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서신 <정직의 가치> 2021.9.3. 중국작가 데미가 쓴 소설중에 “꽃이 없는 빈 화분”이란 글이 있다. 오래전 중국에 핑이라는 꽃을 참 좋아하는 소년이 있었다. 당시 그가 사는 나라에자식이 없었던 왕은 자신의 후임을 찾고 있었다. 왕도 꽃을 무척 좋아했기에 생각끝에 모든 젊은이들에게 꽃씨를 주기로 했다. 그리고 가장 아름답게 꽃을 피워 1년 후 궁으로 가져오는 자를 후임 왕으로 삼겠다 공포했다. 다수의 젊은이들이 후계자가 되기 위해 꽃씨를 받아 열심히 가꾸고 꽃을 피웠다. 핑도 최선다해 물주고 가꾸었다. 헌데 다음해 봄이 와도 그의 꽃씨는 싹도 나지 않았다. 그는 매우 실망했다. 그의 부모들은 무엇이던 최선다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위로해 주었다. 핑은 약속된 날에 꽃이 없는 화분을 들고 왕께 나갔다. 그날 많은 젊은이들이 꽃이 만발한 화분을 들고 의기양양하게 왕 앞에 등장했다. 그들은 빈 화분을 갖고 온 핑을 비웃고 조롱했다. 왕은 아름답게 꽃 피어있는 화분들을 심사한 후 핑에게 다가왔다. 왕은 꽃이 없는 화분을 보고 핑에게 “네 용기와 정직에 감탄한다. 너야말로 다음 왕으로 나의 후계자이다” 선포했다. 왕은 참석한 젊은이들에게 “너희에게 주었던 꽃씨는 한번 요리했던 것으로 싺을 낼수 없는 것이다” 고 말했다. 이 글은 정직한 삶속에는 반드시 귀중한 댓가가 기다리고 있고 아름다운 열매도 맺을 것이지만 거짓과 불의에는 반드시 불행과 좌절이 뒤따르게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정직은 바른 삶을 위해 절대 필요한 인생의 덕목이다. 정직은 성공과 행복에 이르는 요소들인 진실, 공의, 성실, 충성, 신뢰등과 궤적을 같이 한다. 아름답고 고상한 삶의 여정에는 정직이라는 품격이 게재되어 있다. 믿음과 공평, 의로움은 모두 정직에서 근거한다. 한 사람의 인생은 업적, 소유, 위치등을 통해서가 아니라 정직한 믿음과 신실한 삶을 통해서 평가되어진다. 이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추구하는 공공가치는 평화이다. 헌데 평화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정의, 인권, 나눔, 인애등을 위해 헌신하고 노력한다. 이 요소들의 뿌리에는 정직이 있다. 정직하지 않은 정의, 인권, 나눔등은 오히려 불의, 분열, 투쟁들을 양산할 뿐이다. 하나님은 거짓을 말하시거나 실언하시지 않는 정직의 하나님이시다. 반면에 사단은 정직의 반대개념인 거짓의 아비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고백하는 아멘이란 용어는 ‘신실하다, 그렇다’라는 뜻으로 신뢰, 즉 정직을 의미한다. 기독자들은 하나님을 닮은 정직의 삶을 살아야 한다. 정직이 모든 삶의 기본적 덕목이 되고 과정이 되어야 한다. 언제 어디서나 거룩으로 양식을 삼으며 정직으로 옷을 입어야 한다. 우리들은 하나님과 그분 말씀 앞에서 늘 정직해야 한다.자신의 양심에도 부끄럼 없어야 하며 이웃들에게도 절대 정직함으로 주님닮은 자임을 증거해야 한다. 성경은 정직한 자에게 돌아갈 열매들을 열거한다. 시 112:4에 “정직한 자들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이로다”했고 사 26:7에서는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시도다”했고 잠 2:7에서는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했고 잠 23:16에 “만일 네 입술이 정직을 말하면 내 속이 유쾌하리라” 했다. 정직은 인격과 삶의 덕목들을 담는 그릇일뿐더러 신앙생활의 모든 요소들을 수용하는 최고 가치이기도 하다. 주여, 우리 안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목회 서신 <파스칼의 고백> 2021.8.27. 17세기프랑스의수학자,과학자,철학자였던파스칼은 창조적 인생을 살았다. 그는 17세의 나이에 당시 프랑스학계를 뒤집어 놓은 수학의 혁신적 논리를 펴냈다. 이어 오늘날 전자계산기의 초창기 모델을 발명했고, 공기의 압축에 관한 탁월한 이론을 창출했다. 그는 이런 천재성으로 20세 전에 프랑스 학계에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런 까닭에 그는 하늘을 찌르는 교만과 물질주의및 이기주의, 성적인 방종과 쾌락에 젖어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31세 되던 해에 하나님을 만났다. 인간 최고봉에 올랐다고 자부했던 파스칼이 자신이 상상도 못했던 지식과 사랑과 능력을 지닌 존재인 하나님과 일대일로 부딪쳤던 순간이었다. 그때의 감격을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은총의 해 1654년, 11월 23일 월요일 밤 10시30분, 그 짧은 시간에 나는 하나님을 만났다. 철학자의 하나님, 지식인의 하나님도 아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만났다. 확신 또 확신,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기쁨과 평화! 예수 그리스도이신 창조주 하나님, 또한 나의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 외의 모든 것들은 이제 내 인생 뒷전으로 사라져 버렸다. 복음을 통해서 그분이 내게 다가오셨다. 세상은 그분을 모르지만 이제 나는 하나님을 안다. 나는 내 인생의 감독이 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완전히 항복한다. 나의 기쁨은 영원하다. 내가 당신의 말씀을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아멘. 아멘. 아멘.." 파스칼은 그후 8년 밖에 더 살지 못했지만 그 기간 동안 모든 학문활동을 접고, 기독교사 걸작품으로 꼽히는 명상집, 팡세를 저술했다. 그는 깊은 묵상의 결정체인 팡세 속에서 인생의 처음이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끝나고 있음을 고백했다. 현대수학과 과학의 일대 전환점을 가져온 파스칼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자기 인생의 새롭고도 진실한 지평을 보았다. 하나님께서 만나 주신 이가 어디 파스칼 뿐이랴.