언서:
​  요한계시록
.
Vertical Divider
  • 교회안내
    • 목회일정표
  • 말씀과 예배
  • 교회소식
    • 사진첩
  • 목양실
    • 목회서신 >
      • 테스트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