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시며, 파스칼의 하나님이시며 또한 우리 모두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모두를 만나 주신다. 누구던지 그분을 만나면 신분, 위치, 업적, 성향, 실력에 상관없이 인생이 송두리채 바뀐다. 단지 표면적 변화만 일어나는게 아니라 심연의 변화, 내면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가치관과 세상관이 바뀌며 삶의 내용과 철학이 변하며 살아가는 방식도 변한다. 그리고 목표와 운명까지 바뀐다. 주님을 만나면 모두 새 사람, 새 영이 된다. 주님에 의해 다시 빚어지는 새 피조물이 된다. 더 나아가 주님을 만난 이들은 주위 사람들에게 크고 신비로운 감화력, 영적 영향력을 끼친다. 예수님을 만난 12제자들은 배우지 못한 어부들이었다. 헌데 그들은 주님을 만나 변화받고 능력받아 세상을 뒤집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사회적 위치가 미천했고 또한 믿음의 이유로 핍박, 박해까지 받았지만 예수복음의 능력으로 세상을 요동치게 했다. 남성편력이 심히 문란했던 사마리아 수가 성의 한 여인은 물길러 나왔다가 예수님을 만난 후 인생이 획기적으로 바뀌었고 그 지역인들에게 주님을 전하는 전도부인이 되었다. 현실세계를 살아감에 필요한 물질을 많이 벌고 고급진 문화를 향유하고 지식과 권력을 누리며 남들보다 더욱 안락하고 돋보이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사람들은 성공이라 말한다. 헌데 성공보다 더욱 가치있고 복된 삶은 주님을 만나고 구원받고 새로운 영적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믿음의 삶이다. 주님 없이는 땅의 삶만을 살지만 주님을 만나면 땅에서도 하늘의 삶을 살게 된다. 우리의 최고 기쁨과 행복은 지금 이 자리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목회 서신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 2021.8.20.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불신앙인인 자연인과 신앙인인 그리스도인이다. 또 그리스도인 중에도 두 부류가 있다.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과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이다. 전자는 미숙한 그리스도인이고 후자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다. 고전 1:30절은 영에 속한 사람의 실체를 보여준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을 향해 “ 너희는하나님께로부터나서그리스도예수안에있고” 했다.그리스도안에있는 존재, 이것이영에속한사람의자기이해의핵심이다. 그리스도안에있다는것은그리스도와연합해있다는것이고 그의 뜻과 가치관을 따른다는 것이다.그리고 그의 생명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인은그리스도와함께 2 천년전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 위에서 죽었고 주님이 부활하실때 그분과 함께 살아난 자이다. 그리스도가영에속한분이듯이그와연합한 그리스도인도 영에속한사람이다. 우리 기독자들 안에계신그리스도가보배이듯이그분안에있는우리도보배들이다. 우리들은 깨지기 쉬운 천한 질그릇으로서가 아니라보배의정체성으로산다. 질그릇의 정체성으로살면늘불안하고 두렵고 불완전하다. 허나 보배의 정체성으로살면주안에서 당당하고 안전하고기쁘다. 영에 속한사람은 육에 속한 사람과 삶의 방향과 방식이 다르다. 육에속한사람에게는 육의방식이있고영에속한사람에게는 영의방식이있다. 육에속한사람은 육신과 외모에따라자기를이해하고더좋은외모를 취하기 위해서 살지만 영에속한사람은영의 판단에 따라자기를이해하고내면의 아름다움을추구하고산다. 영에 속한 사람이나 육에 속한 사람이나 모두 땅에 두 발을 딛고 외견상 비슷한 일상에 얽매어 사는 것은 같지만 서로간에 맺어지는 삶의 열매들은 현저히 다르다. 신앙인과 불신앙인의 구별은 외형적 모습에서가 아니라 나타나는 열매로서 구별된다. 열매로 그가 어떤 신앙인인지를 파악한다.예수님은 ‘좋은나무가나쁜열매를맺을수없고 못된 나무가아름다운열매를맺을수없느니라(마 7:18)’ 하셨다. 즉 좋은나무에만좋은열매가맺고 나쁜나무에는나쁜열매가맺힌다.마찬가지로 영에속한사람만영의열매를맺을 수 있고육에속한사람은 오직 육의열매만맺는다. 영에속한사람으로서우리는좋은열매를 기도하고 기대하고추구함이마땅하다. 어떻게 영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우선 영에 속한 사람이라는 자기정체성과 확신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각 사람은 자기 정체성에 부합한 삶의 열매를 맺는다. 정체성의 회복은 단지 삶의 모습과 외적 행위들을 바꾼다고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부활하신 주님의 영인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통제하셔야 한다.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육의 요소들인미움과분노, 분쟁과 욕심, 분노, 갈등 두려움등은 오직 성령께서만 해결하실 수 있다. 정체성 회복은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할 때라야 가능하다. 갈 5:25에, “만일우리가성령으로살면성령으로행할지니”했다.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인, 하나님자녀로서의 정체성이 복원되면 자연스럽게 우리네 삶에서 영의 열매들이 맺어진다. 우리들은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다. 영에 속한 자들로 우리들은 세상에 대해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들이다. 그리고 날마다 죄에 대해 죽는 자들이다. 우리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아직 남아있는 옛사람, 옛지체들을 날마다 죽이며 온전한 새 사람을 이루어 가고 있다. 물론 새사람의 열매들도 맺어가는 중이다.
목회 서신 <하나님 신뢰>2021.8.13. 믿음이란 믿음의 대상이신 주 하나님에 대한 철저하고도 변함없는 신뢰이다. 잠 3:5에,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라 말라” 했다. 하나님에 대한 의지와 신뢰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어떤 경우에도 그것은 참 믿음이 아니다. 주님을 신뢰하면 인생여로에 많은 은혜와 도움을 누린다. ‘하나님의 부력’이란 말이 있다. 우리가 물에 몸을 담그면 그 순간은 물에 빠져들지만 몸에 힘을 뺴고 물에 몸을 온전히 맡기면 물에 떠오르게 된다. 이를 부력이라 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고 그분께 인생자체를 맡기면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부력을 경험할 수 있다. 하나님은 믿는 자가 고통과 절망의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지 않게끔 당신의 부력을 작동시키신다. 하나님의 부력을 체험했던 한 사람이 이렇게 노래했다. “슬픔의 파도에 떠밀려도 기쁨의 해안에 닻 내릴 수 있고 절망의 벼랑에 떨어져도 희망의 빚줄기 잡을 수 있네”. 인생을 송두리채 주님께 맡기며 사는 사람은 삶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어떻게든 살수 있다. 강하신 주님의 손길이 늘 그에게 미치기 때문이다.하나님을 신뢰하며 사는 사람은 매일매일 그분이 베푸시는 은혜에 감사하고, 부력같은 힘으로 역사하는 그분 능력에 감탄하며 살아간다.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자신 스스로 무언가를 할수 있다는 교만을 버리고 주님 앞에서 매사에 겸손해 한다. 시131:1에, “주님 이제 내가 교만한 마음을 버렸습니다. 오만한 길에서 돌아섰습니다. 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 나서지 않으며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했다. 교만과 오만은 다른 것이 아니다. 자신 스스로 인생과 삶을 주관하고 통제하고 다스릴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인생이 무거운 이유 가운데 하나는 남보다 더 크고 놀라운 일을 해내야 한다는 강막관념과 자신이라면 그것을 할수 있다는 자기 과신때문이다. 우리들은 간혹 크고 놀라운 일들을 행하면서도 정작 일상적이며 꼭 필요한 소소한 일들을 놓치곤 한다. 남보다 더 큰 업적과 공적을 쌓는 것, 아무나 할수 없는 참 귀하고 위대한 일이다. 헌데 그것 못지 않게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은 크던 작던 간에 맡겨주신 사람과 주어진 일에 겸손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충성다하는 것이다. 가난한 자들의 아버지라 불리워졌던 피에르 신부는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을 “매일 저녁 ‘나의 능력과 특권과 재능과 학식을 가지고 나에게 위탁된 약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위해 무얼 했는가’를 자문하는 것”이라고 요약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모든 일에 자신의 능력과 힘, 지혜는 간소화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힘을 극대화 시킨다.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정하고, 자신이 좋아하고 원하는 어떤 일들을 자의로 단념하고 내려놓는다. 그리고 주님이 기뻐하시고 소원하시는 일에 믿음으로 충성한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는 매순간이 의미로 충만한 시간이고 범사가 의미가득한 일들이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바라보며 사는 자의 자리는 늘 성전이 된다. 그에게는 현재의 시련조차 미래의 축복에 이르는 신비로운 통로이다. 범사 하나님을 인정하며 그분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주님의 부력이 늘 작동한다. 그것도 고성능으로 말이다.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면서 평안함, 안연함, 행복, 풍성함을 누리시길 기원한다.
임마누엘칸트는“이기주의”라는논문에서이기주의를철학적으로설명했다. 첫째는논리적이기주의로자기생각과판단, 이론은늘옳다고하는것이다. 둘째, 미학적이기주의로자신의심미적취향에만족하고자기느낌이옳다고여긴채자신의사고와감성을예찬하는것이다. 세째, 도덕적이기주의로옳고그르다고하는객관적기준이없고내가기준이되어내게이로우면이로운것이요내게해가되면악하고해롭다하는것이다. 칸트의언급처럼오늘날도삶의모든분야에계층, 지역, 집단, 국가이기주의가팽배해있고현대인들은거기에깊이함몰되어간다. 죄가 관영한말세를살아가는세상사람들이이기적삶을사는것은별로큰일이아니다. 하면우리들은그들과는구별되어야하지않을까? 안타깝게도많은기독자들도이기주의사조에점차빠져들고있다. 세상사람들은자신들보다교회와성도들이더욱이기적이라고힐난하고비난하기도한다.그들은세상과는뭔가달라도달라야할기독자들의삶과생활, 행동에서이기적모습만을보는듯하다. 교회의이기적모습은사람들을복음과구원에서멀어지게하는빌미를제공한다. 기독자들은 이기적으로판단되어서는안되는하늘의생명으로거듭난새사람들이다. 거듭난자들게는그들만의정체성과삶의가치들이있다. 그정체성으로믿음의본질을나타내고믿음의주이신예수의영광을드러낸다. 기독자됨의정체성중하나가이기심과대척점에있는이타심이다. 대부분성경의위인들은믿음으로살면서이타적삶을실천했다. 특히예루살렘초대교회는이타심의본보기였고교과서였다. 초대교회성도들은서로교제하고, 일심으로기도에전념했다. 자신들의재산과소유를팔아공유했고, 기쁨으로음식을나누었다. 그들은마음과뜻을같이했다. 초대교회는당시에도세력을발휘했던이기주의를버리고나와너, 우리모두의공동체삶을지향하고구현했다. 하나님께서는초대교회에큰복을베푸셨다. 각종기사와표적이나타났고, 날마다구원받는사람들이더해졌으며, 온백성들에게칭송을들었다. 초대교회의 이타적사랑은예수님으로부터기인했다. 예수님은전적으로타자를위한삶을사셨다. 예수님의이타적삶이가장극적으로나타난것이바로성육신과십자가사건이다. 예수님은하늘보좌와영광을온전히내려놓으시고인류를섬기시기위해종으로오셨다. 그리고온인류를위해자신을십자가에서희생하셨다. 바울은갈 1:4에서, “그리스도께서아버지의뜻을따라우리죄를대속하시기위해자기몸을주셨으니”했다. 따라서새생명으로거듭난자들이며예수를믿음의주로고백하고따르는우리들은초대교회가보여주고예수님이몸소실천하셨던이타적사랑을행하며그것을세상에증거함이마땅하다. 오늘같이 환경이 척박하고 현실이 소요스러울수록 우리들은 자신만을 위한 삶을 내려놓고 성령의 능력과 지혜 안에서 주님과 이웃과 세상을 위한 생각과 계획, 언행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며 세상에 희망을 주는 이타적인 존재들로 살아야 할 것이다. 주님과 사람들 앞에 올바른 믿음 생활의 시작과 과정과 끝은 경건하고도 이타적인 사랑과 섬김일 것이다.
<마음 다해 주께 하듯> 7월23일
필리핀의 부자사업가의아들인카통까우는신학을공부하기위해마닐라에소재한한성서대학에입학하였다. 헌데기숙사에들어간날, 욕실과화장실이불결하여마음에들지않는다고학장에게불평을털어놓았다. 학장은웃음을지으며‘내가곧조처해주겠네”라고했다. 까우는학장이청소부를보내깨끗하게해주리라믿었다. 얼마 후화장실닦는소리가들려왔다. 까우는청소하는사람이누구인가보려고화장실을기웃거렸는데다른이가아닌학장이즐겁게화장실과욕실을청소하는것이었다. 청소를끝낸 뒤학장은“자, 화장실이깨끗 해졌으니이제마음에드나?”라고물었다. 까우는예상밖의일에놀라서아무말도못했다. 학장은웃음 띈얼굴로“우리학교는재정상태가그다지넉넉치못해서청소부를따로둘수가없어모두가스스로일들을 한 다네”말했다. 그때까우는깊은감동을받았다. 후일그는 성서대학을졸업하고미국으로건너가학위를받고시카고자유교회에서외국인학생들에게복음을전하는목사가되었는데그학장으로부터평생잊을수없는사랑과평화의교훈을받았 노라고가는곳마다간증했다. 요즘은 직업과일에대한개념과가치가많이바뀌었지만예전에는직업의귀천이분명있었다. 학식있고지위가높은사람이해야할일이있고, 불학식에자리가낮은사람이해야할 일이은연중구별되어있었다. 3D 업종, 즉더럽고어렵고위험한일들은배우지못한하류계층미천한자들의몫이었다. 예전의기준으로한다면위의언급된학장이기숙사청소를하는것은신분과격에맞지않는일이었다. 헌데성경의기준은사람들의기준과는사뭇다르다. 성경은누가어떤일을했느냐에 관심있는 게아니라누가하던그일을하는마음의태도와자세에관심을집중한다. 성경은직업의귀천, 일의가치의경중을따지지않는다. 다만어떤태도로그일을수행하고있느냐를따진다. 의식주를 해결하고이웃과사회의공공선을도모하고더나아가주님영광을위해서하는모든일및직업은모두소중한하나님의일이다. 즉어떤일을하든지일하는그자체가중요한것이지직업이나일에는동등한가치가부여된다. 해서사람들이기피하는 3D 직종은누군가가해야하는아주중요한일이고그러한일을하는사람들은누구보다귀한일을하는사람들이다.강단에서말씀을선포하고성례를집행하는목사의일만이아니라구원받고믿음으로살아가는하나님의백성들이하는모든일들도다거룩한주님의일이다. 주님의 일이다여기면서하는일에는두가지특별한마음의자세가있다. 골3:23에, “무슨일을하던지마음을다하여주께하듯하고사람에게하듯하지말라” 했다. 이귀절에의하면첫째자세는마음을다하는것이다. 즉어떤일이든지주님이 맡겨 주셨다는확신으로그일을소중히여기며정성을쏟는것이다. 둘째자세는주님께하듯하는것이다. 주님께하듯 하면대충대충못한다. 그분의영광을 위해 최선 다하고죽을힘다해일한다. 지금 우리들이하고있는일들이교회일이건, 일상이건, 가정사이건주님께서우리를충성스러이여겨 맡겨 주신주의일이기에감사와기쁨으로그일에최선 다하자. 범사주께하듯살아가는삶의자리에은혜와행복, 평안과풍성함이임한다.
<다섯 감옥으로 부터의 자유> 7월16일
기독자들은 주님께 예속된 주님의 자녀이며 백성으로 그 어떤 사람, 그 무엇으로부터도 자유한 자들이다. 갈 5:1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했다. 헌데 때때로 우리는 죄의 종처럼 살아간다. 의식하던 못하던 죄의 소원을 따르며 죄가 시키는 일을 행하곤 한다. 물론 성령께서 이럴 때마다 죄에 대해서 깨우쳐 주시고 회개케 하셔서 우리로 다시 자유자로 돌아오게끔 은혜 베푸신다. 죄는 우리를 자신의 종으로 만들어 다음과 같은 감옥에 구속시킨다. 헌데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감옥에 갇혀 있음을 모르는채 그곳에 거한다. 그 감옥은 철장과 쇠사슬이 있고 간수가 겹겹이 지키는 곳이 아닌데 오히려 더욱 강력하게 우리를 붙들고 옴싹달싹 못하게 한다. 이 감옥들로부터 자유해야만 참 자유자로 바로 설수 있고 평안과 행복을 누릴수 있다. 첫번째 감옥은 '자기 애의 감옥'이다. 우리들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서 결국은 자기를 사랑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심지어 자식 사랑한다는 말도 자기 중심적일 때가 많다. 이는 자신의 소원을 이루려는 경우를 뜻한다. 사람들은 이기적인 자기 애의 감옥에서 쉽게 출옥하지 못한다. 사랑이란 말은 참 아름답고 가치있지만 그 사랑이 자신을 향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기심, 자기 사랑이 큰 감옥이다. 둘째 감옥은 '근심의 감옥'이다. 정신과 의사들은 인간은 하루도 빼지 않고 근심하는 존재이다 말한다. 그들은 인간의 근심에 대하여 ‘40%는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근심, 30%는 지나간 과거의 일에 대한 근심, 12%는 미리 상상하고 가상해서 하는 근심, 18%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일에 대한근심이다’고 발표했다. 근심하면 자신의 마음이 더욱 상하고 남까지 힘들게 하며 주변 분위기까지 해친다. 근심하면 자신이 지닌 잠재력, 능력, 지혜마저 사라져 버리고 창의력은 상상조차 못한다. 근심은 자신을 비겁하고 나약한 존재로 구속시키는 정신적 감옥이다. 세번째 감옥은 '향수의 감옥'이다. 사람들은 지나치게 과거를 생각하고 회상한채 종종 옛날로 돌아가서 ‘지금 와서 보니 그 때가 좋았고 축복이었어”라고 말하곤 한다. 또한 반대로 ‘그때에 그러지 말았어야 되는데”하면서 과거를 부정적으로만 해석하기도 한다. 과거에 대한 지나친 향수와 부정등은 현재 삶에 도움이 안되며 미래로 향해 나갈 수 없는 감옥이다. 네째 감옥은 남의 것만 좋게 보는 '선망의 감옥'이다. 사람들은 비교의식을 통해 남의 것을 더 크고 좋고 가치있게 여긴다. 비교하면서 다른 사람의 처지를 선망하는 감옥에 매이면 자신에게 주어진 귀한 은사및 가치를 망각하고 비참함에 이른다. 다섯째 감옥은 '증오의 감옥'이다. 이는 영혼과 몸으로 남을 미워하고 시기, 질투함에 매여 있는 상태이다. 이 감옥에 매여있는 자들은 동료가 자신의 바람과 요구대로 따라주면 고마움을 느끼며 동역자로 여기지만 그렇지 아니하면 자신의 대적이라 여기여 불평하고 비난하고 원망하곤 한다. 증오와 미움은 영혼을 서서히 말리우고 죽게 만들며 스스로를 주님제자의 위치에서 밀어내어 마귀의 자식으로 변하게 한다. 이런 자기 애, 근심, 향수, 선망, 증오의 감옥들에서 스스로 자유할 수 있는 길이 있을까? 자신의 의지와 결심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어야 한다.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영육 간에 우리를 통제하시고 관리, 지도, 인도하셔야 한다. 성령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감옥의 요소들과는 대조되는 성령의 열매들을 맺게 하신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성령을 모시고 범사 매순간 그 분의 다스림을 받자. 죄는 성령으로만 다스리고 이길 수 있다. 오늘도 성령 충만하시길 기원한다.
“나는 누구일까요? 나는 당신의 영원한 동반자입니다. 또한 당신의 가장 훌륭한 조력자이며 동시에 가장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합니다. 나는 당신을 성공으로 이끌기도 하고 실패의 나락으로 끌어내리기도 합니다. 나는 전적으로 당신이 하는대로 따라 갑니다. 그렇지만 당신행동의 99%가 나에 의해 좌우됩니다. 나는 당신의 행동을 빠르고 정확하게 좌지우지합니다. 당신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몇번 보고 나면 나는 자동적으로 그 일을 해냅니다. 나는 위대한 사람들의 하인일뿐 아니라 실패한 모든 이들의 주인이기도 합니다. 나는 인공지능 기계처럼 정밀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기계는 아닙니다. 나를 당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할 수도 있고 당신의 실패를 위해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나를 착취하십시오. 나를 훈련시킵시오. 그리고 나를 확실하게 당신의 것으로 만든다면 나는 당신의 발 앞에 이 세상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날 가볍게 여긴다면 난 당신을 파멸의 길로 이끌 것입니다. 내가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나는 습관입니다.” 이는 한 무명인이 쓴 글이다. 습관이란 어떤 행위를 오랫동안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익혀진 행동 방식을 말한다. 우리는 어떤 것을 오랫동안 반복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어떤 습관이나 사회관습을 만들어 왔다. 사람은 습관을 통하여 인격과 성품이 형성해 간다. 해서 좋은 습관은 생의 성공와 행복, 풍성함을 위해 필수적이다. 사람이 습관을 통해 인격과 성품을 형성해 가듯 신앙의 인격과 성품은 영적습관을 통해 형성해 간다. 해서 기독자들은 영적 습관을 길러야 한다. 영적 습관을 형성하는데는 정해지고 선택된 때는 없다. 지금이 최적기이다. 영적습관은 기초적인 것에서부터 시작되어 꾸준히 행해지는 것이다. 기독자들은 주님의 뜻인 기도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습관을 훈련해야 한다. 반복적 훈련을 지속하다 보면 이들이 영혼과 몸에 익혀져서 자연스러이 인생과 신앙생활의과정들이 될 것이다. 주일성수도 습관화해야 한다. 이 날은 주의 날이기에 그분을 경배하고 섬긴다는 다짐하에 주일지키는 일을 반복하면 이후 자신의 상황이나 현실을합리화시켜 주일을 범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말씀 읽고 묵상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말씀 훈련은 신앙영역에서 제일 중요한 요소이다. 매일 밥 먹듯이 말씀을 먹고 새기고 음미하는 것을 지속하다보면 언젠가부터는 말씀없이 하루도 견딜수 없을 것이다. 전도도 습관화되어야 한다. 영혼구원은 한,두번의 전도로 열매를 맺을수 있을만큼 그렇게 쉽거나 만만한 과업이 아니다. 지속적이고 꾸준한 사랑, 섬김, 증언등으로 이행해야 할 평생 과업이다. 좋은 습관, 영적 습관은 일종의 씨앗이다. 그것은 처음엔 아주 작아 아무 변화가 없는 것 같아도 어느 순간에 자라서 열매맺고 삶을 변화시킨다. 그것은 죽은 씨앗이 아니라 생명있는 씨앗이기 떄문이다. 영적습관은 당사자에게만 유익되는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유익함이 흘러간다. 자신의 영적 성숙함 덕분에 가정과 교회가 더불어 영적 유익함을 얻게 된다. 바울은 딤전 4:7,8에서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이르도록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라고 권한다.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 한알’과 같이 아주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작고 기초적인 것부터 꾸준히 신앙을 훈련하고 경건 연습을 시행하면 언젠가는 자신의 인생과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고 동시에 교회와 공동체내에도 기대이상의 번영및 성숙함이 일어날 것이다.
<성령의 역사하심> 6월18일
불교에몸담고있다가예수님을믿게된나이많은한권사가 40년이상식구들을위해기도했다. 그권사는자신의가족, 친지들모두가그리스도의제자가되길원했다. 그렇지만오랜기간동안그권사만이가족들중유일하고도신실한그리스도인이었다. 당시불교에열성이던식구들중아무도예수님께로나아오지않았다. 헌데그권사의생애끝자락에기도의응답이나타났다. 가족과친지들중많은사람들이그리스도인이되어교회다니기시작했다. 그들이구원얻은것은그권사의기도중역사하신성령님의작품이었다. 요3장에는예수와율법선생인니고데모사이의대화가나온다. 거기서예수님은성경의핵심주제인구원의본질에대해설명하셨다. 주님은니고데모에게구원얻어하나님나라에들어가려면다시태어나야한다고말씀하셨다. 즉거듭나야한다는것이다. 그리고거듭나게하시는주체가성령님이라하셨다. 심위일체의한분이신성령님은자신의뜻과의지에따라사람들의마음을새롭게하시고인생과삶을변화시키시어하나님의자녀, 하늘나라시민이되게하신다. 성경에는성령님을상징하는비유들이많이나온다. 기름, 비와이슬, 불, 비둘기, 물, 인, 그리고바람등이다. 요 3장에서예수님은성령님을자신이원하시는곳으로움직이시는바람에비유하셨다. 3장5절에, “바람이임의로불매네가그소리는들어도어디서와서어디로가는지알지못하나니성령으로난자도다그러하니라”했다. 바람은숨, 호흡을의미한다. 이는성령이기운이라는뜻이다. 기운은삶의생기이며에너지이다. 또바람은유해요소들을제거하고날려보내며산소같은신선한공기를흡입하게한다. 성령은모든더러운것들을정화시키고 신선하게 하는 공기청정기와 같다. 그런가 하면 바람과같은성령은 믿음의 증거가 되기도 한다. 바람은눈에보이지않지만사물들의 움직임으로 그 존재자체를 증거한다. 거듭난 사람은 성령의 바람에 의해 심령이 움직이고 변화하여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감으로 믿음의 증거를 제시한다. 우리의 구원 혹은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해서는 이처럼 성령의 역사하심이 절대 필요하다. 성령이 위에 있는 하늘생명으로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신다.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은혜를 진적으로 믿고 신뢰해야 한다. 헌데 거듭나게 하셔서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은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과 자비하심에 근거하고 잇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만드신 세상을 사랑하신다. 그분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의인도 사랑하시지만 지금도 죄중에 헤매는 죄인들도 사랑하신다. 그들이 회개하고 당신께 돌아와 구원받은 삶을 살길 바라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세상에 보내 주셨다. 우리들은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님을 절대 신뢰하면서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며 전도해야 한다. 불신앙들이 성령받도록 열성적으로 지속적으로 기도하면 위의 권사님의 기도응답처럼 우리들의 가족, 친지, 지인들이 언젠가는 주님 앞으로 돌아올 것이다.
생애동안 크게 감화력과 영향력을 끼치는 3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부모님과 스승과 친구이다. 이들중 친구의 존재는 자신의 인격과 삶의 태도, 습관등을 형성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삶의 동반자이다. 4 세기경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였던 존 크리소스톰은 친구사이의 우정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친구와의 우정을 통해 장소와 계절까지 사랑하게 된다. 그것은 꽃들이 그 주위에 아름다운 꽃잎들을 흩뿌린 것 같이 친구들도 그들이 사는 장소와 시기에 참된 사랑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우정을 논할 때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 두 인물이 있다. 목동출신의 다윗과 왕자 신분인 요나단이다. 이 둘은 신분 위치상 왕권을 두고 다툴 소지가 있었음에도 진실한 우정의 모델이 되었다. 성경은 두 사람의 친밀하고 밀접한 유대관계를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서로에게 충실함으로써 깊은 우정을 유지하였을뿐 아니라 서로를 돌봄으로서 그 우정이 흔들림없이 자라게 했다. 특히 다윗을 향한 요나단의 우정은 사람들의 기대치 이상이었다.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여 그에게 우정의 징표로 자신의 겉옷과 군복과 칼, 활, 띠등 왕자임을 상징하는 것들을 주었고 또한 여러번 곤경에 처한 다윗을 돌보아 주었다. 삼상 23장 16절에서 우리는 그 둘의 우정의 정점을 보게 된다.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수풀 속으로 도망할때 요나단이 일어나 그 속에 들어가서 다윗을 위로하며 힘있게 하나님을 의지하게 했다.좋고 깊은 우정은 평안하고 형통할떄 만이 아니라 친구가 삶의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에도 하나님 안에서 강하고 담대하고 굳건히 서도록 돕는다. 잠언 17:17에,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낳느니라” 했다. 개인주의가 팽배한 현시대에 대부분 인간관계가 상대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를 따짐에 반해 기독자들은 오히려 자신이 상대방에게 무엇을 줄수 있을까에촛점을 맟추어야 한다. 주님은 우리를 친구라 부르면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주님은 당신이 하신 말씀대로 참 좋은 친구로서 우리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자신의 실패와 약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주고 세워주는 친구가 있다면 그것은 큰 축복이며 은혜이다. 그런 친구에게 늘 고마움을 표하며 그와의 우정을 더욱 돈독히 세워가야 한다. 또한 예수님께서 죄인이었던 우리를 친구로 대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친구들을 대할 수 있어야 한다. 더욱 영광스럽고 빛나는 삶은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며, 받기 보다는 나눠 주며, 대접받기 보다는 묵묵히 섬기는 삶일게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진실하고 튼튼한 친구관계를 유지하려면 자신의 의지,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이 절대 필요하다. 즉 하나님 사랑이 자신 안에 부어질 때 그 사랑으로 이웃과 친구를 사랑할 수 있고 더 나아가선 원수 사랑까지 가능케 된다. 하나님 사랑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부어진다(롬5:5). 사람은 사회적 존재이며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의 지체들이다. 행복하고 의미있고 조화로운 삶을 위해 모두에게 참된 사랑, 깊은 우정, 진실한 관계가 절실하다. 친구들, 교우들과 주 안에서 다윗과 요나단같은 아름다운 우정을 이어가길 기원한다..
<크리스천이란 이름> 6월1일
알렉산더 대왕의 휘하에 같은 이름을 가진 알렉산더라는 병사가 있었다. 그런데 그는 행실이 난잡하고 형편없어서 동료 병사들에게 큰 민폐가 되었다. 그로 인해 알렉산더라는 이름이 마구 더렵혀 졌다. 그의 소문을 들은 알렉산더 대왕은 어느날 예고없이 병사 알렉산더의 막사를 방문했다. 대왕은 겁에 질려 경례를 하는 병사 알렉산더에게 물었다. “ 자네가 알렉산더라지?”, “네. 그렇습니다. ” 자네에 대한 소문을 들었네. 내가 자네에게 두 가지를 명하겠네. 자네 이름을 바꾸게. 그게 싫다면 자네 생활을 바꾸게. 그래서 그 이름의 오욕을 앃게나“. 자신에게 주어진 이름 값을 다하고 사는 자가 있는가 하면 훌륭한 이름이 있음에도 그에 걸맞지 앉은 삶을 사는 이도 있다. 주님을 믿은 이들에게 붙여진 이름은 크리스쳔이다. 크리스쳔이란 이름은 1세기에 최초의 이방인교회였던 안디옥교회 지체들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안디옥 시민들은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고 낮에는 그리스도를 위해 충성다하고 밤에는 그리스도를 꿈꾸면서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고, 그리스도를 나타내며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고 있는 안디옥 교회내의 그리스도 제자들을 가리켜 크리스쳔이란 이름을 붙여 주었다. 처음으로 크리스쳔으로 불린 안디옥 교인들의 의식과 사고, 언어와 행위는 누가 봐도 온통 그리스도에 젖어 있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삶의 가치이며 절대 필요 조건이었다. 안디옥교인들에게 붙여졌던 크리스쳔이란 말은 그후 믿은 이들을 지칭하는 일반명사가 되었다. 크리스쳔이란 말에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작은 예수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를 닮은 자란 뜻이다. 물론 이둘의 뜻은 동일하다. 하면 우리들은 주님이름과 비슷한 이름을 소유해도 합당할 만큼 예수를 닮은 삶을 살고 있는지? 누군가 우리의 삶속에서 그 이름의 원주인이신 예수를 발견할 수 있는지? 또한 믿는 이에게는 크리스쳔이란 이름 외에도 교인이란 이름이 있다. 교인이란 주님의 몸인 교회 공동체에 속한 지체란 의미이다. 교인들은 교회의 법과 질서를 따르면서 주님의 몸을 건강하고 평온하게 잘 가꾸어 가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교회를 교회답게 세워가야 가야 한다. 또한 믿는 이들을 성도라 부른다. 성도란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거룩한 무리이다. 거룩은 하나님의 절대 품성으로 “죄와 구별된 상태”이다. 하나님은 범사에 거룩할 것을 모든 믿는 이들에게 명하셨다. 따라서 성도들은 죄된 것은 생각, 상상하거나 계획하거나 모방, 실행치 않는 자이다. 믿는 이들은 거룩으로 영혼을 단장하며 성결로 행실을 다스리면서 세상사람들 보다는 더욱 순결하고 더욱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들은 크리스쳔, 교인, 성도란 이름에 과연 합당하게 살고 있는가? 우리들과 만나는 사람마다 ‘나도 크리스쳔이 되고 싶어” 라는 감동을 불러 일으키는 그런 예수닮은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삶을 통해 안에 계신 예수님을 드러내고 나타내면서 주위에 희망과 평안, 은혜와 복을 전달하는 매력있고 아름다운 성도이었으면 참 좋겠다. 우리 모두 크리스쳔이란 명예로운 이름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그 이름에 부끄럼없이 이름 값을 하면서 언행심사간에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시길 기원한다.
<침묵> 젊은 철학자 에머슨이 대사상가인 칼라일을 찾아갔다. 두 사람은 말없이 호수 주변의 산책로를 걸었다. 해질 무렵에는 둘 다 지그시 눈을 감고 깊은 사색에 잠겼다. 두 사람은 한 마디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었다. 에머슨은 매우 기쁜 표정으로 칼라일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오늘 선생님께 정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칼라일은 밝은 표정을 지으며 에머슨의 손을 꼭 잡았다. “나도 자네에게 한 수 배웠네. 자네는 매우 훌륭한 철학자가 될 걸세.” 두 석학은 침묵 속에서 많은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많은 말보다 침묵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 세상에서는 목소리가 큰 사람이 득세한다. 무엇이던 강하게 자기소신을 주장해야 하고 목청을 돋우어 공동체의 비젼을 선전하고 내세워야 한다. 남들보다 좀 더 큰 목소리이어야 주위의 시선을 끌게 되고 관심도 얻게 된다. 너도나도 할 말이 무척 많은 세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대상이 있는 것만으로 행복을 느끼고 위안을 삼는다. 헌데 성경은 세상이 소요스럽고 떠들석할수록 잠잠할 것을 권한다. 시37:7에,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떄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했다. 말과 언어가 공동체의 표시라면 침묵은 개인적인 고독의 표시이다. 침묵에는 세 종류의 침묵이 있다. 말이 없는 무언의 침묵과 욕망과 탐심으로부터의 침묵, 그리고 불필요하고 방황하는 생각으로부터의 침묵이다. 침묵은 삶의 훌륭한 도우미이다. 우리네 생활은 일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사소하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투덜거리거나 실랑이함으로써 어두워지곤 한다. 범사가 항상 마음먹은대로 이루어지지 아니한 채 화가 나고 걱정 근심에 시달리기도 한다. 침묵은 그러한 상황들을 삶의 과정들로 이해하고 용납하고 받아 들여 온화하고 넉넉한 마음을 지니도록 해준다. 침묵은 입에서 나오는 거친 말을 예방하여 후회할 말들을 하지 않도록 도와준다. 침묵은 다른 사람의 말을 더 잘 들어줄 수 있도록 큰 인내심을 길러 준다. 침묵은 세상과 나 사이에 일정한 간격을 둘 수 있도록 해주어 세상적 소요스러움이 내 안에 들어오는 것을 막아준다. 침묵은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는 것을 도와 주어 언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바로 기도하도록 해 준다. 무엇보다 침묵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해준다.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는데 그것을 들으려면 침묵 속에 세심한 귀가 필요하다. 말을 잘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헌데 침묵은 더 좋은 일이다. 사실 지난 날들을 돌아볼때 입을 열어 다툼이 되느니 차라리 입을 닫고 침묵했던 것이 좋았던 때가 더욱 많았다. 잠언기자는 13:3에서,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 했다. 침묵은 금이며, 성숙된 인격의 한 표현이며 깊이있는 믿음의 내용이다. 우리는 심신이 회복되고 새로워지고 재충천하기 위해서 때때로 분주한 삶과 복잡다단한 세상으로부터 한걸음 물러나 하나님 임재 안으로 들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그분 앞에서 자신의 모든 짐을 벗고 고요하게 있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침묵할때 우리 영혼은 그분의 지혜, 풍성, 영광으로 충만히 채워질 것이다.
1세기경 세계 3대 도시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이었다. 이들중 안디옥은 헬라문화의 중심지이자 동서양 문화가 만나 융합하는 요충지이다. 스데반 순교시 예루살렘교회에 박해가 일어났고 성도들은 뿔뿔히 흩어져서 베니게와 구브로, 안디옥 등지에 복음을 전하는데 그때 안디옥 교회가 세워졌다. 안디옥교회는 최초의 이방인 교회이며, 지역 사람로부터 최초로 크리스쳔으로 일컬음받은 교회였다. 기독교 2천년 역사상 수많은 교회들이 이 땅에 세워지고 번영하고 사라지기도 했다. 그들 중에는 빛과 소금기능을 감당하며 영적, 시대적 소명을 다한 교회들이 있는가 하면 기능과 역활을 제대로 못한채 금촛대가 옮겨졌던 교회들도 상당수이다. 그 모든 교회들 중에서 안디옥교회는 하나님이 영광받으시고 세상사람들도 인정한 참 아름다운 교회, 건강한 교회였다. 오늘날의 교회들이 죄악이 가득한 시대에 하나님께서 신뢰하시고 인정하시는 교회다운 교회들로 존재했으면 좋겠다. 주님으로부터 인정받으려면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할까? 안디옥 교회에서 그 해답을 찾아보자. 무엇보다 교회 구성원들간 벽과 차별이 없어야 한다. 안디옥 교회에는 5명의 지도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민족이 다르고 지식, 위치, 재산등이 달랐지만 주 안에서 한팀이 되어 교회를 잘 인도하고 부흥시켰다. 안디옥교회는 구성원간 차별과 벽이 없는 평안한 교회였다. 교회가 문턱이 높다던지, 특정부류만 모인다면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아니다. 예수님은 모두를 차별없이 사랑하셨고 몸으로 안으셨다. 교회에는 세상기준과 잣대에 의한 벽이 없어야 한다. 벽이 없는 교회가 되려면 한마음의식, 공동목표의식, 지체의식을 지녀야 한다. 또한 영성이 있어야 한다. 영성이란 예수님을 닮은 거룩함을 뜻하는데 이는 말씀과 기도로 이루어진다. 안디옥교회에는 말씀이 왕성했고 기도가 풍성했다. 즉 영성이 있는 교회였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교회가 있는데 영성이 있는 교회와 없는 교회이다. 주님께서는 영성이 깊은 교회를 든든히 세우시고 견고히 유지하시고 꾸준히 부흥시키신다. 세상 사람들도 그런 교회를 주시하고 기대한다. 그리고 전도의 사명도 감당해야 한다. 안디옥교회는 성령의 지시를 따라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세워 파송했고 교회는 배후에서 그들을 기도와 물질로 힘을 다해 도왔다. 안디옥교회는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 명을 실제 이행하는 사명자 교회였다. 기독자들에게는 두 가지 큰 사명이 있는데 하나는 문화적 사명으로 삶의 현장을 잘 관리하고 다스리어 밝고 복되게 건설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사랑 안에서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복음전도는 교회의 절대사명이다. 인생의 행복은 부자되고 권세잡고 이름을 내는데 있지 않다.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하며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하는가를 깨닫고 사는데 있다. 믿음생활의 가치와 행복은 전도를 통해 영혼을 구함에 있다. 전도사명을 감당할때 개인적 믿음성장은 물론 교회도 은혜롭게 성장할 것이다. 우리교회는 어떤교회이어야할까? 인적자원, 재정자원이풍요롭고프로그램들이활발한교회이어야할까? 물론주님이그런자원들을허락해주시면감사함으로잘활용해야한다. 헌데주님이더욱인정하시고기뻐하시는교회는안디옥교회처럼영적자원을갗춘교회이다. 즉벽과차별이없어모든이들이즐겨찾는평안한교회, 말씀과기도의생명이넘치는교회, 복음의말씀전함을사명으로삼는교회이다. 모든교회들이 1세기경의안디옥교회처럼아름답고건강한교회가되길소망하며기도한다.